家門의 영광

전주류씨 상계의 연원

맨발나그네 2009. 12. 23. 15:34

전주류씨 상계의 연원

 

1. 문화류씨 족보

   가. 문화류씨세보 고종원년(1864년)

       문화류씨세보소에서 발간한 "문화류씨세보"에는 문화 류씨 10세 양재(良梓) 아래에 "전주류씨 족보에 의하면 방직(邦直)과 운(橒) 양대는 시조 위에 기록하고 이 상계는 문화로부터 나왔는데 고려 대승공 차달의 후예인데 불행이 실전되어 류습에 이르러 전주로 옮겨가 그 읍호를 관으로 하고 자손들이 류습을 시조로 삼았다. 또 직제학공 묘갈에 운(橒)은 시조의 부친 이고 우측 2대는 족보 맨 머리에 기록하여 후세에 대비하노라고 하였다. 그리고 영의정 류영경의 증손 감사 류심이 만든 족보 서문에 대승공이 유주에서 일어 나고 장령공은 전주에서 일어났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이것은 1652년에 만든 전주류씨 최초 족보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나. 문화류씨파세보 1917년 류진영(柳瑨永)

       "문화류씨파보"에는 10세 방직 아래에 "전성군(류양재) 후손 영의정 류영경, 감사 류심"이라고 적혀 있다.

   다. 문류씨세보 1926년 류명열

       문화류씨대동보소에사 발행한 "문화류씨세보"에는 문화류씨 10세 전성군(류양재) 아래에 역시 1864년에 발간한 문화류씨세보와 같은 내용을 인용하고 또 쓰기를 아들 방직(제도도부승) 아들 운(국자생원)이라 쓰여있다.

   라. 종덕지 1923년

      류씨종무소에서 발행한 "종덕지(鍾德誌)"에는 10세 양재(良梓) 아래에 "전주 류영봉과 류광호 집안의 옛 족보에 이르기를 양자의 아들은 방직(邦直)이고 방직의 아들은 운(橒)이며 운의 아들은 혼(渾), 습(濕), 지(池)인데 류영봉은 혼의 후손이고 류광호는 지의 후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2. 전주류씨족보

    1652년에 발행한 전주류씨의 최초 족보인 임진보 서문에는 "우리 성씨는 신 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러 대승공(류차달)께서 문화(유주)에서 일어났고, 장령공 (류습)에 이르러 완산의 전주류씨로 그 자손이 크게 번창하였 다"라는 기록이 있 고 또한 발문에는 "류의 씨를 받음이 처음에는 문화의 고려 대승공 차달로부터 이니 이분이 비조가 되시나 족보를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은 실전되어 능히 계대 를 잇지 못했기 때문인데 시조 장령공께서 관(貫)을 전주로 옮겨 자손이 그로 인하여 가문을 이루었다."라는 말이 있다.

  고종13년(1876년)에 4번째로 발간한 병자보의 서문에는 "종중에서 박식(博識)하고 고사(故事)에 밝은 분들이 문화와 진주류씨 족보 및 다른 성시 족보에 여러 가지로 나오는 문헌을 살펴보니 문화류씨로부터 분관되었다는 설은 잘못되어 가히 믿을 수가 없다"란 말이 있다. 또한 "전주류씨보계변증(류병문)"을 수록하여 전주류씨는 문화류씨 계열이 아니라고 변증하고 있다.

  그러나 전주류씨의 5번째 족보인 1924년에 간행된 갑자보 범례에는 "류병문" 선조가 지은 변증문은 매우 애매모호한 고로 잘못된 것을 "류영희"가 옛 족보를 바로 잡아 고쳤다고 기술하고 또한 전술한 변증문을 반박하는 "전주류씨보계변증문반증(류영희)"을 수록하여 전주류씨는 문화류씨계열이라 하고 있다.

