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나그네/맨발걷기 경험담

역사속의 미인들과 함께 한 광교산과의 데이트

맨발나그네 2010. 7. 25. 05:52

 

(미인시리즈1) 조강지처( http://blog.daum.net/yooyh54/243)

(미인시리즈2) 미(美)에 대한 정의와 현대 세계의 10대 미인과 현대 한국의 시대별 미인 ( http://blog.daum.net/yooyh54/291 )

(미인시리즈3) 중국의 10대 미인과 미인의 조건 ( http://blog.daum.net/yooyh54/295  )

(미인시리즈4)역사속의 한국 미인들 ( http://blog.daum.net/yooyh54/301  )

(미인시리즈5) 팜므파탈( http://blog.daum.net/yooyh54/309)

(미인시리즈6) 악처(惡妻)(http://blog.daum.net/yooyh54/314)

 

역사속의 한국 미인들과 함께 한 광교산과의 데이트 

 

 

 

 

 

● 산 행 지 : 광교산 형제봉( 수원시 )

 

● 산행일시 : 2010년 7월 24일 (토)

 

● 누 구 랑 : 아주대총동문회산악회

 

● 산행코스 : 경기대-형제봉-종루봉-토끼재-상광교버스종점

 

 

오늘도 나의 종교이자 조강지처 광교와의 해후이다.

일기예보와는 달리 새벽까지 오던 비는 멈추어 조강지처의 품에 안기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긴 하지만, 비 끝이라 그런지 견딜만 하다.

비 온 후의 등산로는 맨발로 걷기가 아주 좋다.

땅바닥이 몽실 몽실한 것이 발바닥에 전해 오는 느낌이 아주 좋다.

무더위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나의 조강지처 광교의 품에 안기기 위해 와 있다.

무더위 속에서도 산을 찾는 이유야 각각 다르겠지만, 독일의 어느 시인은 '네 영혼이 고독하거든 산으로 가라'라고 노래하였다 한다.

이 시귀는 산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아끼는 귀절이다.

혼자가 되었든 정다운 사람들과 함께이든 산길을 걷노라면 스트레스가 날아가 버리고 만다.

내게도 나혼자 삶이 버거워 껴안을 수 조차 없을때도 가만히 안아준 것은 나의 조강지처 광교산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런 저런 어려움에 처한 인생길 굽이마다에도, 그리움이 사무쳐 방황할 때도, 내가 무언가로 부터 위로를 받고 싶어 할 때도 그 넓은 어깨를 내준 것은 나의 종교이자 평생의 반려자인 광교산이다.

그러기에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계절에 관계없이 광교산과의 데이트에 열중일 것이다.

 

 

그렇게 광교산을 한바퀴 돌고 내려와 동문들과 닭도리탕에 반야탕을 한잔 걸치고 시내버스로 이동하던중 차창 밖으로 본 능소화가 아름답기 그지 없다.

그 능소화를 보면서 능소화에 얽힌 전설을 떠올리며, 복숭아 꽃처럼 아름다운 궁녀 '소화'의 아름다움이 그려진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여 내친김에 한국 역사속의 미인들을 더듬어 본다.

한국의 역사속에 살아 숨쉬는 미인들을 열거해 보자면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했고, 비류와 온조 두 아들과 함께 백제를 건국한 실질적 여왕 소서노를 그 첫번째 반열에 올리고 싶다.

 

물론 미인이라기 보다는 나라를 두개나 만든 세계사속에 전무후무한 여걸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겠지만, 웬지 드라마속에서 소서노역을 맡았던 탈렌트 한혜진씨 얼굴이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아른거려 그녀를 가장 먼저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 두나라 고구려와 백제는 나라가 존재하는 동안 서로 못잡아 먹어 안달이었으니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릿발이 선다고 했던가.

 

그 다음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의 2대왕 유리가 나온다.

 

유리왕 그가 누구인가.

 

소서노에게 남편을 빼앗긴 주몽의 첫번째 부인 예씨를 어머니로 두고 기구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고구려의 2대왕에 오르지만, 결혼한지 일년만에 왕비 송씨가 죽자 계비로 하희와 치희를 들이는데, 두여자가 날이면 날마다 시기하며 사랑싸움을 하다 그예나 치희가 집을 나가게 되자 유리왕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 '황조가'를 남긴다.

