家門의 영광

3세 류 빈(柳 濱) (1370∼1448)

맨발나그네 2011. 12. 13. 19:11

3세 류  빈(柳  濱)  (1370∼1448)


   시조 완산백(류습)의 3세손, 제학공(류극서)의 작은아들이다. 덕산 윤씨를 배필로 맞아 3남(류경손, 류의손, 류신손)을 낳고, 후배(後配) 단양 우씨로 부터는 막내아들(류말손)을 낳았다. 고려 우왕8(1382)년에 이방원(조선 태종)과 함께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우왕12(138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監察, 정6품), 지평(持平, 정5품), 장령(掌令, 정4품), 직제학(直提學, 정4품)을 거쳐 통정대부로 영흥(永興) 부사(府使, 정3품)를 지내고 이조 참판(參判, 종2품)으로 추증되었다.
  작고한 년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 세종28(1446)년 2월 12일에는 회헌공이 병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세종임금에게 파직을 요청하면서 아뢰기를 “신의 아비 나이는 지금 77세이오며, 어미의 나이는 75세인데 어미는 숙환으로 항상 병상에 누어계시오니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려운 심정이 마음 속에 번갈아 일어나므로 자나 깨나 두려워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臣父年今七연十七臣母年今七十有五而母有宿患常在床褥喜懼之情交激于中寤寐兢惶罔知所措伏),”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 출생연대를 계산하면 영흥공은 공민왕19(1370)년에 출생한 것이며, 또한 세종30(1448)년 9월 27에 ”예조참판 류의손이 부친상을 당하여 관곽과 종이 100권을 하사하였다(禮曹參判柳義孫遭父喪賜棺槨及紙一百卷)란 말이 있으므로 영흥공은 세종30(1448)년에 별세 하여 수(壽) 79세로 장수를 하신 것이다.
  묘소는 경북 영천군 문수면 승문리 종릉산(鐘陵山) 기슭 류릉골에 있는데 육각정석(六角井石)을 쌓아 팔각묘(八角墓)로 되어있다. 일설에 의하면 조정에서 종릉(鐘陵)이라는 묘호(墓號)를 내리고 매년 나라에서 치제(致祭:공신이 죽으면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내려 그 공신의 제사를 지내는 것)를 지내게 하였으나 임진왜란 후에 중지되었다고 한다.
  최근의 지도(地圖)에는 류릉산(柳陵山)과 류릉(柳陵)으로 표시되어있다. 옛날에 작은 비석이 있었으나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마모되어 선조 39년(1606년)에 경상도 관찰사 류영순(柳永詢)이 작은 비석을 세우고 류릉 오른 쪽에 재실(齋室)을 지었는데 ㄱ자형의 행랑채와 추원재(追遠齋) 및 정침(正寢)이 □자형을 이루고 문틀에는 가운데 설주를 설치한 특이한 구조이다.
   이것은 조선 중기 분묘(墳墓) 재실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건축전문가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으며, 이 재실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8호로 지정되어있다. 전부인 덕산 윤씨는 영흥공과 합장하였고 후부인 단양 우씨 묘소는 전남 남원군 왕시면 고죽리(남원시 고죽동)에 있다.
[족보], [류승추술], [조선왕조실록] [영주·영풍향토지 하]

 

