家門의 영광

토성전주류씨 관련자료

맨발나그네 2009. 12. 23. 15:52

토성전주류씨 관련자료

    1) 문화류씨 가정보(1565년)

        전주류씨가 분파되었다는 문화류씨 10세 양재(良梓)는 자손이 없다.
 
    2) 고려사

      가) 류방헌(柳邦憲)
         고려사 제4권 - 세가 제4  현종1년
          3월에 류윤부(柳允孚)를 문하시중으로, 류방헌(柳邦憲)을 문하시랑 평장사로, 강조를 이부상서 참지정사로, 진적을 형부상서 참지정사로, 유진(劉瑨)과 왕동영(王同潁)을 상서좌 우복야로, 최항(崔沆)과 김심언(金審言)을 좌 우산기상시로 채충순을 이부시랑 좌간의대부로, 김려(金勵)를 병부상서로, 문인위(文仁渭)를 공부상서로 각각 임명하였다.   --- 중략 ---
  신사일에 왕이 구정(毬庭)에 나가서 80세 이상 남녀와 중한 환자 6백 35명을 모아 놓고 음식, 옷감, 다과, 약품 들을 차등 있게 주었다. 한림학사 최항을 사부(師傅)로 임명하였다. 8월 갑오일에 문하시랑평장사 류방헌(柳邦憲)이 죽었다. 10월 임오일에 위수여(韋壽餘)를 문하시랑평장사로, 진적을 내사시랑평장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고려사 제73권 - 지 제27 /선거 1  시험관
   성종(成宗) 16년 8월에 예부(禮部) 시랑(侍郞) 류방헌(柳邦憲)이 지공거로 되어 진사를 뽑았다. 목종(穆宗) 원년(998) 정월에 류방헌이 천거한 갑과 주인걸(周仁傑) 등 2명, 을과 3명, 명경과 7명, 명법과 5명, 명서(明書)과 3명, 명산(明算)과 4명, 삼례(三禮)과 10명, 3전(三傳)과 2명에게 급제를 시켰다.
  3월에 좌사낭중(左司郞中) 최성무(崔成務)가 지공거로 되어 진사를 뽑았는데 갑과 강주재(姜周載) 등 7명, 을과 25명, 동진사과 18명, 은사(恩賜)과 1명, 명경과 20명, 명법과 23명, 명서과 5명, 명산과 11명에게 급제를 시켰다.
  3년에 류방헌이 진사를 뽑았는데 갑과 송굉 등 8명, 을과 7명, 명경과 8명에게 급제를 시켰다.
  숙종(肅宗) 5년 4월에 동지추밀원사 이오가 지공거로 되고 지주사(知奏事) 류신(柳伸)이 동지 공거로 되어 진사를 뽑았는데 복시를 실시하고 조서를 내리어 을과 한숙단(韓淑旦) 등 3명, 병과 11명, 동진사과 2명, 명경과 3명, 은사과 6명에게 급제를 시켰다.
      고려사 제93권 - 열전 제6
柳邦憲全州承化縣人登第事成宗爲禮部侍郞穆宗朝授翰林學士右諫議大夫十二年拜門下侍郞平
류방헌전주승화현인등제사성종위례부시랑목종조수한림학사우간의대부십이년배문하시랑평
章事卒輟朝三日謚貞簡性仁恕雖在倉卒未嘗疾言遽色不事産業在諫官或責以久不言徐對云訐以
장사졸철조삼일익정간성인서수재창졸미상질언거색불사산업재간관혹책이구불언서대운알이
爲直非吾所取.
위직비오소취
   류방헌은 전주 승화현 사람(全州承化縣人)이니 과거에 급제하고 성종을 섬겼으며 예부시랑으로 임명되었다. 목종 때에 이르러 한림학사, 우간의 대부(右諫議大夫)로 임명되었고 12년에 문하시랑평장사로 임명되었다가 죽었는데 조회를 3일간 정지하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라 하였다.
   그는 성격이 어질고 이해심이 너그러우며 아무리 급박한 때라도 당황하는 기색을 보인 일이 없었다. 살림 꾸리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간관으로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오랫동안 아무 말도 아니 한다고 책망하니 그는 천천히 대답하기를 ?다른 사람들의 숨은 과오를 적발하는 것을 정직한 행위로 자인하는 것은 나의 취할 바가 아니요?라고 하였다.

