家門의 영광

시조 완산백(류습) 사실

맨발나그네 2009. 12. 23. 15:47

시조 완산백(류습) 사실

1. 완산백 이상 양세구적
始祖考之祖考高麗國諸道都副丞諱邦直觀察使恒撰全陽君墓碣以諱邦直爲始祖考祖考
시조고지조고고려국제도도부승휘방직관찰사항찬전양군묘갈이휘방직위시조고조고
始祖考之考高麗國國子生員諱橒觀察使永詢撰直提學公墓碣以諱橒爲祖考
시조고지고고려국국자생원휘운관찰사영순찬직제학공묘갈이휘운위조고
시조의 할아버지는 고려의 제도도부승인 방직이다. 관찰사 류항이 지은 전양군 묘갈에 방직은 시조의 할아버지라고 하였다. 시조의 아버지는 고려 성균관의 생원인 운(橒)이다. 관찰사 류영순이 지은 직제학공 묘갈에 운(橒)은 시조의 아버지라고 하였다.
全平譜序曰柳邦直諸都道副丞子橒高麗生員以上係高麗大丞車達之後也奕世冠冕爲
전평보서왈류방직제도도부승자운고려생원이상계고려대승차달지후야혁세관면위
國大姓而不幸失傳未能繼代至諱濕移居全州因貫其邑子孫以爲始祖且按直提公墓碣
국대성이불행실전미능계대지휘습이거전주인관기읍자손이위시조차안직제공묘갈
則以諱橒爲始祖考故右二代別書於譜牒之首以備後日叅考云
즉이휘운위시조고고우이대별서어보첩지수이비후일참고운
전평군(류심)의 임진보(1652년) 서문에 이르기를 “류방직은 고려의 제도도부승이며, 아들 운은 고려의 생원이니 이 이상은 모두 고려의 대승공 차달의 후예로 이어진다. 여러 대에 벼슬을 하여 나라의 큰 성씨가 되었으나 불행이도 실전하여 능히 계대를 잇지 못하고 습에 이르러 전주로 옮겨살아 자손이 그 읍호는 관으로 하고 습을 시조로 삼았다. 또 직제학공 묘갈문에는 운을 시조의 아버지로 삼고있기 때문에 오른 편의 2대를 별도로 보첩의 머리에 기록하여 이후의 참고에 대비한다”고 하였다.
○且按安東柳宗禮家藏柳貫子邦祐邦祐子樞晋州譜邦祐弟邦輔邦直邦直子橒云而邦
  차안안동류종례가장류관자방우방우자추진주보방우제방보방직방직자운운이방
直乃麗朝人寬卽我世宗朝議政文化譜元無邦祐兩家譜若是相左可疑近見人家萬姓譜
직내여조인관즉아세종조의정문화보원무방우양가보약시상좌가의근견인가만성보
以侍中柳光佐爲全州柳之始祖未知何所據也尤不能無疑今姑幷錄以備日後叅考云○
이시중류광좌위전주류지시조미지하소거야우불능무의금고병록이비일후참고운○
穆之氏所撰
목지씨소찬
안동의 류종례 가보에 류관(柳貫)의 아들은 방우이며, 방우의 아들은 추(樞)라 하였고 진주보에는 방우의 동생이 방보, 방직이고 방직의 아들은 운이라 하였는데 방우는 고려 때의 사람이고 관은 세종 때의 의정이며, 문화보에는 원래 방우가 없다. 양가의 보첩이 이와 같이 서로 다르니 증거가 가히 의심스럽고 근자에 어디서 만성보를 보니 시중 류광좌를 전주류씨 시조로 하였으니 어디에 근거하였는지 몰라서 더욱 의심스러워 이제 다같이 기록하여 앞으로의 참고에 대비한다고 하였다. [목지씨 기록]
始祖高麗國 贈奉正大夫司憲府掌令完山伯諱濕○公遺墟在全羅道全州府
시조고려국 증봉정대부사헌부장령완산백휘습○공유허재전라도전주부
北門外東北平田 誼氏追遠編 公嘗居全州之北門外所稱全州之柳也子孫皆之
북문외동북평전 의씨추원편 공상거전주지북문외소칭전주지류야자손개지
顯官仍籍焉 上仝
현관잉적언 상동
시조는 고려국 증봉정대부 사헌부장령이며, 완산백인 습이다. 공이 살던 곳은 전라도 전주부 북문 밖 동북쪽 평지에 있는 밭이다. [의씨추원편 참조] 공(시조)은 일찍이 전주의 북문 밖에 살아 세상에서 전주류씨라 칭한다. 자손이 모두 연이어 높은 벼슬에 올랐다. [의씨추원편 참조]
全州府治南五里許坤山東一壑卽我始祖所居之遺址也郊於大府而洞壑之
전주부치남오리허곤산동일학즉아시조소거지유지야교어대부이동학지
幽勝泉石之淸麗瀟然灑然令人有出塵之想卽所謂城市山林者也我鼻祖來
유승천석지청려소연쇄연영인유출진지상즉소위성시산림자야아비조래
宇於此擧五子登科於此云柳氏宗契通文○上二說言遺址南北相左未知孰是
우어차거오자등과어차운류씨종계통문○상이설언유지남북상좌미지숙시
전주부의 남쪽 5리쯤의 곤산 동쪽에 있는 골짜기가 곧 우리 시조인 장령공이 살던 옛터이다. 대부의 근교이며, 마을 골짜기의 그윽하고 뛰어남과 천석의 맑고 고움이 소조하고 쇄연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출진함과 같은 생각이 있게 되니 이른바 성시의 산림자이다. 우리 비조께서 이곳에 집을 지어 다섯 아들이 여기서 등과를 하였다.[류씨종계의 통문 참조] ○위의 두가지 설이 옛터를 말하고 있으나 남북이 서로 다르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른다.