< 조선왕조실록 >

태종 5년 6월 26일 (경인)
  사헌부에서 상소하여 감찰(監察) 류빈(柳濱) 등 아홉 사람의 죄명(罪名)을 청하였으나, 회답하지 아니하였다. 상소에 이르기를, “감찰(監察) 이중만(李仲蔓) 등이 고하기를 ‘방주(房主) 최사규(崔士規)와 유사(有司) 이사관(李士寬) 등이 장관(長官)을 업신여긴 죄로 파직(罷職)되었는데, 류빈 등 아홉 사람은 모두 그 의논에 참여하고도 태연하게 도로 사진(仕進)하고 있으며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여, 감찰방(監察房)의 풍기(風紀)를 더럽히니, 이를 핵론(劾論)하여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 의정부에서 빈(濱) 등에게 물으니, 빈(濱) 등이 대답하기를 ‘사규․사관 등은 이미 파직되었고, 대사헌(大司憲)․집의(執義)․장령(掌令)․지평(持平) 등은 한결같이 모두 사면을 청하여 상감께서 허락하셨으며, 의정부에서 대장(臺長)과 감찰(監察)을 모두 출사(出仕)하게 하자고 청하여, 임금께서 감찰만 출사하기를 명하시어 출사한 것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빈(濱) 등에게 출사하도록 명하신 까닭은, 특히 감찰의 수(數)가 적어서 각사(各司)에서 청대(請臺)하지 못하여 사무(事務)가 정체(停滯)되기 때문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빈 등이 만약 청하기를, ‘신 등이 사규․사관과 더불어 사실 그 의논을 같이 하였으니,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감과 죄를 받고 아니 받음을 홀로 다르게 할 수 없습니다. 비록 성상의 은혜를 입는다 할지라도, 뻔뻔스럽게도 도로 사진(仕進)하면 풍헌(風憲)의 누(累)가 될까 두렵습니다’고 하였으면, 전하께서 반드시 처치함이 있었을 것이온데, 이러한 계책을 내지 아니하고 마음속으로 복직(復職)을 달게 여기고 있으니, 진실로 마땅치 못합니다. 또 대사헌 이내(李來)가 장무(掌務)인 지평(持平) 이흡(李洽)이 갇혔다는 이유로 모두 출사(出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흡(洽)이 석방되자 성상께서 이내 등에게 비로소 출사하라는 명령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빈 등은 사규와 더불어, 항상 이내 등이 사면(辭免)의 청(請)을 더디게 하였다고 허물하여 기롱(譏弄)과 풍자(諷刺)를 간절히 하였거늘, 이제 자신을 꾸짖는 것은 어두우니, 말과 행동이 어긋나서 크게 조사(朝士)의 도리를 잃었습니다. 청컨대 죄를 주소서.” 하였는데, 궐내에 머물러 두고 내려보내지 아니하였다.
  【원전】 1 집 329 면
태종 8년 3월 9일 (무오)
  사간원(司諫院)에서 상언(上言)하기를, “홍서(洪恕)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입조(入朝)할 때에 싸 가지고 가던 진헌물(進獻物) 궤 속에 포물(布物)을 숨겨 두었다가 제정(帝庭)에서 발각되었고, 또 사삿 말[私馬]을 가지고 무역(貿易)을 감행하여 상국(上國)에 웃음을 샀으니, 대신(大臣)으로서 이런 행동이 있을 수 있습니까? 만일 전하(殿下)의 사대(事大)하시는 정성(精誠)이 천심(天心)을 감격(感格)케 하지 아니하였다면 어찌 상국(上國)의 견책과 노여움을 사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은 종사(宗社)에 관계 되는 것이니 마땅히 먼저 물었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지평(持平) 류빈(柳濱)이 이것은 내버려두고 논(論)하지 않고 종자(從者)인 정교(鄭喬)․장호(張浩)․한중로(韓仲老)의 죄만을 청하였으니, 본말(本末)과 경중(輕重)의 차서(次序)를 매우 잃었습니다. 지금 헌부(憲府)에서 다시 홍서(洪恕)의 죄를 논핵(論劾)하여 두 번이나 그 청(請)을 거듭하였사온데 전하께서 특별히 공신(功臣)이란 이유로 너그러운 법전을 가하여 자원(自願)에 따라 안치(安置)하셨으니, 신 등은 전하를 위하여 매우 실망합니다. 원하옵건대 헌사(憲司)에서 아뢴 바에 따라 그 직첩(職牒)을 거두고 유사(有司)에게 맡기어 율(律)에 의해 시행하소서. 그리고 지평(持平) 류빈(柳濱)의 책임을 잃은 죄[失任之罪] 또한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소(疏)가 올라가매 궁중(宮中)에 머물러 두었다.