      나) 류광식(柳光植)
         고려사 제22권 - 세가 제22 /고종1
         고종 신사 8년(1221) 6월 을묘일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하늘에 뻗쳤다. 신사일에 추밀원사 이경(李儆)이 죽었다. 가을 7월 갑진일에 선경전(宣慶殿)에 소재(消災) 도량을 베풀었다. 8월 갑인일에 평장사 류광식(柳光植)이 죽었다.
         고려사 제101권 - 열전 제14
         류광식은 전주 사람(全州人)이다. 풍채가 우람하고 점잖으며 성질이 청렴 검박하고 욕심을 절제하고 행동이 심중하며 말이 적었다. 문음(門蔭)으로 양온서령 동정으로 임명되었다가 영암(靈岩) 원으로 나갔었는데 정사를 청백하고 엄정하게 하였으므로 아전은 무서워하고 백성들은 경애하였다.
   여러 차례 승직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로 되었는데 그는 중앙과 지방의 관직에 역임하면서 모두 성적을 올렸다. 고종(高宗) 8년에 문하시랑 동 중서문하 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치사하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장수(壽)와 부귀의 두 가지를 다 구비한 사람이라고 일렀다.
   그가 죽으니 왕이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대숙(戴肅)이란 시호를 주었다. 아들은 류유와 류소(柳韶)이다. 류소는 성품이 거세고 좀처럼 남을 칭찬하지 않았으며 살림살이엔 힘쓰지 않았다.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류능(柳能)은 보문각 시제(寶文閣侍制)로 있었는데 최의에게 아부하여 권력을 남용하다가 사람들의 원망을 샀다.
   그러다가 김준(金俊)이 최의를 죽일 때에 류능도 또한 죽음을 당하였으며 류소는 근심과 분한으로 병이 되어 죽었고 시호는 장정(莊定)이라고 주었다. 사람들이 그를 조소하여 말하기를 ?살아서 잘 가르치지 못하였으니 죽은들 무슨 이익이 있으랴??고 비웃었다.

      다) 류신(柳伸)
          고려사 제95권 - 열전 제8
          류신의 처음 이름은 인(仁)이다. 그는 풍채가 보통 사람을 넘지 못하였으나 담대한 사람이었다. 소년 시절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청백하고 근신한 것으로 명망이 있었다. 기거사인으로부터 청주(淸州) 원으로 임명되었는데 고을의 주민들이 어려워하고 존경하였다.
   그때 나라에서 국도를 남경(현재의 서울)으로 이전하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재상과 하부 관리들이 모두 이전하자는 데 찬성하였으나 류신과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 유록숭(庾祿崇)만은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국가의 모든 일을 논의할 때마다 언제나 충의(忠義)에 입각하여 주장하므로 당시 조정의 여론이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5대의 왕조에서 벼슬이 상서 우복야 정당문학을 지냈다. 죽은 뒤에 충신(忠愼)이란 시호를 주었다.

    3) 병자보서 (1876년 전주류씨 병자보 서문)
       我先祖全平君壬辰譜 吾門譜牒之始也 首書柳邦直高麗諸道都副丞 子橒高麗生員
       아선조전평군임진보 오문보첩지시야 수서류방직고려제도도부승 자운고려생원
書其下曰 此以上皆系出文化 高麗大丞車達之後也
서기하왈 차이상개계출문화 고려대승차달지후야
  나의 선조 전평군(全平君, 柳淰)의 임진년(1652년)족보가 우리 문중의 최초  족보이다. 머리에 “류방직(柳邦直)은 고려제도도부승이고 그 아들 운(橒)은 고려생원이다.”라 기록하고 그 아래에 이르기를 “이 이상은 모두 문화에서 이어 나왔으니 고려 대승공 류차달(柳車達)의 후손이다”라 하고
奕世冠冕爲國大姓不幸失傳不能繼代至諱濕移居全州因貫其邑子孫以爲始祖譜旣成
혁세관면위국대성불행실전불능계대지휘습이거전주인관기읍자손이위시조보기성
宗中諸博洽掌故者通考文化晋州譜及姓苑雜出之書則自文化分貫之說謬誤不可徵信
종중제박흡장고자통고문화진주보급성원잡출지서즉자문화분관지설류오불가미신
  “대대로 벼슬이 이어져 나라의 큰 성씨가 되었으나 불행히도 전해지지 않아 대를 잇기가 불가능하고 류습(柳濕)에 이르러 전주로 옮겨 살아 그 읍호를 본관으로 삼고 자손들이 습을 시조로 삼았다”는 족보가 이미 이루어져 있으나 종중에서 박식(博識)하고 고사(故事)에 밝은 분들이 문화와 진주류씨 족보 및 다른 성시 족보에 여러 가지로 나오는 문헌을 살펴보니 문화류씨로부터 분관되었다는 설은 잘못되어 가히 믿을 수가 없다.