2. 완산백(류습) 사실(事實)
玄孫遺逸齋坋碑誌曰曾祖諱克修古阜郡守 贈禮曹參判卽完山伯濕之第三子云 ○恕氏
현손유일재분비지왈증조휘극수고부군수 증예조참판즉완산백습지제삼자운 ○서씨
家寶 柳氏系出全州自麗祖簪組相繼曰諱邦直爲諸道都副丞至諱濕入我朝 贈掌令 ○
가보 류씨계출전주자려조잠조상계왈휘방직위제도도부승지휘습입아조 증장령 ○
全陽君墓碣 高麗末有爲濕積慶于家五子一婿俱登文科榮耀一世 ○春湖撰全陵君墓碣
전양군묘갈 고려말유위습적경우가오자일서구등문과영요일세 ○춘호찬전능군묘갈
현손 유일재 류분의 비석문에 이르기를 증조의 이름은 극수이다. 고부군수로서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는데 바로 완산백 습의 셋째 아들이다.[서씨가보 참조] 류씨는 전주에서 이어나왔으니 고려 때부터 벼슬이 서로 이어나 방직은 제도도부승이 되었고 습에 이르러 조선에 들어와 장령에 추증되었다.[전양군 묘갈 참조] 고려말에 습은 집에서 경사를 쌓아 다섯 아들과 한 사위가 함께 문과에 올라 영화가 일세에 빛났다.[춘호공이 지은 전능군 묘갈 참조]
公五子一婿大司成公崇祖撰其先大夫碑參判公永詢撰直提學公墓碣皆以文科書之以
공오자일서대사성공숭조찬기선대부비참판공영순찬직제학공묘갈개이문과서지이
高山縣監公於其公墓碣曰三子文科二子司馬前後記述若是相左而文科司馬俱是麗祖
고산현감공어기공묘갈왈삼자문과이자사마전후기술약시상좌이문과사마구시려조
甲科今無可考 ○誼氏追遠錄編
갑과금무가고 ○의씨추원록편
공의 다섯 아들과 한 사위는 대사성공 숭조가 지은 그 선대인(아버지)의 비문과 참판공 영순이 지은 직제학공 묘갈문에 모두 문과로 쓰고 고산현감공(류곡)이 공의 묘갈에 이르기를 세 아들을 문과요 두 아들은 사마(진사, 생원)라 하였으니 전후의 기슬한 것이 서로 다르고 문과와 사마가 모두 고려 때의 과거라서 지금 가히 고증할 수가 없다. [의씨추원록 참조]
謹按直提學公墓碣以諱橒爲掌令公考位則系出文化似無疑而不幸失傳未能繼代至掌
근안직제학공묘갈이휘운위장령공고위즉계출문화사무의이불행실전미능계대지장
令公始移貫全州以公爲始祖者意以是耶遺逸齊公碑誌有曰曾祖諱克修古阜郡守贈禮
령공시이관전주이공위시조자의이시야유일제공비지유왈증조휘극수고부군수증예
曹參判卽完山伯濕之第三子云完山伯之封未知何故而夫人因子貴封三韓國大夫人則
조참판즉완산백습지제삼자운완산백지봉미지하고이부인인자귀봉삼한국대부인즉
掌令公亦或同時封完山伯耶然贈掌令乏典亦因三子登科則完山伯之稱尤不能無疑今
장령공역혹동시봉완산백야연증장령핍전역인삼자등과즉완산백지칭우불능무의금
姑載錄以備攷證 ○焯氏傳家金石
고재록이비고증 ○작씨전가금석
  삼가 살펴보건대 직제학공 묘갈에 운을 장령공의 아버지라 한 것은 문화에서 이어나왔음이 황공하게도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불행하게도 실전되어 능히 계대를 못하고 장령공에 와서 처음으로 전주로 이관하였기에 공을 비조로 하는 의미가 이것이다. 유일제공(류분)의 비문에 이르기를 증조는 극수이며, 고부군수로서 예조참판에 추증되었으니 바로 완산백 습의 셋째 아들이라 일렀다.
  완산백에 봉한 것이 무엇 때문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부인이 아들의 귀로 인하여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으니 장령공 또한 같은 때에 완산백에 봉해진 것인가? 장령에 추증된 은전도 또한 세 아들의 등과에 기인된 것이니 완산백으로 칭함이 더욱 의심이 없지 않다. 이제 여기에 등제기록을 하여 고증에 대비하노라. [작씨전가금석 참조]
始祖諱字子孫謬以習字相傳禮安縣虎巖洞直提學公碑文晋州府梧坊洞晋
시조휘자자손류이습자상전예안현호암동직제학공비문진주부오방동진
州河氏墓碣榮川郡鍾陵永興公墓碣三處碑文亦以習字書而考諸始祖墓碣
주하씨묘갈영천군종능영흥공묘갈삼처비문역이습자서이고제시조묘갈
則乃濕字故今從之 全平君壬辰譜云云
즉내습자고금종지 전평군임진보운운
시조의 성함자를 자손들이 그릇되게 습(習)자로 서로 전했다. 예안(안동)의 범바위에 있는 직제학공(류극서)의 비문에도 습(習)자를 썻으나 시조의 모든 묘갈을 상고해볼 때 습(濕)자이기 때문에 지금에 따른다. [전평군 임진보 참조]
完山伯墓前碑高山縣監公轂萬曆五年潤八月撰立虎巖直提學公墓碣文萬曆三十四年
완산백묘전비고산현감공곡만력오년윤팔월찬립호암직제학공묘갈문만력삼십사년
丙午觀察使永詢撰梧坊洞河氏墓碣萬曆四十四年二月郡守李成吉撰鍾陵永興公碑文
병오관찰사영순찬오방동하씨묘갈만력사십사년이월군수이성길찬종능영흥공비문
萬曆三十四年丙午觀察使永詢撰
만력삼십사년병오관찰사영순찬
완산백 묘앞의 비석은 고산현감공 곡이 선조10년(1577년) 윤8월에 글을 지어 세웠고 안동의 범바위에 있는 직제학공(류극서) 묘갈문은 선조39년(1606년)에 관찰사 영순이 글을 지었다. 진주 오방동에 있는 하씨의 묘갈은 광해군8년(1616년) 2월에 군수 이성길이 지었고, 영주의 종릉에 있는 영흥공(류빈) 비문은 선조39년(1606년)에 관찰사 영순이 글을 지었다.
嗚呼三處碑文觀察使公永詢所立則公完山伯六代孫也不啻世世直閣子孫則文獻之高
오호삼처비문관찰사공영순소립즉공완산백육대손야불시세세직각자손즉문헌지고
明不言可想至於六代諱字誤傳可勝歎哉高山公亦公之一時人則諱濕與習字必有典折
명불언가상지어육대휘자오전가승탄재고산공역공지일시인즉휘습여습자필유전절
然未可强解也
연미가강해야

