家門의 영광

각종 문헌과 전주 류씨

맨발나그네 2009. 12. 23. 15:46

고려사 / 증보문헌비고 / 야후백과사전 / 디지털 한국학

1. 고려사
  가) 류방헌(柳邦憲)
      고려사 제4권 - 세가 제4  현종1년
  3월에 류윤부(柳允孚)를 문하시중으로, 류방헌(柳邦憲)을 문하시랑 평장사로, 강조를 이부상서 참지정사로, 진적을 형부상서 참지정사로, 유진(劉瑨)과 왕동영(王同潁)을 상서좌 우복야로, 최항(崔沆)과 김심언(金審言)을 좌 우산기상시로 채충순을 이부시랑 좌간의대부로, 김려(金勵)를 병부상서로, 문인위(文仁渭)를 공부상서로 각각 임명하였다.    --- 중략 ---   신사일에 왕이 구정(毬庭)에 나가서 80세 이상 남녀와 중한 환자 6백 35명을 모아 놓고 음식, 옷감, 다과, 약품 들을 차등 있게 주었다. 한림학사 최항을 사부(師傅)로 임명하였다. 8월 갑오일에 문하시랑평장사 류방헌(柳邦憲)이 죽었다. 10월 임오일에 위수여(韋壽餘)를 문하시랑평장사로, 진적을 내사시랑평장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고려사 제73권 - 지 제27 /선거 1  시험관
   성종(成宗) 16년 8월에 예부(禮部) 시랑(侍郞) 류방헌(柳邦憲)이 지공거로 되어 진사를 뽑았다. 목종(穆宗) 원년(998) 정월에 류방헌이 천거한 갑과 주인걸(周仁傑) 등 2명, 을과 3명, 명경과 7명, 명법과 5명, 명서(明書)과 3명, 명산(明算)과 4명, 삼례(三禮)과 10명, 3전(三傳)과 2명에게 급제를 시켰다.
  3월에 좌사낭중(左司郞中) 최성무(崔成務)가 지공거로 되어 진사를 뽑았는데 갑과 강주재(姜周載) 등 7명, 을과 25명, 동진사과 18명, 은사(恩賜)과 1명, 명경과 20명, 명법과 23명, 명서과 5명, 명산과 11명에게 급제를 시켰다.
  3년에 류방헌이 진사를 뽑았는데 갑과 송굉 등 8명, 을과 7명, 명경과 8명에게 급제를 시켰다.
  숙종(肅宗) 5년 4월에 동지추밀원사 이오가 지공거로 되고 지주사(知奏事) 류신(柳伸)이 동지 공거로 되어 진사를 뽑았는데 복시를 실시하고 조서를 내리어 을과 한숙단(韓淑旦) 등 3명, 병과 11명, 동진사과 2명, 명경과 3명, 은사과 6명에게 급제를 시켰다.

      고려사 제93권 - 열전 제6
柳邦憲.
柳邦憲全州承化縣人登第事成宗爲禮部侍郞穆宗朝授翰林學士右諫議大夫十二年拜門下侍郞平章事卒輟朝三日謚貞簡性仁恕雖在倉卒未嘗疾言遽色不事産業在諫官或責以久不言徐對云訐以爲直非吾所取.
류방헌
  류방헌은 전주 승화현 사람(全州承化縣人)이니 과거에 급제하고 성종을 섬겼으며 예부시랑으로 임명되었다. 목종 때에 이르러 한림학사, 우간의 대부(右諫議大夫)로 임명되었고 12년에 문하시랑평장사로 임명되었다가 죽었는데 조회를 3일간 정지하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라 하였다.
   그는 성격이 어질고 이해심이 너그러우며 아무리 급박한 때라도 당황하는 기색을 보인 일이 없었다. 살림 꾸리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간관으로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오랫동안 아무 말도 아니 한다고 책망하니 그는 천천히 대답하기를 ?다른 사람들의 숨은 과오를 적발하는 것을 정직한 행위로 자인하는 것은 나의 취할 바가 아니요?라고 하였다.

      증보문헌비고 제240권 - 직관고 27 /시호 2 /역대 명신 시호 1
정간(貞簡) 고려 문하시랑 류방헌(柳邦憲), 사도 김원충(金元沖), 평장사 채충순(蔡忠順), 사공 류인저(柳仁著), 정당문학 정문(鄭文), 평장사 이혁유(李奕?), 상락후(上洛候) 김영후(金永煦), 포산백(苞山伯) 곽기정(郭基正).