盖其說出於嶺南藏晋州譜以訛襲訛轉轉相誣壬辰譜成嶺嶺營校正之人多是嶺南宗人
개기설출어영남장진주보이와습와전전상무임진보성영영영교정지인다시영남종인
故北譜首之書也
고북보수지서야
  그 말은 영남지방에서 나온 곳으로 추측되는데 간직해 온 진주류씨 족보의 잘못된 것이 다시 거듭되고 변하고 변하여 서로 꾸몄으며, 임진보도 경상도 감영(監營)에서 이루어졌으니 교정하는 사람이 영남의 일가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이 족보의 머리에 쓴 것이다.
僉正公錫昌與府使冕府使曼乃爲文以誘各派而辨之甚力故曁後第二譜第三譜遂闕譜
첨정공석창여부사면부사만내위문이유각파이변지심력고기후제이보제삼보수궐보
首之書也然則我柳不必曰本源於文化也不必曰伯仲於晋州也而首足全州之柳也
수지서야연즉아류불필왈본원어문화야불필왈백중어진주야이수족전주지류야
  첨정 류석창(柳錫昌)이 부사 류면(柳冕) 및 부사 류만(柳曼)과 함께 글로서 각파(各派)를 깨우치고 밝히는데 온 힘을 썼기 때문에 그 후의 제2보(병오보)와 제3보(재병오보)에는 마침내 족보 앞머리의 글을 뺀 것이다. 이렇게 되니 우리 전주류씨는 반드시 문화가 본원이라 할 수 없고 진주류씨와 형제라고도 할 수 없으니 몸체는 바로 전주류씨인 것이다.
全州之柳顯於麗代者亦多焉有若平章事貞簡公柳邦憲平章事載肅公柳光植平章事莊
전주지류현어려대자역다언유약평장사정간공류방헌평장사재숙공류광식평장사장
定公柳韶俱載史傳及輿地勝覽今其子孫無傳焉
정공류소구재사전급여지승람금기자손무전언
  전주류씨 중에서 고려 때에 현달(顯達)한 분이 역시 많았는데 평장사 정간공 류방헌(柳邦憲), 평장사 대숙공 류광식(柳光植), 평장사 장정공 류소(柳韶)와 같은 분은 모두 고려사열전과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으나 그 자손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我祖之於全州其爲移居與世居固不可知盖與三平章家同邑而同貫則人或疑之以南阮
아조지어전주기위이거여세거고불가지개여삼평장가동읍이동관즉인혹의지이남완
北阮然可往杞宋文獻之歎也
북완연가왕기송문헌지탄야
  우리 시조(류습)가 전주에 이사를 가서 살았는지 전부터 대대로 살아온 것인지는 참으로 알 수가 없으나 대개 3인의 평장사 집과 더불어 같은 읍(邑)이고 본관도 같다면 사람들이 혹 의심하기를 빈촌(貧村)과 부촌(富村)의 류씨(柳氏)라 할 것이니 어찌 약소국(弱小國)인 기(杞)나라와 송(宋)나라가 문헌을 보존치 못한 것을 탄식하겠는가.
