家門의 영광

시조 류습(柳 濕)

맨발나그네 2009. 12. 23. 15:53




시조 고려국 완산백 습(始祖 高麗國 完山伯 濕)

             

《탄생》 

서기 1310년~1320년간에 탄생 추정

 


《추정근거》
시조의 둘째 아드님이신 직제학공(克恕, 1340년대 출생~1388)과 사위 대제학 심효생(1349~1398)의 출생시기와 손자이신 영흥공(濱, 1370~1448)의 출생 년대를 역산하여 추정하였음.

 


《유지(遺址)》
의씨 추원편(誼氏 追遠編)에는 우리 시조의 유허(遺墟)는, 
① 전라북도 전주부 북문의 동북평전(東北平田)에 있었다고 기록 되어 있고, 
② 류씨종계통문(柳氏宗契通文)에는 전주부 남쪽 5리허의 동쪽 골짜기라고 표기 하고 있었음.

공이 일찍이 전주의 북문밖에 살았으니 세상에서 전주 류씨라고 칭하게 되었다. 자손이 모두 널리 알려진 벼슬에 이르러 이에 적(籍)으로 삼았다고 하며 시조께서는 전주부의 남쪽 5리쯤 곤산 동쪽 한 골짜기가 곧 우리 시조께서 사시던 옛 터이다. 큰 고을의 근교이며 마을 골짜기의 샘과 돌들은 너무나 맑고 깨끗하여(瀟然灑然)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정서가 함양되는 그런 곳에 우리 시조께서 사셨기에 다섯 아들과 사위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絃씨의 宗契通文에서 발췌한 내용임)

 

 

《약력》
  시조(始祖)의 생몰연대(生沒年代)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시조의 둘째 아들 직제학 극서(克恕, 1340년대 출생~1388)와 사위 대제학 심효생(1349~1398)의 출생시기와 손자 영흥부사 빈(濱, 1370~1448)의 출생 년대를 역산하여 추정하면 1310~1320년간에 탄생하신 것으로 추정되며, 


  유허지(遺墟址)는 의씨 추원편(誼氏 追遠編)에 전주부 북문의 동북평전(東北平田)에 있었다고 기록 되어 있고, 류씨종계통문(柳氏宗契通文)에는 전주부 남쪽 5리의 동쪽 골짜기라고 표기 하고 있다.


  시조는 전주 최씨를 배위로 맞이하여 슬하에 5남1녀를 두셨는데 묘비문에 오자일서(五子一婿)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 때는 세 아들이 문과(文科)에 급제하면 법에 따라 부모에게 벼슬을 내리게 되어 있어 시조는 봉정대부(奉正大夫) 사헌부 장령(掌令), 시조비(始祖妣)는 국대부인(國大夫人)에 추증(追贈)되었고, 조선(朝鮮) 초에 시조(始祖)의 외손녀(外孫女) 즉, 심효생의 딸이 세자빈(世子嬪)이 되자 시조의 따님인 심효생의 부인 전주류씨(全州柳氏)가 정경옹주(貞慶翁主)로 되어 시조는 완산백(完山伯)에, 시조비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추봉(追封)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2010년 4월에 시조비 묘소를 개수하는 과정에서 贈國大夫人 全州府 崔氏之墓(증국대부인 전주부 최씨지묘)라고 음각된 비석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시조의 따님이 정경옹주가 되기 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전북 완주군 고산면 율곡리 산10번지에 있는 시조 묘소는 용사취회형(龍蛇聚會形)으로서 명당으로 꼽히고 있다. 


  이 묘소에는 중종25(1530)년에 고산 현감 6세(世) 곡(轂)이 작은 비석을 세웠고, 선조10(1577)년에 8세(世) 전주 판관 영(寧)과 태인 현감 8세(世) 연(埏)이 비석을 개수하였으나 마손되어 영조30(1754)년에 18세 전주 토포사(討捕使, 경찰서장] 엄(曮)이 묘갈(墓碣)과 석물(石物)을 갖추었고, 그 후 1938년에 후손들이 신도비를 세웠다.
  그런데 이 지역이 개발됨에 따라 2010년 4월에 전북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 산4-6번지 건지산(乾止山) 기슭에 있는 시조비 묘에 이장(移葬)하여 합장(合葬)하였다. 


  공은 덕망이 높아 후손이 번성하여 벼슬한 분이 문과(文科) 97명, 음직(蔭職) 197명, 무과(武科) 79명, 사마시(司馬試) 103명, 영의정 1명[9세 류영경], 판서(判書)는 3명[8세 류훈, 15세 류복명, 16세 류당], 참판(參判)은 16명, 관찰사(觀察使)는 9명이다.


  또한 대장(大將) 1명[8세 류훈], 봉군(封君) 9명[4대봉군 8세 류효찬, 9세 류조생, 10세 류파, 11세 류시성, 5대봉군 8세 류의, 9세 류영경, 10세 류열, 11세 류정량, 12세 류심], 부마 1명[11세 류정량], 시호(諡號) 받은 분은 4명[6세 류숭조, 11세 류정양, 15세 류복명, 16세 류당], 청백리는 2명[6세 류헌, 11세 류경창]이다. 

 

 

《사실고증(事實考證)》
시조 및 시조비 묘갈문에 의하면“시조(始祖)의 5남1녀가 문과에 급제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고려 때 세 아들이 문과(文科)에 급제를 하면 나라 법에 따라 부모에게 벼슬을 주게 되어있어 시조는 봉정대부 사헌부 장령(掌令)에, 시조비(始祖妣) 전주최씨는 국대부인(國大夫人)에 추증되었고, 그 후 조선 초에 이르러 시조(始祖)의 따님인 심효생의 부인 류씨(柳氏)가 정경옹주(貞慶翁主)가 되었기 때문에 시조는 완산백(完山伯)에, 시조비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추봉(追封)된 것으로 보인다.

 


《시조비석》
시조비석은 6세 광주목사 곡(轂)이 선조 10년(1577년)

직제학공 묘갈문은 선조 39년(1606년) 관찰사 영순(永詢)이 쓰고 진주 하씨 묘갈은 광해군 8년(1616년)에 군수 이성길이 썼다. 여기에서 습(習)으로 표기하였으나 후손들이 여러 자료를 검토 한끝에 시조의 휘를 습(濕)으로 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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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祖 高麗國 完山伯 諱 濕 墓所 全景

 전주시 고산면 율곡리 산 10 亥坐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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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祖 墓下 下馬碑

 전북 완주군 고산면 율곡리 산 10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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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祖 墓碑

 전북 완주군 고산면 율곡리 산 10번지

 


출처 :  전주류씨 대종중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