家門의 영광

9세 류영경(柳永慶) 명종5(1550)∼광해군원년(1608)

맨발나그네 2011. 12. 13. 19:47

9세 류영경(柳永慶) 명종5(1550)∼광해군원년(1608)


  자는 선여(善餘), 호는 춘호(春湖)이다. 참봉 류의(柳儀)의 아들이다. 선조5(1572)년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급제하여 정언 등을 역임하였고 선조25(1592)년 임진왜란 때는 사간으로서  초유어사(招諭御史)가 되어 많은 의병을 모집하였고 선조26(1593)년에 황해도순찰사가 되어 해주에서 왜적을 맞아 60여급을 베는 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행재소(行在所)에서 호조참의에 오르고 선조27(1594)년에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었으며, 선조30(1597)년 정유재란 때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서 가족을 먼저 란시켰다는 혐의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병조참판에 서용되었다.
당론이 일어날 때에는 류성룡(柳成龍)과 함께 동인에 속하였는데 동인이 다시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이발(李潑)과 함께 북인에 가담하였다. 선조32(1599)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 등이 같은 북인인 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면서 대북·소북으로 갈리자 류희분(柳希奮) 등과 함께 남이공의 당이 되고 영수가 되었다.
  이때 대북파에 밀려 파직되었다가 선조32(1602)년 이조판서에 이어 우의정에 올랐는데 대북파 기자헌(奇自獻)·정인홍(鄭仁弘) 등과 심한 마찰을 빚었고 뒤이어 세자(世子)문제로 더욱 분란을 일으켰다.
  선조37(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에 봉하여 졌으며 좌의정을 거쳐 윤승훈(尹承勳)의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선조39(1606)년 선조 즉위 40주년 행사를 앞당겨 하례(賀禮)하고 증광시(增廣試)까지 실시하여 즉위 때와 같이 경축하게 하는 등 왕의 총애를 굳혔다.
   오랫동안 집권하여 그의 권력이 증대되고 같은 소북파인 남이공과 불화로 탁소북(濁小北)으로 분파하였으며 선조 말년에 왕의 뜻을 따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자로 옹립하려 하였는데 선조41(1608)년에 선조가 붕어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 등 대북파의 탄핵을 받고 경흥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유생의 명단인 청금록(靑衿錄)에서 공의 이름이 삭제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모든 관작이 복권되었다.
[조선왕조실록] [국조방목] [국사대사전] [두산세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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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 춘호상공(영경)에 관한 조선왕조실록 발췌분을 첨부파일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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