昔狄武襄不敢附狄梁公凡譜系失傳之家當引狄武襄爲第一義也今當第四譜修正之日
석적무양불감부적량공범보계실전지가당인적무양위제일의야금당제사보수정지일
始祖完山伯十九世孫副司果南珪謹撰識之時蒼龍丙子夏
시조완산백십구세손부사과남규근찬식지시창룡병자하
  옛날에 같은 적씨(狄氏)인데 가난한 적무양 청(靑)의 집안이 부자인 적양공 인걸(仁傑)의 집안에 감히 끼지 못했으니 보계(譜系)를 잃은 집안에서는 마땅히 적무양의 고사(古事) 인용이 제일 옳은 길이다. 이제 네 번째 족보를 수정하는 날에 시조 완산백 19세손 부사과 류남규(柳南珪)가 삼가 기록하여 알리니 때는 고종13(1876)년 여름이다.

    4) 전주류씨보계변증(1876년 전주류씨 병자보)
       우리 류씨는 본래 전주에서 출계하였는데 중간에 문화로부터 이적하였다는 설이 있어 지금에 와서 널리 고찰하고 자세히 변증하여 그 잘못된 것을 아래와 같이 바로 잡아 16대손 류병문(柳炳文)이 삼가 적는다.
  삼가 “고려사”를 살펴보건대 정간공(貞簡公), 대숙공(戴肅公), 장정공(莊定公) 세 평장사(三平章事)의 열전(列傳)이 있는데 모두 전주인이라고 되어있고 “동국여지승람”의 “전주인물조”에도 빠짐없이 들어있어 회헌공과 진일재공의 윗단에 실려있다.
  또한 행촌 이공(李公)이 완산 류인우(柳仁雨)의 시를 베껴 놓은 것이 “해동명적(海東名蹟)”에도 실려있으니 곧 전주류씨의 존재는 오래된 것이다. 그러니 어찌 장령공에 이르러 이적(移籍)한 것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연대를 가지고 추정해도 정간공이 고려의 성종 시대에 벼슬을 하여 이미 예부시랑이 되었고 고려개국과는 시간적인 차이가 60여년에 지나지 않아 그 때가 대승공 차달의 시대와 아주 가까운데도 그 당시의 역사가들이 대승공의 친족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곧 문화와 전주는 따로 2본인 것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또 살펴보건대 목은(牧隱) 이공(李公)이 보문공(寶文公)과 함께 같은 고려조정에서 벼슬을 할 때 이미 전주류씨라고 말한 바 있고 그 후 호암, 오동방, 종릉, 황죽리 등의 묘갈문, 서령 진일재와 전양공 묘갈, 유일재 및 호은공 묘지(墓誌)와 이식(李植)의 “택당집”에 실려있는 낙봉공시장(駱峯公諡狀)에도 우리 전주류씨가 모두 문화에서 이적하였다는 말은 없다.
  전한 벼슬을 지낸 회헌의 문과방목에도 역시 전주가 본관이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우리 전주류씨문중이 남쪽으로 낙향한 이후 갑자기 문화류씨로부터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전주로 이적(移籍)한지 2백여년인데 이를 곧바로 능히 고치지 못하고 모든 각파의 장갈(狀碣)문자에 계속하여 쓰고 있으니 크게 개탄하는 바이다.
  ○호암공 묘갈문에는 “공의 성은 류요, 이름은 극서이니 계출은 전주이다” “선조39(1606)년에 후손 관찰사 류영순이 짓다”라고 쓰여있다.
  ○종릉의 묘갈문에는 “공의 성은 류씨요 이름은 빈이고 계출을 전주이다”라고 쓰여있다.
  ○오방동 묘갈문에는 “연안(延安, 류극서)도 역시 완산의 큰 성씨이다” 광해군8(1616)년에 군수 이성길이 짓다라고 쓰여있다.
  ○유일재공 묘지(墓誌)에는 “선생의 이름은 분이고 계출은 완산이다” 중종10(1515)년 문평공 이계맹이 짓다라고 쓰여있다.
  ○서령 류지성의 묘갈문에는 “류씨는 완산의 명망 있는 가문으로 류습이 장령으로 증직을 받았고 고려 말에 가문에 경사가 거듭되고 복된 터전이 갖추어져 다섯 아들과 사위 한 분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그의 처는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다” 연산군6(1500)년 제학 권건이 짓다라고 쓰여있다.
  ○호은공의 묘지에는 “공의 성은 류요 이름은 감이며 완산인이다” 선조2(1569)년 소고 박승임이 짓다라고 쓰여있다.