  나) 류광식(柳光植)
      고려사 제22권 - 세가 제22 /고종1
고종 신사 8년(1221)
  6월 을묘일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하늘에 뻗쳤다. 신사일에 추밀원사 이경(李儆)이 죽었다. 가을 7월 갑진일에 선경전(宣慶殿)에 소재(消災) 도량을 베풀었다. 8월 갑인일에 평장사 류광식(柳光植)이 죽었다.

      고려사 제101권 - 열전 제14
  류광식은 전주 사람(全州人)이다. 풍채가 우람하고 점잖으며 성질이 청렴 검박하고 욕심을 절제하고 행동이 심중하며 말이 적었다. 문음(門蔭)으로 양온서령 동정으로 임명되었다가 영암(靈岩) 원으로 나갔었는데 정사를 청백하고 엄정하게 하였으므로 아전은 무서워하고 백성들은 경애하였다.
   여러 차례 승직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로 되었는데 그는 중앙과 지방의 관직에 역임하면서 모두 성적을 올렸다. 고종(高宗) 8년에 문하시랑 동 중서문하 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치사하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장수(壽)와 부귀의 두 가지를 다 구비한 사람이라고 일렀다.
   그가 죽으니 왕이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대숙(戴肅)이란 시호를 주었다. 아들은 류유와 류소(柳韶)이다. 류소는 성품이 거세고 좀처럼 남을 칭찬하지 않았으며 살림살이엔 힘쓰지 않았다.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류능(柳能)은 보문각 시제(寶文閣侍制)로 있었는데 최의에게 아부하여 권력을 남용하다가 사람들의 원망을 샀다.
   그러다가 김준(金俊)이 최의를 죽일 때에 류능도 또한 죽음을 당하였으며 류소는 근심과 분한으로 병이 되어 죽었고 시호는 장정(莊定)이라고 주었다. 사람들이 그를 조소하여 말하기를 ?살아서 잘 가르치지 못하였으니 죽은들 무슨 이익이 있으랴??고 비웃었다.

  다. 류신(柳伸)
고려사 제95권 - 열전 제8
  류신의 처음 이름은 인(仁)이다. 그는 풍채가 보통 사람을 넘지 못하였으나 담대한 사람이었다. 소년 시절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청백하고 근신한 것으로 명망이 있었다. 기거사인으로부터 청주(淸州) 원으로 임명되었는데 고을의 주민들이 어려워하고 존경하였다.
   그때 나라에서 국도를 남경(현재의 서울)으로 이전하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재상과 하부 관리들이 모두 이전하자는 데 찬성하였으나 류신과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 유록숭(庾祿崇)만은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국가의 모든 일을 논의할 때마다 언제나 충의(忠義)에 입각하여 주장하므로 당시 조정의 여론이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5대의 왕조에서 벼슬이 상서 우복야 정당문학을 지냈다. 죽은 뒤에 충신(忠愼)이란 시호를 주었다.


2. 야후백과사전
류방헌 柳邦憲 [ ? ~ 1009]
본관 전주(全州). 시호 정간(貞簡). 문과에 급제하고 성종 때 예부시랑, 목종 때 한림학사 우간의대부(翰林學士右諫議大夫)를 지냈다. 1009년(목종 12)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러 죽었다.

류광식 柳光植 [ ? ~ 1221]
본관 전주(全州). 시호 대숙(戴肅). 국자감시(國子監試)에 급제한 뒤 음보(蔭補)로 양온서영동정(良磊署令同正)이 되었다. 그 뒤 영암(靈巖)의 수령을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내고, 1221년(고종 8)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정치에 청렴하고 엄정하였으므로 관민이 모두 존경하였다.

류신(柳伸) [ ? ~1104]
  고려 중기의 문신․서예가. 초명 인(仁). 시호 충신(忠愼). 어려서 문과에 급제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을 거친 뒤, 청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087년(선종 4) 예빈소경(禮賓少卿)으로 고주사(告奏使)가 되어 요(遼)나라를 다녀왔고, 1093년 공부시랑으로 사은부사가 되어 송나라에 갔다가 《책부원구(冊府元龜)》를 얻어가지고 귀국하였다.
  1101년(숙종 6) 예부상서, 이듬해 이부상서 ․서북면 병마사를 역임하고, 1103년 상서우복야 ․정당문학에 승진했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의하면 왕자경(王子敬)의 행초체(行草體)를 잘 써서 신라의 김생(金生), 고려의 탄연(坦然) ․최우(崔瑀)에 이어 넷째가는 명필로 꼽혔다.