 

 

 

翩翩黃鳥(편편황조)   훨훨 나는 꾀꼬리들이어

 

雌雄相依(자웅상의)   너희들은 암수 서로 화합하는데

 

念我之獨(염아지독)   나 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誰其與歸(수기여귀)   그 누구와 같이 노닐거나

 

 

 

혹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왕비 송씨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라기도 하고, 혹자는 중국인이었던 치희와 고구려 명문가의 딸인 하희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신세를 한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단다.

 

 

어째거나 고대 역사서에 기록된 여인 이름이 많지 않으니 이 기록속의 하희를 역사속의 미인으로 이름을 올리는 이도 있다.

 

 

 

그 다음 고구려사 속의 미인으로는 관나부인(貫那夫人)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고구려 본기〉 중천왕(中川王) 조(條)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중천왕의 소비(小妃)인 관나부인이 얼굴이 아름답고 두발(頭髮)이 길어 왕의 총애를 받게 되자 왕후 연씨(椽氏)는 왕에게 “지금 위(魏)나라에서 천금을 주고 장발을 구한다 하니 장발미인을 위나라에 보내면 다시는 우리 나라를 침범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여 관나부인을 왕의 곁에서 멀리 떠나 보내려 하였다.

 

이것을 들은 관나부인은 왕이 사냥에서 돌아올 때 가죽 주머니를 들고 나와 맞으며 “왕후가 나를 여기에 넣어 바다에 버리려고 하니 집에 돌아가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여 왕후를 모함하였다.

 

왕은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노하여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서해(西海)에 던지게 하였다.'라고.

 

 

 

고구려 고국천왕비 우씨는 남편이 죽자 권력을 미끼로 첫째아우인 발기를 제치고 과감히 남편의 두째동생인 연우(후에 산상왕)와 결탁해 결혼과 함께 권력과 부를 누렸다.

 

아마도 미인인데다 담대한 성격이어서 가능한 일이었을게다.

누군가는 산상왕이 황후 우씨의 눈을 피해 궁밖에서 몰래 만난 후녀를 더 미인이 아닐까 짐작하기도 한단다. 그 후녀는 산상왕의 다음 왕인 동천왕의 어머니이다.

 

 

 

 

이제 백제의 미인들을 훓어보자.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48 열전 제 8 '도미(都彌)'편에 도미(都彌)의 처(妻)의 아름다움과 절개 굳음을 적고 있다.

 

<도미는 가난한 평민이었으나 의리를 아는 사람이었으며, 그 아내는 아름답고 행실이 곧아서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개루왕이 이를 듣고 도미의 아내를 탐냈다.

그는 도미를 불러다가 "부인의 덕은 정절이 제일이지만 어둡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좋은 말로 꾀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도미는 "사람의 정은 헤아릴 수 없지만 신의 아내 같은 사람은 죽더라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아내에 대해 확신을 보였다.

이를 시험하기 위해 개루왕은 도미를 잡아두고 가까운 신하를 왕으로 꾸민 후, 도미의 아내에게 보내 "도미와의 내기에서 이겨 너를 궁녀로 삼게 되었으니 너는 내 것이다"라고 속였다.

이에 도미의 아내는 몸종을 자기처럼 단장시켜 들여보내 왕의 일방적인 횡포에 맞섰다.

그뒤 자신이 속았음을 알게 되자 화가 난 개루왕은 도미의 두 눈을 뺀 다음 멀리 보내버리고, 도미의 아내를 범하려 했다.

도미의 아내는 몸을 씻고 오겠다며 궁을 탈출했으나 강가에 이르러 더이상 갈 수가 없자 하늘을 우러러 크게 울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조각배 한 척이 밀려왔다.

 올라타니 배가 천성도(泉城島)에 이르렀는데, 눈먼 도미가 거기에 살아 있었다.

극적으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갖은 어려움 끝에 고구려 땅에 도착해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월탄 박종화는 도미부인 설화를 바탕으로 '아랑의 정조'라는 단편소설을 남겼다.

 

 

 

백제의 또다른 미인으로는 고구려 태자였던 안장왕과의 인연으로 연애전쟁을 일으키게 했던 빼어난 미모의 한주가 있다.

