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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보물(69년과 70년의 가계부)

맨발나그네 2009. 6. 26. 18:29

           우리집 보물(69년과70년의 가계부)


 우리 시골집에는 보물이 있습니다. 그 보물은 우리 아버지가 1967년부터 1995년까지 29년간 기록하신 가계부입니다. 우리 아버지 49세부터 77세까지의 기록이니 대단한 보물이라 할 것입니다. 아마도 아들 7형제를 키우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신 산물이 아닌가 합니다. 1967년이면 첫째형이 23살이고 그 밑으로 줄줄이 6명의 자식이 더 있었는데 막내는 5살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그 많은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기 위해 보였던 우리 부모님들의 고단한 삶을 더듬어 볼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이런게 부모된 자세구나 하는 생각도 갖게 됩니다. 기록을 중단하시게 된 이유도 대상포진이라는 병에 걸려 병원 입원등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이기에 더 안타갑습니다. 하여튼 이번에는 69년과 70년의 가계부를 더듬어 볼까합니다.


  1969년은  우리집에서는 큰형은 25살로 군 입대중이었고, 24살인 둘째형도 아마 십자성부대의 일원으로 월남전에 참전중이었고, 19살인 셋째형은 고3, 16살인 나는 중3, 동생인 종희는14살로 중1, 12살인 청희는 초딩5, 막내 황희는 7살이었던 때이었던거 같습니다. 아버지의 나이 51세, 어머니의 나이 48세로 지금의 내나이보다 조금 적었을 무렵인데 고등학생 이하인 자식을 다섯이나 두었고 둘째형도 대학진학중에 군입대를 했으니 그 어려움이 상상이 됩니다.


  이때의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815달러, 70년도의 국민소득은 1100달러,경제성장율은 69년 13.8%, 70년 9.4%이었구요. 국내적으론 68년 어렵게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69년 3선개헌을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시켰고, 70년 8.15평화통일선언을 발표했으며, 전태일 분신사건이 있기도 했군요. 또 69년 1월 13일 경부고속도를 착공하기도 했습니다. 하여튼 이시기 우리나라는 격동의 시기였던건만은 분명하군요. 경제성장율에서 보듯이 심각한 불황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한 우리나라는 경제위기와 함께 각종 사회적 모순이 일거에 터져나온 시기라고 사가들은 진단하더군요. 이해 69년 아폴로 11호는 달착륙을 했군요.


  아버지의 가계부는 한국경제가 어찌되던,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동생 종희의 가방및 모자 대금으로 1월 25일 550원을, 운동화값으로 150원이 들었으며, 형과 나의 1기분 공납금이 형은 4580원, 중학생인 나는 3810원이군요.

12월5일 4분기 공납금으로 형은 3600원, 나는 3200원, 동생 종희는 1620원, 10월 17일 가을 소풍으로 아마 아산 현충사를 갔던거 같은데 이때 비용은 형 1,100원, 나 800원, 동생 800원 이군요. 생필품값을 대충 추려보면, 구두약 40원, 설탕 350원, 치약 100원, 미원 280원, 미풍 270원, 마른새우 1말에 500원, 파래 1톳 100원, 국수한관 140원이었습니다. 좀 특이한 지출을 살펴보면, 8월7일 어머니 파마값으로 150원이 있던데 아마 발안장에가서 오래간만의 호사를 하셨겟지요. 12월 30일 적십자회비로 100원을 내셨고, 대체적으로 애사, 혼사의 부조금으로는 약 200~300원을 내셨더군요.  이시기 농사일 품삭이 하루에 남자 300원, 여자 200원이었으므로 부조금 지출도 거금이었을거 같군요. 그리하여 69년 총 지출액은 287,270원으로 68년의 지출액 232,323원에 비해 23%의 증가율을 보였습니다.


  1970년은 각각 1학년씩 진급을 하여, 병희형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내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을 하게 되는군요. 이해는 우리집도 꽤 다사다난 했더군요. 가장 큰일은 사랑채를 다시 지었으니까요. 작고 볼품없던 사랑채를 헐고, 이해 4월 26일부터 10월 10일까지 약 5개월에 걸쳐 총 232,000원을 투입하여 새집을 완성하였습니다. 세목별로 보면 재목 80,000원, 지붕재료 40,000원, 구들 10,000원, 대문 12,000원, 기타 20,000원 인건비 70,000원 이었습니다. 그당시 목수 일당은 700원이었습니다.  사랑채 모양은 기역자형태로 소우리, 사랑방, 대문, 헛간을 갖춘 전형적인 농가주택이었죠. 방학을 이용하여 우리집 집짓기에 도움을 준 창희, 용승이 친구에게 다시한번 고마움을 전한다. 물론 염불보다는 잿밥 때문에 먼 우리집까지 들락거리긴 했지만.............