3. 디지털 한국학 역대인물
류방헌(柳邦憲) [944(혜종 1)~1009(현종 즉위년)]
  고려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민칙(民則). 아버지는 대감 윤겸(允謙)이며, 어머니는 담양군인(潭陽郡人) 이씨(李氏)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닦아 오경(五經)과 소의(疏義)를 정독하였으며, 향공진사(鄕貢進士)를 거쳐 972년(광종 23) 예부시(禮部試)에 급제한 뒤 공문박사(功文博士)․광문교서랑(光文校書郎)․광문랑(光文郎)․국자주부(國子主簿)․사문박사(四門博士)를 역임하였다.
  성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시무책이 채택되어 어사우사 원외랑(御事右司員外郎)이 되고, 이어 사관수찬관 기거사인 지제고 예부낭중(史館修撰官起居舍人知制誥禮部郎中)이 되었다.
  995년(성종 14) 중추직학사(中樞直學士)․국자사업(國子司業)․예부시랑이 되었으며, 997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를 뽑았다. 목종초에는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서 왕이 사냥을 즐겨하는 것을 간하여 중지하게 하였다.
998년(목종 1) 예부시랑으로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고, 1000년에도 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뽑았다.
  비서감 중추사(#비58書監中樞使)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1003년에는 헌화대왕릉신도비문(獻和大王陵神道碑文)을 지어 판한림원사 좌산기상시 참지정사 감수국사 상주국 정의대부 하동현개국후 식읍삼백호(判翰林院事左散騎常侍參知政事監修國史上柱國正議大夫河東縣開國侯食邑三百戶)에 봉하여졌다.
  1006년 내사시랑평장사 금자흥록대부(內史侍郎平章事金紫興祿大夫), 1009년(현종 즉위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가 되었다. 시중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참고문헌 : 高麗史, 高麗史節要, 朝鮮金石總覽 上―柳邦憲墓誌―(朝鮮總督府). 〈羅恪淳〉

류능(柳能) [?~1258(고종 45)]
  고려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로 치사한 광식(光植)의 손자이며, 평장사(平章事) 소(韶)의 아들이다.
  1257년(고종 44) 최항(崔沆)이 죽기 전에 선인렬(宣仁烈)과 함께 불러 최의(崔의)를 잘 보살펴줄 것을 부탁하였다. 다음해 정월에 송길유(宋吉儒)가 탐학하여 남의 토전(土田)과 재물을 마음대로 횡령하므로 안찰사 송언상(宋彦庠)이 도병마사에게 탄핵하니 그 당인 김준(金俊) 등이 보문각대제인 그에게 청하기를 탄핵한 글을 품신하지 말라 하므로 이를 받아들였다가 뒤에 최의가 알고 노하여 꾸짖으니 엎드려 대죄하였다. 보문각대제로 최의를 아첨으로 섬겨 권세를 천단하다가 1258년 6월 김준이 최의를 주살할 때 함께 참살되었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李相瑄〉

류신(柳伸) [?-1104(?-숙종9)]
  고려의 명신.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인(仁). 체구는 작았으나 담략이 있었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였고, 청렴과 근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일찍이, 기거사인(起居舍人)을 거쳐 청주목사가 되었는데 정치를 잘하였다.
  1087년(선종 4) 예빈소경(禮賓少卿)으로 고주사(告奏使)가 되어 요나라에 다녀왔고, 1093년에는 공부시랑으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송나라로 가서 《책부원구 冊府元龜》를 가져왔다.
  이어 급사중지주사(給事中知奏事)를 거쳐 1101년(숙종 6) 예부상서 동지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禮部尙書同知樞密院使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고, 1103년에는 좌복야 정당문학(左僕射政堂文學)에 올랐다. 문종에서 숙종까지 5대를 섬기면서 충의로 일관하였다.
  한때 조정에서 남경(南京)으로의 천도운동이 거론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서예에 뛰어나 김생(金生)․최우(崔瑀)․탄연(坦然) 등과 함께 신품사현(神品四賢)으로 일컬어지며, 특히 행서와 초서를 잘 썼다.
  전라남도 승주군 송광사(松廣寺)의 불일보조국사탑비(佛日普昭國師塔碑)를 썼다. 상서우복야 정당문학으로 죽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신(忠愼)이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槿域書畵徵. 〈朴龍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