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는 전라북도 중앙에 위치한 도시(都市)로서 고대 마한의 원산성(圓山城)에서 유래하며, 백제 때는 완산, 비사벌 등으로 불리었고, 신라 진흥왕 18(557)년에 완산주로 되었으며, 그 후 경덕왕 15(756)년에는 완산주의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전주로 고쳤다. 신라 효공왕 4(900)년에 견훤이 후 백제를 세워 40여 년간 이곳(완산주)을 도읍지로 하였고, 고려 태조 19(936)년에 태조가 이곳을 점령하여 안남도호부라 하였으며, 태조 23(940)년에 전주로 되었다.

  그 후 승화절도안무사, 전주순의군절도사, 안남대도호부, 전주목(全州牧)을 거쳐 공민왕 4(1355)년에 완산부로 되었다. 조선시대 태조 즉위(1392)년에 선조(先祖)의 고향이라 하여 완산부로 개칭하였고 태종3(1403)년에 다시 전주부로 되었으며, 여러 번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전주시로 개편되었다.

  전주류씨 최초의 족보로서 1652년에 발간한 임진보(壬辰譜)의 시조(始祖) 기록에는 문화류씨로부터의 분관설이 기록되어 있으나 4번째로 1876 년에 발간한 "병자보(丙子譜)"에는 "문화류씨분관설(文化柳氏 分貫說)"의 잘못을 논증한 "전주류씨보계변증(全州 柳氏譜系辨證)"을 수록하고 있다.  

  이 문헌에 의하면 시조(류습) 이전에도 전주류씨가 있기 때문에 전주류씨는 문화류씨로부터 분관(分貫)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려 광종23 년(972년) 문과에 합격한 류방헌(柳邦憲. ?∼1,009), 후에 국자감시에 합격한 류광식(柳光植, ?∼1,221)은 전주류씨이며, 또한 문화류씨 시조와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서 고려 왕건의 장인인 류천궁(柳天弓)은 문화류씨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5번째로 1924년에 발간한 갑자보(甲子譜)에는 먼저 족보에 수록된 "전주류씨보계변증"의 잘못을 지적하는 "전주류씨보계변증문반증"을 수록하여 전주류씨는 문화류씨로부터 분적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주류씨 시조의 상계(上系)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한 문헌조사가 필요하며, 또한 전주류씨는 혼(渾). 습(濕), 지(池) 3파가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도 그 근원의 연구가 필요하다.

  시조(始祖)는 슬하에 5남1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극강(克剛), 둘째 아들 극서 (克恕), 넷째 아들 극제(克濟) 및 사위 심효생(沈孝生)은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셋째 아들 극수(克修)와 막내아들 극거(克渠)는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세 아들이 문과에 급제를 하면 나라 법에 따라 벼슬을 주게 되어있어 시조는 봉정대부 사헌부 장령(掌令)에 추증되고, 완산백(完山伯)에 추봉(追封)되었으며, 또한 시조비(始祖?)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따라서 가문(家門)이 크게 일어나 후손들이 류습(柳濕)을 시조(始祖)로 하고 전주(全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전주 류씨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려문과방목 해동용방의 판관공(류극제) 성함 아래에 기록된 전주는 전주를 본관으로 하기 전이므로 거주지가 맞는 말이다.

편자주) 박천식의 박사학위논문 "조선건국공신의 연구"에 의하면 "시조의 큰 아들(류극강)은 개국공신 "이백유"의 고모부이고 둘째아들(류극서)는 원종공신 "하륜"의 매부이다. 또한 시조의 사위(심효생)는 딸을 세자(방석)에게 출가시키므로서 외척공신이 되어 부인 류씨(시조의 따님)는 정경옹주가 되었다. 따라서 정경옹주의 친정 부친인 시조(류습)는 장령 완산백으로 추증된 것으로 보인다"라 하고 있다.    