 

국경을 뛰어넘은 아름다운 로맨스는 <삼국사기> ‘잡지’ 지리편,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그리고 단재 신채호가 <해상잡록>이란 책을 인용한 <조선상고사>에 실려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역사는 승자의 몫이서인지 아니면 남아있는 향가 덕인지, 신라시대의 사료는 풍부하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역사속의 최고의 미인으로 수로부인을 꼽는다.

 

신라 제33대 성덕왕 (聖德王) 때 강릉태수(江陵太守) 순정공(純貞公)의 아내이다.

 

 

남편이 강릉으로 부임하는 도중, 벼랑에 핀 철쭉꽃을 꺾어 달라고 하자 소를 몰고 가던 늙은이가 '헌화가'와 함께 꽃을 바쳤다.

 

그러나 임해정(臨海亭)에 이르러 해룡(海龍)에게 붙들려 바닷속으로 잡혀가자, 백성들이 '해가(海歌)'를 불러 다시 육지로 나왔다.

 

절세미인이어서 깊은 산과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신물(神物)에게 괴로움을 당했다 한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설화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두고 '동해의 아프로디테'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인간과 여러 신들이 함께 탐하였다 하여 그를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미인이라 꼽는가 보다.

 

(미실)

 

 

 

 

미모하면 한미모하는 미실궁주도 빼놓을 수 없다.

 

타고난 미색과 재능으로 40여년간 신라황실을 주무른 절세미인이다.

 

<화랑세기>는 절세의 미모와 절정의 색공(色功)으로 세종에게 시집을 갔음에도 화랑 사다함의 연인으로 정분을 나누었으며, 진흥왕과 동륜태자, 금륜태자(진지왕) 3부자와 모두 연을 맺었고, 그 다음 임금인 진평왕과도 관계를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언젠가 읽은 '미실'(김별아 작 )이라는 장편소설과 드라마 '선덕여왕'속 미실역 고현정이 오버랩되어 미실과의 색사 끝에 4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신라 최전성기의 진흥왕을 부러워해야 하는지 안타까워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이외에도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나눈 서동요 속의 '선화공주'

 

신도 흠모해 범하지 않을 수 없었던 처용가 속의 '처용의 아내'

 

신라 사륜왕 조차 탐내하던 유부녀인 '도화녀'

 

한국이 낳은 최고의 고승 원효(元曉)대사를 파계시킨 사연 많은 과부 '요석공주'

 

김유신의 사랑과 배신을 함께 맛보아야 했던 '천관녀'등이 신라를 대표하는 미인들이겠지만, 뭐니뭐니해도 신라의 대표적 미인으로 '선덕여왕'을 꼽는 사람들도 많다.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뛰어난 정치력으로 신라 귀족사회의 존경을 받으며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한 것을 넘어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군주라 한다.

 

 

 

고려시대로 넘어오면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손녀였고, 고려 제5대 왕 경종의 왕비였으며, 제7대 왕 목종의 모후였던 천추태후.

 12년간의 섭정으로 고려의 운명을 짊어졌던 자유롭고 당당했던 여자 정치가였지만 유학자들은 그녀를 불륜한 여자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의 사가들은 고려 전통의 부활을 통해 고려의 자주정신을 되살리고 유연한 외교 전략으로 외세의 침입으로 고려를 지켜낸 여성 정치가로 평가하고 있으며, 고려 오백년을 통해 여성으로서 가장 강력한 정치권력을 행사한 고려 최고의 여걸로 평가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원나라에 공녀(貢女)로 끌려 갔다가 원나라 황제 순제의 황후의 자리까지 오른 기황후도 고려의 대표미인으로 들 수 있겠다.

 

<원사(元史)>의 ‘후비열전’에는 기황후의 모습을 “그는 영특한 성품과 살구 같은 얼굴, 복숭아 같은 뺨, 버들 같은 허리를 가지고 있었다.”라고 소개해 놓았다.

 

 

 

원나라 여인이었으며, 원의 쿤란태자의 청혼을 받았으나 기황후의 반대에 부딛쳐 반원주의자인 공민왕과 정략결혼을 하였지만, 공민왕을 도와 도탄에 빠진 고려를 위해 정성을 다한 노국공주도 고려의 미인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로 넘어와서도 많은 미인들이 있다.

 

조선시대 스캔들의 히로인인 어우동은 천하의 색녀(色女)로 유부녀였지만 수많은 유생들이나 조관들과 정분을 나누었다.