3. 고려사, 야후백과사전, 디지털한국학, 증보문헌비고의 전주류씨

    고려사 열전 제6에서 고려의 문신인 류방헌(柳邦憲, 944∼1009년)은 "전주 승화현 사람(全州承化縣人)"이라 하였고 야후백과사전과 디지털한국학(www.koreandb.net)에서는 "본관이 전주"라 했으며, 또한 류광식(柳光植, ?∼1221년)은 고려사 열전 제 14에서 "전주 사람(全州人)"이라 하고 야후백과사전에서는 "본관이 전주"라 하였다. 디지털 한국학에서는 본관이 전주인 류능(柳能, ?∼1258년)은 평장사 류광식의 손자이며, 평장사 류소(柳韶)의 아들이라 하였다.

  디지털한국에서 류신(柳伸, ?∼1104)은 본관(本貫)이 전주(全州)라고 기술되어있다. 증보문헌비고 제계고 부록 씨족3 류씨편에서 전주류씨는 시조가 류습인데 완산백에 봉해졌다고 하였고, 문화류씨 편에서는 류언침(柳彦沈)의 다섯 째 손자인 류양재(柳良梓)가 전성군(全城君)에 봉해지고 전주(全州)로 분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4. 전주류씨

   고려사에 나오는 류방헌(柳邦憲)은 전주 승화현 사람(全州承化縣人)이라 하고 류광식(柳光植)은 전주사람(全州人)이라 했는데 이것이 전주(全州)가 본관(本貫)이란 말과 같은지는 알 수 없으나 야후백과사전과 디지털한국학에서는 이들의 본관이 전주(全州)라 했으니 이것이 맞는다면 전주류씨는 고려초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나 이분들과 장령공(류습)사이에는 세계(世系)가 이어지지 않는다.

   한편 영흥공(류빈)이 합격한 문과방목(확인이 필요함)에 전주류씨라 기록되어있어 고려말에 전주의 관향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1652년에 발행한 전주류씨의 최초 족보인 임진보 발문에 "족보를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은 실전되어 능히 계대를 잇지 못했기 때문인데 시조 장령공께서 관(貫)을 전주로 옮겨 자손이 그로 인하여 가문을 이루었다."라는 말이 있어 고려 말에 전주류씨의 관을 가지게 된 것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전주류씨는 장령공(류습)을 시조로 하는 자손 말고도 혼(渾)과 지(池)의 자손도 전주류씨이다. 따라서 시조 선계(先系)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많고 현 시점에서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없으므로 문화류씨로부터의 분관설(分貫說)을 부인(否認)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으며, 좀더 많은 자료를 수집, 연구하여 고증(考證)할 필요가 있다.

  운영자 주)

  문화류씨로부터의 분관설 여부(與否)에 관한 문헌은 이 홈페이지에서 좌측 하단의 "여기"를 클릭하면 좌측 상단에 "문화류씨분관문헌"과 "토성전주류씨 문헌"이 나오는데 전자에는 전주류씨가 문화류씨로부터의 분관과 연관되는 문헌을, 후자에는 전주류씨가 문화류씨와 관계없는 토성 전주류씨와 연관되는 문헌을 각각 모아 수록하였다. 앞으로 계속 이러한 문헌들을 수집하여 연구한다면 어떠한 결론을 얻으리라 생각된다.

  문화류씨 10세 원비(元庇)의 자손으로 알려진 선산류씨는 근래에 시조 선대의 세계(世系)를 나타내는 원비의 호구단자(戶口單子)가 발견되었다 하여 그 시조선대(始祖先代)의 세계(世系)를 문화류씨와 다르게 족보를 발간하여 문화류씨 계열이 아니라 하고있다.

  따라서 우리 전주류씨도 문화류씨 계열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자면 선산류씨와 같이 시조선대(始祖先代) 세계(世系)를 나타내는 문헌을 찾아내야 한다. 더군다나 전주류씨는 혼(渾), 습(濕), 지(池) 3파가 있다. 최근 혼(渾)파에서는 류기휴(柳基休)를 1세로 하여 고려사에 나오는 류방헌, 류광식, 류소 등을 선계(先系)로 하는 전주류씨 호은공파(壺隱公派) 족보를 발간한 바 있는데 시조 혼의 선대 2대(代)를 이름도 없이 실전(失傳)으로 하였기 때문에 선대를 꿰어 맞춘 인상을 주고 있다.


참고 [전주류씨 묵계공파 홈 류기송님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