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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의 역사

맨발나그네 2010. 3. 3. 21:49

제1절 선사시대 ~ 고려시대

 

현 행정구역상 화성시 지역은 조선시대 말까지 행정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수원부(군)와 남양부(군) 지역이 일제 강점 초기인 1914년 4월 1일의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통합되었던 수원군에 포함되는 지역이다. 지난날의 ‘수원군’은 흔히 일반적으로 지칭되는 ‘수원지방’이란 개념과 일치되는 것으로서 현재의 행정구역상 수원시ㆍ오산시ㆍ화성시 전역과 평택시ㆍ안산시ㆍ의왕시ㆍ군포시 일부가 포함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일찍이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신석기시대를 경유하여 청동기시대 내지 초기 철기시대에는 마한(馬韓) 54국에 속하는 몇 개의 소국(小國)들이 터잡아왔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전 한(韓) 조에 전하는 마한 54국 가운데 수원지방과 관련 있는 소국은 원양국(爰襄國)ㆍ상외국(桑外國)ㆍ모수국(牟水國) 등이다. 이병도(李丙燾)의 『한국고대사연구』에 의하면 원양국은 현 화성군 남양면과 비봉면 지역, 모수국은 현 수원시 지역, 상외국은 현 화성시 우정면ㆍ장안면 일대의 지역으로 비정한 바 있다. 또한 옛 수원군 안룡면 고색리(古索里, 현 수원시 고색동)에서 발견된 고대시기의 대형 고분(古墳)은 이곳의 전래 지명과 관련되어 이곳이 삼한시대의 석색국(石索國)일 가능성도 유추해볼 수 있게 한다.
삼국시대의 이 고장은 백제ㆍ고구려ㆍ신라의 순으로 고대국가의 영역이 되었으나 백제 영역하의 지명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 「지리지」에 옛 수원군 지명은 고구려 지배하의 매홀(買忽) 또는 매홀군(買忽郡 : 郡이 아닌 城이 맞을 듯하다)이었음이 처음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매홀(買忽)’은 고구려식 지명으로 ‘물골ㆍ수곡(水谷)’의 의미를 갖는 명칭이다. 그 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景德王) 16)에 이르러 수성군(水城郡)으로 개칭, 비로소 군현제(郡縣制)가 처음 실시된 이후의 한자식 지명을 갖게 되었다. 한편 옛 남양군 지역은 고구려 지배기에 당성(唐城) 또는 당성군(唐城郡 : 이 또한 郡이 아닌 城이 맞을 듯하다)이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군현제 시행과 더불어 경덕왕 때 당은군(唐恩郡)으로 개명되었다. 이 당은군은 차성현(車城縣, 고구려 때 상홀현(上忽縣)을 경덕왕 때 차성으로 개명, 뒤의 龍城縣)과 진위현(振威縣, 고구려 때 부산현(釜山縣)을 경덕왕 때 진위로 개명)의 두 영현(領縣)을 거느렸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940년(태조 23) 수성군은 수주(水州)로 승격되었으며, 지방행정구역이 승격된 데에는 김칠(金七)ㆍ최승규(崔承珪) 등 이 고장 호족세력이 2백여 명의 무리를 끌고 귀부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983년(성종 2) 12목이 설치될 때 처음으로 외관이 파견되었고 양주(楊洲)가 목(牧)으로 승격되면서 수주도 그 관할하에 들어갔다. 991년(성종 10) 수주는 한남(漢南)ㆍ수성(隋城) 등 별호로 불려졌고, 995년(성종 14) 지방제도의 대개편 때 관내도(關內道)에 배속되고, 최초의 외관인 도단련사(都團練使)가 파견되었다.
그 뒤 1018년(현종 9) 지방관제의 정비를 통해 지방관이 부임하는 지수주사(知水州事)로 됨과 동시에 안산현(安山縣)ㆍ영신현(永新縣)ㆍ쌍부현(雙阜縣)ㆍ용성현(龍城縣)ㆍ정송현(貞松縣)ㆍ진위현(振威縣)ㆍ양성현(陽城縣) 등 7개의 속현을 거느렸다. 1067년(문종 29) 양주가 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되면서 남경 관할 하에 영군으로 속했으나 다른 주와는 달리 지수주사가 설치되어 계속해서 앞의 7개의 속현을 거느렸다.1018년(현종 9) 경기제(京畿制)가 성립된 후 1069년(문종 23) 경기가 52개 주현으로 크게 확장될 때 양광도에 소속된 수주는 일시 경기에 속했으나 1106년(예종 1)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에 내속되고 1171년(명종 1) 다시 양광주도(楊廣州道)에 속하게 되었다.
대몽항쟁기인 1271년(원종 12)에는 착량(窄梁)을 지키고 있던 몽고군이 대부도(大阜島)에 들어와 주민들을 약탈하자 섬사람들이 격분하여 몽고병을 죽이고 난을 일으켰다. 이 때 부사(副使) 안열(安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난을 평정한 공로로 수주를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승격시켰다. 그 뒤에 또 수주목(水州牧)으로 승격되었으나 1310년(충선왕 2) 전국의 목(牧)이 폐지됨에 따라 수주목은 수원부로 강등되고 양광도(楊廣道)에 내속되었다. 그 후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그 선봉을 보내어 양광도 주ㆍ군에 항복을 권유하자 수원부가 가장 먼저 적군을 맞아들여 항복했다는 이유로 군(郡)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수원군 사람들이 재상 김용(金鏞)에게 뇌물을 주어 다시 부(府)가 되었다.
경기도가 도(道)로서 확립된 것은 고려 말 1390년(공양왕 2)에 이르러서였다. 경기를 좌ㆍ우도로 나누었는데, 이때 양광도에 속해 있던 남양부는 경기좌도에 새로 편입되었고, 수원부는 1309년(충선왕 1) 이래 양광도에 그대로 내속해서 존속되고 있었다. 한편 남양부(군) 지역은 940년(고려 태조 23)에 당성군(唐城郡)으로 변경되어, 1018년(현종 9) 수주의 속군이 되었다가 후에 인주(仁州)의 속군으로 이속되었으며,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1290년(충렬왕 16) 고을 사람 홍다구(洪茶丘)가 정동행성우승(征東行省右丞)이 되었으므로 지익주사(知益州事)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강녕도호부(江寧都護府)ㆍ익주목(益州牧)으로 승격을 거듭하였다. 그 후 1310년(충선왕 2) 전국의 모든 목을 혁파할 때 다시 남양부로 읍호가 강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