【원전】 1 집 432 면
태종 13년 10월 2일 (무신)
  조원(趙源)․마천목(馬天牧)․홍유룡(洪有龍)에게 단(段)․견(絹)을 각각 1필씩 하사하고, 또 신극공(申克恭)과 관찰사 경력(經歷) 류빈(柳濱)․절제사 경력 류익지(柳翼之) 등에게 옷을 하사하였다. 조원․류빈은 모두 포치(布置)하는 데 잘못하고 행궁(行宮)의 공구(供具)도 거의 빠뜨린 것이 많았으나, 임금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도 또한 힐책하지 않았다.【원전】 1 집 690 면
태종 17년 9월 19일 (신미)
  사헌부(司憲府)에서 우균(禹均)의 도관찰사(都觀察使)의 직임을 파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고 장령(掌令) 류빈(柳濱)을 불러서 우균이 탄핵을 당한 까닭을 물으니, 류빈이 아뢰기를, “우균(禹均)이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되었을 때에 호장(戶長) 득량(得良)은 도내(道內)에서 선인(善人)이라고 칭하는데, 법을 굽혀 그를 죽이었고, 또 일찍이 영천(永川)․선산(善山) 여러 고을을 맡았을 때에도, 또한 모두 사람을 죽였으니, 감사(監司)는 한 도(道)의 큰 소임인데 백성의 물망이 없이 다시 이 도(道)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하므로 탄핵하였습니다.?하였다.
【원전】 2 집 187 면
태종 18년 1월 17일 (무진)
  사헌 집의(司憲執義) 장윤화(張允和)․장령(掌令) 류빈(柳濱)․지평(持平) 권조(權照)를 의금부(義禁府)에 내렸으니, 또한 권상온(權尙溫)의 죄를 잘못 추국(推鞫)한 때문이었다.【원전】 2 집 201 면
태종 18년 1월 19일 (경오)
  박습(朴習)․장윤화(張允和)․박안신(朴安臣)․류빈(柳濱)․신자근(申自謹)․권조(權照)의 갇힌 것을 풀어 주었다. 박습이 옥중(獄中)에 있으면서 상서(上書)하여, 권상온(權尙溫)의 사건에 의심할 만한 점이 여섯 가지가 있다고 논하고, 또 언로(言路)의 막힘을 말하였는데, 글이 올라가니, 임금이 읽어보고 내관(內官) 최한(崔閑)을 시켜 전교(傳敎)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사건을 말하는 것은 직분상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요, 두 사람에게 사사로이 원수진 것이 아니니, 글 안에서 말한 것이 어찌 바르지 않겠는가? 그러나, 의금부(義禁府)에서 추문(推問)하자는 청(請)도 또한 어찌 잘못이겠는가? 이 뜻을 박습에게 전하여 타이르라.?이어서 명하여 박습․장윤화․박안신․류빈․신자근․권조를 보방(保放)하였다.【원전】 2 집 202 면
태종 18년 2월 29일 (경술)
  장윤화(張允和) 등에게 명하여 장형(杖刑)을 차등 있게 속(贖)하게 하였다. 권상온(權尙溫) 등에게는 장형 1백 대를 속(贖)하여 아울러 고신(告身)을 수탈(收奪)하고, 장윤화 등에게는 남의 죄를 실입(失入)한 것에 연좌하고, 권상온은 다만 관고(官庫)의 쌀을 내어 사사로이 향교(鄕校)와 인리(人吏)에게 준 죄에만 연좌되었는데, 의금부(義禁府)에서 조율(照律)하니, 집의(執義) 장윤화는 장(杖) 60대, 장령(掌令) 류빈(柳濱)은 90대, 박안신(朴安臣)은 70대, 지평(持平) 권조(權照)는 60대였으나 아울러 모두 속(贖)을 거두고 고신(告身)을 수탈(收奪)하였다.
【원전】 2 집 207 면
태종 18년 5월 23일 (임신)
  명하여 윤임(尹臨) 등 25인에게 직첩(職牒)을 도로 주었는데, 최순(崔洵)․이감(李敢)․류선(柳善)․이초(李椒)․김희(金熙)․송기(宋箕)․정곤(鄭坤)․홍도(洪陶)․허항(許恒)․박융(朴融)․송명산(宋命山)․진중성(陳仲誠)․양수(楊脩)․안지(安止)․정지담(鄭之澹)․장윤화(張允和)․류빈(柳濱)․박안신(朴安臣)․권조(權照)․권완(權緩)․조진(趙瑨)․권수기(權守紀)․조원(趙源)․권상온(權尙溫)이었다.【원전】 2 집 227 면