 

  또 하나의 사건은 이해 6월 12,900원을 주고 새 자전거를 하나 구입했는데 초등학교 6학년인 6째동생이 막내동생을 자전거에 태우고 방고개를 내려오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막내의 이마가 찢어져 치료비로 5,100원이 쓰여졌는데도 불구하고, 시골병원이어서 그런지 아직도 막내는 이마에 그때의 흉터를 안고 살고 있지요. 그래도 막내는 생일날 과자를 100원어치 얻어먹는 호사를 누린 기록도 있고 소년신문대로 100원이 지출된 기록이 있는걸로 봐서 특별대우를 받은게 분명합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나는 1월 18일 입학지원서를 내기 위해 700원, 1월 26일 시험을 보기위해 400원을 타갔고, 2월 1일 입학금으로 13,090원을 냈군요. 그해말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청희(여섯째)의 아루바무(우리아버지식 앨범의 표현) 250원, 막내의 초등학교 입학준비을 위해 1000원, 종희(중2)여행경비 1,200원, 10월1일 나와 동생 종희의 동복값으로 각각 1,800원, 안현필이 쓴 영어문법책 500원, 여섯째 청희의 중학교 등록금으로 12월18일  4,370원이 쓰였습니다. 영어문법책은 발안 학우당에서 샀겠지.


  1월 28일 굴 한그릇에 200원이 있는데, 이때 지게에 지고 다니며 팔던 굴은 정말 맛있었습니다. 그러나 식구는 많고 이런 호사스런 식품에 돈을 많이 쓸수가 없었으므로 정말 쬐금밖에 맛볼수가 없었던거 같습니다. 200원이면 농부의 하루 품삭과 비슷한 금액인데 굴 한그릇이라니.....그때의 고기값은 우육 한근 400원, 돈육 한근에 200원이었고, 소주가 200원이었던데 아마도 댓병이라고하는 큰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틀이 80,000원이 있는데 아마도 아버지의 틀이인거 같고, 당연히 요즈음의 야메이겠지요..........ㅎㅎㅎ  하여간 모든 지출이 농부의 하루 품삭과 비교를 하게되면 그당시 얼마나 우리내 삶이 피팍했던지 상상이 갑니다.


  이렇게 해서 이해 1970년 총지출은 415,532원으로 69년에 비하면 거의 배에 해당하는 지출이 있었고 아마 많은 부분은 빚이었는데, 지금처럼 은행을 이용하던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그당시에는 사채 또는 장리쌀이라 불리던 형태의 대출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 가계부에는 물론 집에서 농사로 충당한 먹거리에 대한 기록은 당연히 없고, 어머니가 집에서 농사를 지은 곡식을 이용한 물물교환도 기록에 없는게 아쉽기는 하지만, 이렇게 자세하게 30여간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는 건 우리집의 자랑이랍니다.


 이번에도 타임머신을 타고 40여년전으로의 여행을 해봤습니다. 이 가계부를 쓰신 아버지가 올해 구순이신데, 대상포진으로 인한 후유증과 노환으로 건강이 안좋으신데 좀더 우리곁에 오래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2008년 6월


P.S 1969년 잡지에 난 광고들


이 자료는 정확히 1969년도 잡지에 실린 광고들입니다.

현존하고 있는 업체도 있으며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기업들도 있습니다, 그시대의 생활상을 보고자해서 올립니다

업체와는 무관함을 밝히는 바입니다..


다들 잘 아시죠? 말표신발하면 대표적인 고무신 그중에서도 백고무신...

발에 땀이나면 훌러덩 벗겨지고,1년을 꼬박 신어도 떨어지지 않던

신발이였답니다 ,종류도 다양하지요


아~ 추억의 이 껌! 황금철인, 이껌이 아이들 호주머니에 늘 상존했으며 없는

아이들은 늘 기가 죽었답니다


당시에 상당히 세련된 디자인이였지요..부호들이나 맛볼 수 있던 와인...


국내 최초로 생산된 식빵 이랍니다


국산 시계 광고입니다


어린이 영양제


이때도 할부 차량이 있었네요, 연비 리터당 20킬로미터 ,

기름 리터당 28원50전 ...


다이알 비누와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가요?

당시로서는 향기가 좋아서 세수 후 물에 행구는 것도 향기 날아갈까봐.. ㅎ


처음으로 방수 시계가 나왔지요.당시로선 획기적인 물건이었답니다


무척 가지고 싶었던 물감이죠, 모두가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던 때라~


잘아시죠 지금도 생산됩니다


무척 맛있었는데.....


영양제


과자광고


추억에 껌들이죠^^*잘때는 달력이나 벽에 붙여두고 먼저 일어난

사람이 떼어서 씹고....ㅎㅎㅎ


문구 하나 하나 보면 재미있습니다


사탕종류= 어찌나 맛있던지...


초코렛광고


사탕종류


피아노 할부 광고


부자집 아이들이나 신던 타이즈/스타킹이였죠


크레용 광고입니다


만화 그림이 그려진 신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답니다

음료수 광고입니다,앞 전편에 보면 용어가 콜라가 아닌 "코라! 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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