  위 일곱 분의 묘지와 묘갈은 모두 1573~1619년 이전에 쓰여진 것인데도 문화에서 분관되었다는 말은 없다.
  ○황죽리의 묘갈문에는 “공의 이름은 말손이요 계출은 전주이다. 습이 장령으로 증직되었는데 이 분이 우리 류씨의 시조가 된다” 숙종41(1715)년 후손 류근이 짓다라고 쓰여있다.
  ○낙봉공 시장(諡狀)에는 “공의 이름은 헌 이요 출계는 완산이다”라고 쓰여있다.
  ○전양부원군 즉 춘호상공의 묘갈문에는 “류씨는 계츨이 전주요 고려조로부터 빛나는 벼슬이 이어졌다” 종자 관찰사 류항이 짓다라고 쓰여있다.
  ○택당집에 “류씨 본관 전주는 고려 말에 이르러 직제학 극서가 더욱 현달하였다”라고 실려있다.
  ○묵계공 정려각의 정려기(旌閭記)에는 “공의 자는 군서이고 완산인이다” 도암 이재가 짓다라고 쓰여있다.
  위 다섯 항목은 모두 1619년 이후에 쓰여진 금석문인데 역시 이적(移籍)은 거론되지 않았고 경기도와 충청도에 거주하는 일가들의 행장과 묘갈문에도 문화라는 두 글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데 유독 안동에 사는 두 파의 모든 행장과 묘갈문에만 반드시 쓰여져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은집의 “하죽계안씨삼자등과시서(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에 이르기를 “세 아들이 나란히 문과에 급제한 가문으로는 이들 죽계안씨 뿐 아니라 전주류씨의 극강, 극서, 극제가 그들이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족보에 말하기를 “습에 이르러 전주로 이거(移居) 하여 그 읍호를 관으로 하고 자손들이 시조로 삼았다”고 하였다.
  상상해 보건대 장령공은 관직이 없었고 현달한 일이 없었는데 임금이 적(籍)을 하사했을 리는 필연코 없었을 것이고 특히 이거 하였기 때문에 그 읍호를 본관으로 하고 자손들이 시조로 하였다고 한다면 곧 목은(牧隱) 시대에 전주로 새로운 관을 삼은 것이 세상에 드러날 수 없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문화를 버리고 전주라고 하였겠는가?
  이를 제쳐놓고도 전주류씨는 고려조에 현달하여 앞에는 세분의 평장사가 있었고 보문공 형제도 목은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가문인 류씨이므로 이 때문에 전주류씨로 칭하였으니 단지 이 한 줄의 글로도 크게 증명될 안건이라 할 것이다.
  ○세종8(1426)년 문과방목에 “생원 류의손은 전주인이다”라고 쓰여있다. [이 방목은 추연 우성전의 가장본이다]
  ○성종17(1486)년 사마방목에 “유학 류식은 본관이 전주이다”라고 쓰여있다.
  ○중종2(1507)년 문과방목에 “강릉판관 류식은 본관이 전주이다”라고 쓰여있다.
  살펴보건대 전한공 이전에 모두 전주인이라고 호칭하였다면 남쪽으로 낙향한 후 호적을 무슨 이유로 갑자기 문화로 바꿔 불렀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선대에서 전해온 것이 위와 같은데 대략이라도 문화 두 글자는 언급이 없었으니 만약 문화에서 분관을 하였다면 오늘이나 옛날의 문적 중에 어찌 한 낱의 증명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겠는가?
  다음에는 거짓이란 사유를 역력히 서술하여 조목조목 변증하기로 한다.
  ○안동에 소장되어있는 진주류씨족보에는 “전주, 진주, 서산 류씨는 모두 대승공 차달의 후손인데 그 세대를 실전하였고 습에 이르러 전주로 이거(移居)하여 그 읍호를 본관으로 하였다”라고 쓰여있다.