 

물론 유교사회였던 조선에서 용납될 리 없었으니 그녀는 결국 사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장록수는 제안대군의 여종이었지만 용모가 뛰어나고 가무에 능해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고, 왕의 총애를 이용하여 국사에 관여하여 연산군의 실정을 부추기다 결국 중종반정에 의해 참형을 받았다.

 

조선 숙종의 총애를 받던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는등 부침을 하다 결국은 사약을 받고 세상과 이별 할 수 밖에 없었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 했던가?

 

미인박복(美人薄福)이라 했던가?

 

 

 

<어우야담>에 실려 있는 기생 성산월은 너무 아름다워 요괴로 오인 받았다 한다. 성산월과 어느 선비의 이야기는 성산월의 미모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고 하니 그 아름다움의 정도를 알 만하다.

 

 

 

계월향은 선조시대때 조선의 팔도에 명성을 떨첬던 평양의 명기로서,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 평양성이 함락당하자 적장 고니시유키나까에게 체포되어 그녀의 미모에 반한 적장이 총애하게 되는데, 애당초 조선의 명장 김응서(김경서) 장군의 애인이었던 계월향은 거짓으로 마음을 주는 척 하면서, 김경서 장군의 평양성 공격일시에 맞추어서 적장을 대취하게 만들면서 성문을 개방하여 적장도 살해하고 평양성도 수복하게 되는 결정적 수훈을 세우게 된다.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김경서 장군을 만난 계월향은 그간에 적장에게서 수모를 당한 죄책감을 사죄하면서 소피를 보러 간다며 나간 후 자결하였다 하니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긴 만해 한용훈은 그를 흠모하며 '계월향에게'라는 시를 남겼다.

 

(황진이)

 

 

 

 

하지만 우리나라 미인사를 다루며 빼놓을 수 없는 여인이 있으니 바로 황진이 이다.

 

사서삼경은 물론이요 시, 서, 음률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한다.

 

그녀의 용모는 그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한음 이덕형이 "황진이가 머문 곳에는 사흘 동안 향기가 머물러 있었다"라고 적고 있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었하리.

 

동네 총각은 황진이를 연모하다 상사병을 앓다 죽었는가 하면, 살아있는 생불이라 추앙받던 지족선사를 파계시켰다 한다.

 

그런가 하면 도도한 품성의 종실 청년 벽계수를 조롱하였으며, 중국 사신 소세양이 넋을 잃었다 하니 그의 미모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당대 최고의 지성 화담 서경덕을 흠모하여 그를 유혹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사제지간을 맺은 후, 자신 황진이와 박연폭포, 그리고 화담선생을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칭했다는 일화에 이르면 그녀의 아름다움에 저절로 매료되간다.

 

 

 

어디 이들 뿐이겠는가?

 

웅녀, 유화, 낙랑공주, 허황옥, 평강공주, 연수영(우리나라 최초의 여장군), 진성여왕, 문정황후, 신사임당, 허난설헌, 논개, 소현세자비 강씨, 임윤지당(조선시대 최고의 여성 성리학자), 명성황후 등등....

이들 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는 여성에 대한 기록에 많이 인색하여 많이 미인들이 묻혔을 것이다.

 

또한 역사속의 미인들을 열거하는데 있어, 역사적인 사실에 앞서 TV 드라마속에서 그들의 역을 맡아 했던 탈렌트들을 떠 올려 더욱 더 옛 미인들을 현대적인 미인으로 재단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선덕여왕하면 이요원이 먼저 떠오르고, 천추태후하면 채시라, 황진이하면 하지원, 선화공주하면 이보영 등등이 떠 오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속물중의 속물임에 틀림없는가 보다.

 

 

 

이렇게 한국의 미인들에 대한 기록을 챙기다 보니, 미인이란 예나 지금이나 표면적인 아름다움(외모)도 중요하겠지만 내면의 아름다움(진리의 아름다움, 선의 아름다움, 지혜의 아름다움)이야 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임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뛰어난 지혜와 덕으로 정치적, 군사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고, 예술적 재능으로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당당한 아름다움이야 말로 그들을 몇 백년, 아니 몇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미인으로 기록하고 이야기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반야탕이 나를 쓰잘데기 없는 미인타령으로 몰고 가버렸다.

반야탕은 적당히 심취해야 지혜가 샘솟는 법인데, 항상 도를 넘어 지혜가 헛소리로 바뀌니 어쩌면 좋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