내고향 화성 & 수원 이야기

<화성의 역사 02 > - 고려시대

맨발나그네 2010. 5. 13. 07:08

화성의 역사 02 - 고려시대

                                                                                                                           ◆ 화성문화원 09-01 | VIEW : 738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남진할 때 수성(水城) 사람이었던 김칠(金七/金柒), 최승규(崔承珪) 등 200여명이 귀순하여 고려 건국에 공로가 있었다 하여 태조 17년(934)에 수성군은 수주(水州)로 승격되고 당성진(唐城鎭)은 태조 23년(940)에 다시 당성군이 되었다.

 

그 뒤 성종(成宗) 14년(995) 지방관제를 개편할 때 수주의 별호를 한남(漢南) 또는 수성(隋城)이라 하고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1005)에 혁파되었다. 또한 지방행정의 통제 ·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지방제도를 정비한 현종(顯宗) 9년(1018)에는 다시 수주로 승격되어 지수주사(知水州事)를 둠과 동시에 안산(安山) · 용성(龍城) · 정송(貞松) · 쌍부(雙阜) · 진위(振威) · 양성(陽城) · 영신(永新) · 광덕(廣德) 등 8개 현(縣)을 영속시켰으며 당성군은 재양현(載陽縣)을 영속하여 수주의 속군(屬郡)이 되었다가 그 뒤 다시 인주(仁州, 지금의 인천)에 속하였으며 명종(明宗) 2년(1172)에 감무(監務)가 두어졌다.

 

그 후 원종(元宗) 12년(1271) 강화 앞바다의 손돌목(穿梁 천양)을 지키던 몽고병사들이 대부도(大阜島)에 들어와 약탈을 자행하므로 섬 주민들이 분노하여 몽고병 6명을 잡아 죽이고 난을 일으켰다. 이때 수주부사(水州富使) 안열(安悅)이 이를 평정하자 그 공으로 수주를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수원(水原)으로 개칭되었다가 그 뒤 다시 수주목(水州牧)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충렬왕(忠烈王) 16년(1290)에 남양 출신 홍다구(洪茶丘)가 원(元)나라에서 정동행성승(征東行省丞)이란 벼슬을 하였다는 이유로 당성은 지익주사(知益州事)를 두는 고장으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다시 강령도호부(江寧都護府)라 하였으며 충렬왕 34년(1308) 다시 익주목(益州牧)으로 승격되었다.

충선왕(忠宣王) 2년(1310) 모든 목(牧)을 혁파함에 따라 익주목은 남양부(南陽府)로 수주목(水州牧)은 수원부(水原府)로 강등되었다.

 

그 후 공민왕(恭愍王) 11년(1362) 홍건적(紅巾賊)이 침략하여 양광도민(楊廣道民)에게 항복을 권유하자 수원부민(水原府民)들이 제일 먼저 항복하여 적의 세력을 더욱 강성하게 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수원부는 수원군으로 강등되었으나 군민들이 당시 재상이었던 김용(金鏞)에게 뇌물을 주며 설득한 끝에 다시 수원부로 승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