  살펴보건대 이러한 기록은 첨정 류석창(1609~1687년)씨의 통유문(通諭文)에 변증한 것이 상세히 기술되어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는 진주류씨족보가 안동에서 출간되어 이와 같은 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안동에 사는 양파(兩派) 족보의 책머리에 확실치 않은 말만 믿고 호적과 학봉집에 실었으나 서울의 다른 파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전평군이 족보를 만들 때 마침내 방직과 운 두 대(代)를 족보의 책머리에 기록하고 또 그 서문에 쓰기를 “대승공에 이르러 유주에서 일어났고 장령공에 이르러 완산에서 흥하였다”라고 하였으나 첨정공이 곧바로 그 잘못된 것을 배척하였으니 그 문록이 책 속에 기록되어있어 자세히 고찰하여 알게 되었다,
  ○류승서의 가첩(家牒)에 이르기를 “시조 차달은 고려의 대승이요, 그 아들인 효금은 좌윤이요, 효금의 아들인 금환은 대장군이요, 금환의 아들 노일은 검교 대장군이요, 노일의 아들 보춘은 소감이요, 보춘의 아들 총은 역시 소감을 지냈고 그의 아들 공권은 참정으로서 문간이란 시호를 받았고 아들 언침은 밀직사이고 아들 순은 한림학사요, 아들 성비는 문산군이란 군 호칭을 받고 아들 식은 재신의 반열에 올랐으며, 아들 안택은 판관을 지냈으며, 아들인 관(寬)의 옛 이름은 관(觀)이었는데 우의정을 지냈다. 그의 아들이 방우(邦祐), 방보(邦輔), 방직(邦直) 3형제인데 방우의 아들이 추(樞)요, 방직의 아들이 운(橒), 재(梓), 량(樑) 3명인데 운의 아들이 습(濕), 진(津) 형제이니 습은 전주류씨가 되고 재는 진주류씨가 되었으며, 량의 아들 형제 즉 혼(渾)과 철(澈) 두 아들 중 혼은 서산류씨로 분관되었다”라고 쓰여있다.
  위의 보첩은 군수 김계광이 의흥인 이기림에게서 얻었고 이씨는 청도군수 류신남에게서 얻었으며, 류씨는 병사 류승서에게서 얻었다고 했다. 또한 류병사는 문화류씨족보 중에서 얻었다고 말했는데 문화류씨의 옛날 족보나 오늘날의 족보에 쓰여있는 방우 이하 12명의 이름은 모두가 실체가 없는 망발이어서 자세히 고찰할 수 없는 것들이다.
  ○다시 살펴보건대 방직과 운 2대의 이름은 문화류씨족보에도 실려있지 않으니 이것은 분명히 뒷사람들의 말만 듣고 지어낸 것이다. 호암공 묘갈문에 처음으로 운(橒)자가 쓰여있고 임진보 책머리에도 방직을 추가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대단히 미안한 일이겠으나 두 번에 걸쳐 발행한 병오보의 세계(世系) 첫 줄에 기록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문화류씨 기사보(己巳譜)[숙종15(1689)년]에 류차달(柳車達)로부터 순(淳)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상기(上記)와 같고 순의 아들인 양재(良梓)-혹은 전주군(全州君)- 인비(仁庇 ) 진주파 로 되어있다.
  살펴보건대 양재 “전주군(全州君)”에 대한 설은 심히 의심스러워 변증하기 어려울뿐더러 세종3(1421)년에 우대언 영(穎)이 만든 “영락보(永樂譜)”와 명종17(1562)년에 첨정 류희잠이 찬(撰)한 “가정보(嘉靖譜)를 놓고 자세히 살펴보아도 모두 위와 같은 내용이 빠져있으니 이는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무릇 옛날에 없었다가 오늘날에 와서 있는 것은 만약 확실한 근거가 없다면 이들은 모두 진실이 아닌 거짓 저술이 되는 것인데 하물며 극히 의심스러운 것이야말로 재론할 필요가 있겠는가?