 

3세 류  빈(柳  濱)의 묘갈문


永興府使柳公濱墓碣銘
公姓柳諱濱系出全州公爲我太宗同榜進士敭歷淸華官至永興府使後以子貴贈叅判祖考諱濕贈司憲府掌令祖妣封三韓國大夫人考諱克恕寶文閣直提學知製敎妣晉州河氏贈領議政晉陽府院君允潾之女浩亭先生崙之熺也公娶尹邦益之女爲配卽先賢禹祭酒外曾孫也生四男長敬孫中部令贈叅議次義孫叅判以文雅名世次信孫叅判次末孫執義贈叅判叅議生二南長孟沂淸白吏郡守次之盛贈叅判郡守生二男長場監察贈叅判次榻事監察四代孫潭文科正郞都事曾孫華居榮川叅判子崇祖興祖崇祖官至大司成學窮性理取重儒林子應台應台曾孫仁榮興祖子應賢應賢曾孫仁植居安東執義生三男長季潘叅判次季瀁僉知中樞府事次季潼贈承旨參判子軫縣監縣監曾孫肇生武科扈聖功臣僉知生子軒大司諫贈吏曹判書判書生四男長世鵬典簿次世麟吏曹叅判贈左贊成次世龜典籤贈吏曹判書次世鳳司果典簿子寧判官宇司果判官子永範今爲直長司果子永孚文科正郞贊成生三男長信文科佐郞次儀叅奉贈領議政次脩叅奉領議政生三男永吉參判以詩文鳴于世永慶今爲領議政全陽府院君永賀直長叅奉子永孝今爲監役叅判子惺今爲文學恒水運判官領議政子悅今爲通津縣監子忻贈戶曹佐郞子忄業 王子師傳子悌松禾縣監子愃通津子廷亮尙貞徽翁主爲全昌尉判書生四男長堪舍人贈吏曹叅判乙巳間正直不撓坐謫十八年讀易不輟均縣令塤判書埏府使贈左贊成舍人子永健府使永立叅判永起今爲麻田郡守叅判子穡今爲副修撰縣令子永成今爲淸風郡守贊成子永謙禁府經歷永謹今爲司諫永詢今爲慶尙道觀察使承旨有子軾輳軾府使贈叅判參判子潤德文科叅判次潤善潤善孫復起居安東有五子輳子潤門潤門孫止信武科府使其餘內外子孫蕃衍不可殫記而奕世貂蟬綿綿不絶實由先世積德毓慶之致也嗚呼懿哉公墓在榮川郡南鍾陵山之原夫人祔焉古有短碣而世代綿遠刓缺莫卞六代孫永詢奉節來省不勝感懼謹鑱小碑略記梗吠以示來世云
               六代孫嘉善大夫行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 永詢撰
                                           皇明萬曆三十四年丙午三月 日立
出處 : 柳乘追述 柳永熙 編
  공의 성은 류(柳)씨요 이름은 빈(濱)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공은 지체 높은 집안에 태어나 우리 태종(太宗)과 함께 진사시험에 합격하였고 관직이 영흥부사에 이르렀는데 후에 아들이 귀하게 되어 참판으로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 습(濕)은 증사헌부 장령이고 할머니는 봉삼한국대부인이다.
  아버지 극서(克恕)는 보문각 직제학 지제교를 지냈고 어머니는 진주 하(河)씨로 영의정에 추증된 진양부원군 하윤린(河允潾)의 딸이며, 호정(浩亭)선생 하륜(河崙)의 누이이다. 공은 윤방익(尹邦益)의 딸을 아내로 맞았는데 바로 덕망 높은 성균관 당상관 우(禹)선생의 외증손으로 4남을 낳았다.
  맏아들 경손(敬孫)은 중부령으로 참의에 추증되고 다음 의손(義孫)은 참판인데 문장으로 유명하였고 그 다음 신손(信孫)은 참판이며, 막내 말손(末孫)은 집의로서 참판에 추증되었다. 참의는 2남을 낳으니 맏아들 맹기(孟沂)는 군수로서 청백리이고 막내 지성(之盛)은 참판에 추증되었다. 군수는 2남을 낳으니 맏아들 장(場)은 감찰로서 참판에 추증되고 막내 탄(坦)은 도사이다.
  감찰의 4대손 담(潭)은 문과로서 정랑이고 도사의 증손 화(華)는 영천(현 지명 영주)에 살고 있다. 참판의 아들은 숭조(崇祖)와 흥조(興祖)이다. 숭조는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고 성리학에 통달하여 유림의 존경을 받았으며, 아들은 응태(應台)이고 응태의 증손은 인영(仁榮)이다.
  흥조의 아들은 응현(應賢)이고 응현의 증손은 인식(仁植)인데 안동에 산다. 집의는 3남을 낳았는데 맏이 계번(季潘)은 참판이고 다음 계장(季瀁)은 첨지중추부사이며, 막내 계동(季潼)은 승지에 추증되었다.