  시조 습(濕)의 아들 5형제 중 둘째인 극서(克恕)는 고려 말기에 중정대부(中正大夫)로 보문각 직제학(寶文閣 直提學)과 지제교(知製敎)를 지내고, 그의 아들 빈(濱)은 조선 초기에 영흥부사를, 손자 의손(義孫, 회헌공)은 세종 때 예조참판을, 회헌공의 형 경손(敬孫)은 해주 판관을, 말손(末孫)은 순창군수를 거쳐 사헌부 집의를 지냈다. 판관(경손)의 손자 숭조(崇祖)는 18년간 성균관에 재직하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집의(말손)의 셋째 아들로서 회헌공의 양아들이 된 계동(季潼)은 충무위 부사직을 역임하였고 큰아들 식(軾)은 인천부사 를 지내고, 막내아들 곡(?)은 전라도 고산 현감에 부임하여 고산현 율곡에 있는 시조묘소에 5대봉사(奉祠)의 차비를 차려 시조와 시조비를 모시니 오늘날 많은 자손들의 조상숭배에 귀감이 되었고 부사의 아들 윤덕(潤德)은 중종 때 예조 참판을 지냈다. 집의(말손)의 손자 헌(軒)은 간신배의 방자함을 탄핵하는 상소(上訴)를 올리자 화가 난 연산군이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사간원을 없애버리니 연산군(燕山君) 시대의 마지막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헌)의 아들 세린은 기묘사화 때 성균관 유생을 이끌고 조광조를 구제 하는 상소를 하였으며, 증손 영길은 예조참판에 이르렀고 그의 아우 영경은 정유재란 때 공을 세워 전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한편 묵계공(류복립)은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로서 임진왜란 때 진주성 을 지키던 외숙 경상 우감사 김성일의 부름을 받고 그 곳으로 달려가 참모 역 할을 하면서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김성일 병사 후 성을 사수(死守)하라는 유언에 따라 충청병사 황진, 의병장 김천일 및 고종후 등과 함께 진주 성을 지키다 성이 왜적(倭敵)에게 함락되어 함께 순절하여 정려(旌閭)가 내려 지고 진주 창렬사에 배향(配享)되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크게 공을 세운 조생(肇生)은 청난 및 선무원종공신이 되어 부친, 아들, 손자 4대가 봉군(封君)의 교지(敎旨)를 받았다. 인조 때 전창위(全昌尉)에 봉해진 정량(廷亮)은 사은사, 진향사로 청나라에 3번 다녀왔고 도총관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심(?)은 참판에 이르러 전창위를 물려받고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능했다.

  인조 1년(1623년)에 알성급제한 영성의 셋째 아들 질(秩)은 병자호란 때 철원부사로서 청병과 맞서다 살해당했으며, 청백리에 오른 경창(慶昌)은 광해군 때 사마에 오른 뒤 정랑, 관찰사를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다. 영조 때 대사간을 지내고 제자백가와 천문에 정통한 정원(正源)은 병률(兵律)과 도학(道學)에 능통하여 삼산문집(三山文集)과 하락지요(河洛指要)를 지었다. 영순(永詢)은 경상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전주류씨 2세인 직제학공(류극서)의 실전(失傳)된 묘소를 찾아 묘비를 세웠고, 영변부사를 지낸 정양(鼎養)은 문장이 뛰어나 여러 문중의 비문을 지었다.

  정조 때 순관지(春官志)와 영희전지(永禧殿誌)를 편찬한 의양(義養)은 승지가 되어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수찬(修撰)에 참여하여 문명(文名)을 떨쳤고 홍주목사로 선정을 베푼 의(誼)는 대사헌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에 완(玩)은 고종 29년(1892년)무과에 급제하여 참령(參領)으로서 대대장을 하였고 정(珽)은 고종30년(189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校理)를 지내었다.

  일제(日帝)시대에는 홍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자 3·1운동 때 동대문 밖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인 준근(濬根)과 유림(儒林)의 재산을 모아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하고 또한 조선교육협회 등을 조직하고, 신간회의 안동지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된 인식(寅植)이 가통을 이어 전주류씨를 더욱 빛내었다.

  한편 언론인이며, 교육자이며, 애국계몽운동가인 근(瑾)은 구한말에 탁지부(度支部) 주사(主事)를 하고 광무 2년(1898년)에 장지연, 남궁억 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으며, 5대 황성신문사장이 되었다. 그 후 대종교(大倧敎)와 광문회(光文會)사업에 종사하였고 몇 개의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고,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때는 양기탁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가 이듬해 5월 별세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 되었다.

  독립운동가인 임(林)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활약하였고, 영(瑛)은 해방후 대법관을 지냈으며, 기수(驥秀)는 대한잠사회 상무이사, 용인군 제2대 국회의원을 하였고, 치송(致松)은 제6, 9, 10, 11, 12대 국회의원을 하고 민주한국당 총재를 지내었다. 청(靑)은 전주고등학교장을 거쳐 제4, 5, 6, 8대 국회의원을 하고 전주류씨 문중에서 운영하는 유일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기정(琦諪)은 제8, 9대 국회의원, 중소기업협동조합회장을 하였다. 전주류씨는 1360년경에 관향(貫鄕)인 전주에 터를 잡아 살았으며, 대를 거 듭할수록 크게 번성하여 점차 인근으로 세거지(世居地)를 확대해 나가 그중 일 부는 관직을 따라 서울과 파주, 의정부, 광주, 이천, 용인 등 경기지역으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한편 영의정 영경(永慶)이 무신정변에 휘말려 일족이 화가 미치자 장단, 평창, 음성, 임실, 진주 등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고 강원감사를 지낸 계번(季潘)의 일부 자손들이 임진강변과 황해도, 강원도 내에 널리 퍼져 살게 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주류씨는 남한에 11,365가구, 47,38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도 용인시 관내에 살고 있는 전주 류씨는 대부분이 묵계공(류복립) 자손으로서 최초 세거지(世居地)는 용인시 양지면 송문리 반정(盤亭)마을 "당골"이며, 점차 용인시 마평동, 운학동, 남동 등으로 퍼져 살게 되었는데 1970년대 이후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일부 자손들이 고향을 떠나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참고문헌 [류승추술] [증보문헌비고] [디지털한국학] [족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