  첨정 류석창씨 그리고 부사 류면, 부사 류만의 통유문(通諭文)에 이르되 안동에 소장된 “진주류씨족보”에 이르기를 -전술한 것을 보라 - . 진주류씨의 여러 대족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곧 첨정 류희잠이 말하기를 “언침이 진주로 이거한 입향조라고 하였으나 언침의 증손자인 당시의 후손들 모두가 문화류씨로 본관을 삼고있으니 그렇다면 언침이 진주류씨 시조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또한 안동의 류종례씨가 소장하고 있는 진주류씨족보를 고찰하면 역시 전주, 진주, 서산의 삼류분관설이 없다. 또 문화류씨족보를 보면 곧 류관의 두 아들 맹문, 계문만 나와있고 계문의 두 아들 참과 완이 쓰여져 있을 뿐 관의 아들이라는 방직과 방직의 아들 운, 재, 량에서 분관 되였다는 세 읍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따라서 전주류씨 등이 모두 대승공 차달의 후손이라고 한 것은 실로 억측의 견해가 아니면 망설인 것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진주류씨의 뿌리 또한 문화류씨가 아닌 것이 명확한 것이니 전주류씨의 연원이 문화류씨라는 설은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통유문(通諭文)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연코 전주류씨의 근본이 문화류씨에서 나왔다는 것은 그릇된 것이요, 더 자세하지 못한 것 네 가지 조목이 있으니,
  첫째 문화의 류방직 운운(云云)하지만 처음에 방직(邦直)과 운(橒)등 이름의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둘째 류관의 아들은 맹문과 계문이나 처음에 류관 당시의 세대가 거꾸로 놓여진 것을 변증하지 못하였다.
  셋째 이미 언침을 들어 진주류씨의 시조로 하고 또 운, 재, 량을 끌어들여 본관이 나누어진 일을 인용하고 있으나 두 가지의 설이 판이하게 서로 어긋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넷째 전주류씨가 고려조 초에 시작된 것을 말하지 않고 감춘 것이다.
  이와 같은 부류는 모두 진실에 근거하여 자세히 고찰할 수 있는 사실이 미비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옛날에 없었던 분관설이 지금에 와서 있다는 것만을 충분히 알 수 있을 뿐이다.
  문헌비고[정조6(1783)년]에는 “전주류씨는 본관이 문화류씨에서 분관되었다”라고 쓰여있다. 살펴보자면 이 책은 정조 때 신하(臣下)에게 명하여 지은 책이다. 이 책에 기록된 것이 비록 이와 같이 다르나 신하에게 특별한 견해가 있어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은 우리 류씨의 근세에 전해 온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그대로 기록된 것일 뿐이다. 보는 사람들은 이 책을 근거로 단안을 내리면 온당치 않은 일이다.
  참판 류의(柳誼)의 가사(家史)에 인용된 문헌인 영모록(서애 류성룡이 지은 유서)에 이르기를 류관의 아들 이름을 류방우로 적고 있는데 류방우는 곧 고려 때 사람이고 류관은 조선 때의 우의정이었으니 앞뒤가 크게 달라 이것이 잘못 전해진 것 같고 문화류씨족보에는 예로부터 방우라는 사람은 없다.
  ○어떤 자가 이르되 문화류씨의 내력은 잘 알 수가 없고 전주류씨는 처음부터 별파라고 말했다. 살펴보건대 영모록은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으나 설이 이와 같은 것으로 보아 이미 옛 사람들도 살펴보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살펴보건대 전주류씨가 고려 초에 시작 되였고 중엽에 현달한 것이 이와 같은데 비록 그 족보의 계통을 잃어버려 자세히 고찰할 연유가 없으니 문화류씨에서 분관되었다는 잘못된 설은 다른 증거를 대비하지 않고도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동생인 휘문이 말하기를 “전주류씨와 진주류씨가 문화류씨에서 나왔다는 설은 대개 진주류씨가 문화류씨 집안에 장가간 사위이고 전주류씨가 또한 문화류씨의 외손사위가 되기 때문에 아울러 문화류씨 족보에 올라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이치에 맞지 않는 설을 잘못 해석하여 마침내 분관의 의혹이 생긴 것이니 이미 진주류씨가 잘못되었고 따라서 전주류씨도 잘못되었던 것이다.
  진주류씨는 그 그릇된 것을 곧바로 깨우쳤으나 전주류씨는 아직도 의혹을 풀지 못하고 있으니 잘못이 심하다고 하겠다. 떠도는 말을 가볍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와 같다.
  이는 비단 전주류씨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지금 전국의 류씨성을 가진 사람들 스스로가 대승공의 후손 계행(系行)을 끌어다 붙이면서 “본래 류씨는 동성동본이며, 잘못된 것은 진주류씨족보일 뿐이다”라고들 하니 그렇다면 고려태조의 장인인 류천궁(柳天弓)까지도 역시 대승공의 류씨 중 하나의 류씨라고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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