  참판의 아들 진(軫)은 현감이며, 현감의 증손 조생(肇生)은 무과로 호성공신이다. 첨지는 아들 헌(軒)을 낳으니 대사간으로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판서는 4남을 낳았는데 맏이 세붕(世鵬)은 전부이고 다음 세린(世麟)은 이조참판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그 다음 세구(世龜)는 전첨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막내 세봉(世鳳)은 사과를 지냈다.
  전부의 아들 영(寧)은 판관이고 우(宇)는 사과이며, 판관의 아들 영범(永範)은 지금 직장이고 사과의 아들 영부(永孚)는 문과로서 정랑이다. 찬성은 3남을 두었는데 맏아들 신(信)은 문과로서 좌랑이고 다음 의(儀)는 참봉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막내 수(脩)는 참봉이다.
  영의정은 3남을 두었으니 영길(永吉)은 참판인데 시문으로 유명하고 영경(永慶)은 지금 영의정으로서 전양부원군이며, 영하(永賀)는 직장이다. 참봉의 아들 영효(永孝)는 지금 감역관이며, 참판의 아들 성(惺)은 지금 문학이고 항(恒)은 수운판관이다.
  영의정의 맏이 열(悅)은 지금 통진현감이고 다음 흔(忻)은 호조좌랑에 추증되고 다음 업(忄業  )은 왕자의 스승이고 다음 제(悌)는 송화현감이며, 막내는 선(愃)이다. 통진의 아들 정량(廷亮)은 정휘옹주에게 장가가서 전창위에 봉해졌다.
  판서는 4남을 낳으니 큰아들 감(堪)은 사인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성품이 바르고 곧아 뜻을 굽히지 않으니 을사사화 때 남의 죄에 걸려들어 18년간 귀양을 가서도 주역공부를 그치지 않았다. 다음 균(均)은 현령이며, 훈(塤)은 판서이고 막내 연(埏)은 부사로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사인의 아들 영건(永健)은 부사이고 영립(永立)은 참판이며, 영기(永起)는 지금 마전군수이다. 참판의 아들 색(穡)은 지금 부수찬이며, 현령의 아들 영성(永成)은 지금 청풍군수이고 찬성의 아들 영겸(永謙)은 의금부의 경력이며, 영근(永謹)은 지금 사간이고 영순(永詢)은 지금 경상도 관찰사이다.
  승지는 아들이 있는데 식(軾)과 주(輳)이다. 식은 부사로서 참판에 추증되고 참판의 아들 윤덕(潤德)은 문과로 참판이다. 다음은 윤선(潤善)이다. 윤선의 손자 복기(復起)는 안동에 사는데 다섯 아들이 있다. 주(輳)의 아들은 윤문(潤門)이며, 윤문의 손자 지신(止信)은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이다.
  그 밖에 내외 자손이 번성하여 다 기록할 수 없고 대대로 고관이 계속해서 끊이지 않으므로 이는 실로 선대에서 덕을 쌓고 선행을 길러 이룬 것이니 아! 거룩하도다. 공의 묘는 영천군(영주군) 남쪽 종릉산(류릉산)의 언덕에 있는데 부인이 합장(合葬)되어있다.
  옛날에 작은 비석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글자가 닳아 알아볼 수 없어 6대손 영순(永詢)이 관찰사로 와서 성묘를 하고 황송한 마음 금할 길 없어 삼가 작은 비석을 세우고 대강을 기록하여 후세에 알린다.
  6대손 가선대부 행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 영순(永詢)이 짓다.    선조39(1606)년 3월  일에 세우다.

'家門의 영광' 카테고리의 다른 글

4세 류말손(柳末孫) ( ? ∼ ? )  (0) 2011.12.13
4세 류의손(柳義孫) (1398∼1450년 ? )  (0) 2011.12.13
2세 류극서(柳克恕)  (0) 2009.12.23
시조 류습(柳 濕)  (0) 2009.12.23
토성전주류씨 관련자료  (0) 2009.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