3) 始祖妣 三韓國大夫人 全州崔氏 事實
   시조비 삼한국대부인 전주최씨 사실
因子貴封三韓國大夫人 [舊譜] 全州崔氏譜 一世崔純爵 高麗神虎衛上將軍 子崇
인자귀봉삼한국대부인 [구보] 전주최씨보 일세최순작 고려신호위상장군 자숭
左右衛中郞將 子南敷 通議大夫左右衛大將軍知工部事 子佺 左右衛保勝郞將 子正
좌우위중랑장 자남부 통의대부좌우위대장군지공부사 자전 좌우위보승랑장 자정
臣 左右衛中郞
신 좌우위중랑
아들의 귀(貴)로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다(구족보 참조). 전주최씨의 세보(世譜)에 일세(一世) 최순작(崔純爵)은 고려 신호위 상장군이며 아들 숭은 좌우위 중랑장 이요 아들 남부는 통의대부 좌우위 대장군지공부사이며 아들 전은 좌우위 보승랑장이고 아들 정신은 좌우위 중랑이다

始祖以下五世 墓在全州北面松岡洞口越邊 而外婿不錄 今無可據文籍 或云全州之
시조이하오세 묘재전주북면송강동구월변 이외서불록 금무가거문적 혹운전주지
崔氏 得姓三人 其譜疎略皆不可改 [誼氏追遠編]
최씨 득성삼인 기보소략개불가개 [의씨추원편]
시조 이하 5세의 묘는 전주 북면 송강동구 건너편에 같이 있으나 사위의 기록은 없으니 지금은 가히 증거할 문적이 없으며 혹 말하기를 전주최씨는 세 사람이 득성 했다고 하는데 그 보첩이 빈약하여 모두 고증 할 수가 없다 [의씨 추원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