家門의 영광

류차문제와 뒤틀린 가문의식: 그 전개와 전망

맨발나그네 2009. 12. 23. 15:31

류차문제와 뒤틀린 가문의식: 그 전개와 전망

- 채하 류주환 (彩霞 柳朱桓)

 

1. 시조의 성이 바뀌다니

 

2004년 연안차씨(차문) 대동보가 발간되자 문화류씨 문중(류문)은 쑤신 벌집처럼 흥분했다. 바로 그곳에 명시적으로 류문 시조인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이 성씨도 이름도 모두 갈려 차해(車海)라는 이름으로 등장해버렸기 때문이다. 차문에서는 류씨를 가성(假姓) 혹은 모성(冒姓) 류씨, 곧 가짜 성이라고 부르면서 친절하게도, 대승공의 아들 좌윤공(佐尹公) 류효금(柳孝金)부터는 진짜 류씨이고, 대승공과 계보 상 그 위에 있는 다섯 분의 조상, 곧 전부 6대의 류씨들만 가짜 류씨라는 설명까지 곁들였다.

이런 주장의 속에는 이런 꾸민 이야기가 숨어 있다. 곧, 대승공을 포함한 6대가 원래 차씨였는데, 화를 피하기 위해 임시로 류씨를 빌려 세상을 속이며 가짜로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려태조 왕건이 대승공 집안의 도움을 받아 전쟁에 이기고 나서 고마워서 전공을 크게 세운 맏아들에게 너는 장하니 다시 예전 차씨를 다시 쓰라, 하고, 동생은 어리고 별 볼일 없었지만 그래도 한참동안 집안이 가짜 류씨로 행세해왔으니 버리기 아깝다, 그러니 너는 지금부터 정식으로 그 류씨가 되어서 문화류씨 시조가 돼라, 하고 자상하게 처분해주었다는 식의 이야기이다. 차문에서는 머리를 더 굴렸다. 그러면 왕의 하사해준 것이 아니면 다 가짜 성인데(사실 아님), 대승공과 그 위의 성씨에 대해서는 뭐라고 했더라? 별말이 없었던 것 같긴 한데, 에라 한문을 억지로 해석해서 대승공도 차씨로 하라고 했다고 우기자. 그러면 그 위는 가짜 류씨들이었으니 다 자동으로 차씨로 바뀌는 것이 옳겠지.

이런 꾸며진 이야기를 4백 수십 년 동안 잘 믿어왔던 류씨들이 시조를 모독하니 그것만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실은 그럼에도 2004년까지 류씨들은 최소한 몇 년 동안은 꾸벅꾸벅 졸고만 있었다. 2001년에 차문에서는 이미 대전 뿌리공원에 유래비를 세우면서 "가성(假姓) 류씨(柳氏) 6세[필자 주: 류씨를 쓰기 시작한 후 6대째를 의미]인 류해(柳海)", "둘째아들 효금(孝金)은 류씨의 시조가 되었다" 같은 문장을 넣어서 명확히 공격의 칼을 꺼내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동보의 편수를 전후하여 인터넷 홈페이지, 종보(宗報), 각종 서적 등을 통하여 대대적으로 대승공의 성명을 바꾸는 창씨개명의 일을 자행한 것이다.

 
2. 류문의 대응

2004년 류문의 종보인 "유주춘추"(2004년 4월)에 차문의 가성류씨 주장에 대해 항의를 하는 글(류두열(柳斗烈))이 실렸으나 "차원부설원기"와 원파록을 그대로 인정하는 바탕으로 해석상의 문제만을 지적한 것이었다. 한편 같은 종보에는 당시 대종회 총무였던 류익환(柳益桓)씨의 문화에 관한 고찰을 하는 글 가운데서 설원기와 원파록을 비판하면서 가성류씨 주장이 어불성설임을 밝히고 있는데 아직 직접적인 주제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그 후 류문에서는 본격적으로 차문의 주장의 근거를 파악하기 시작했고, 모든 것이 원파록과 설원기에 연유함을 알아냈다. 그 결과 (1) 설원기와 원파록을 배척하고, (2) 차씨가 대승공의 후손이 아님을 선언하고, (3) 차문에 시조 모독을 포함한 기만행위들을 중지하고 사과할 것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대종회장과 14개 파종회장 전체의 명의로 결정되어 2004년 8월 11자 공문으로서 당시에 존속하고 있던 차류대종회에 전달되었다. 그때까지도 차류대종회는 차문과 류문이 모두 참여하는 단체였기에 그런 중간역할을 할 단체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차문에서는 물론이지만 류문의 일부 사람들도 그동안 수백 년 이상을 류씨와 차씨가 형제집안으로 알고 지내왔고 차류대종회라는 단체까지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해온 상태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아무런 문제의 해결 없이 단지 사태를 넘겨보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설원기와 원파록은 탐구하면 할수록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필자가 몇 개월의 연구조사를 바탕으로 "차원부설원기 비평"과 "문화류씨 선계(先系) 고찰"을 발표한 것이 그 즈음인 2005년 1월 중의 일이었다. 전자의 글에서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들과 설원기 자체의 기술들이 합치하는지, 설원기 자체의 내부 모순은 없는지를 중심으로 설원기를 비평했고 그 결과 차원부설원기가 저자를 참칭해서 조작해낸 '믿을 수 없는 문헌'임을 밝혔다. 후자의 글에서는 원파록이 몇 부분의 문헌을 근거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주된 근간은 역시 설원기이며, 설원기가 위서(僞書)로서 배척되고 다른 문헌들도 그 원형도 알 수 없을뿐더러 그 주장들에 근거가 전무하여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원파록 또한 전체가 믿을 수 없는 기록임을 밝혔다. 각종 문헌을 두루 섭렵하여 상세하게 작성된 이 글들 중 류차문제에서 더 비중이 큰 "차원부설원기 비평"은 2005년과 2006년 "유주춘추"에 약간의 형태를 달리하면서 실렸고 차문의 주장을 물리칠 수 있는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근거를 제공하여 많은 종원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3. 객관성의 확보와 류차관계의 해소

그러면서 실상 차원부설원기를 비평한 인물들이 조선시대에도 있었고 현대의 역사학계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필자는 2007년 3월에 그 한 달 전에 학술지에 실린 학술논문 한 편을 소개받았는데 그것이 바로 영남대에서 평생 성씨 연구를 행했던 이수건 교수의 유고(遺稿) 논문이었다. 제목은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조작"이었고, 제목의 주제의 대표적인 예로서 "차원부설원기"를 들면서 그 문헌이 위작이라고 단언하며 그 위작자, 위작시기, 위작동기, 위작내용 등을 명백히 밝히는 내용이었다. 이 논문을 바로 대종회에 소개했고, 대종회에서는 그것을 다시 종원들에게 널리 배포했다. 그 결과 머리로 믿게 된 차씨는 대승공의 자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가슴으로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논문은 후에 문화류씨 대동보(2008년)에도 그대로 실릴 만큼 중시되었다. 그 후로도 고려대에서 가르치는 김난옥 박사의 논문도 나와서 설원기가 위작임을 논증했고, 이미 조선시대에 남극관(南克寬), 황윤석(黃胤錫), 이선(李選), 홍계희 등의 인물들이 설원기가 위서임을 간파했음도 명확히 알게 되었다. 이들은 설원기를 '더러운 위작'이라는 내용의 표현까지 썼다.

한편 이수건 교수는 2007년의 논문과 내용적으로 유사한 논문을 1998년에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의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낸 것이 확인되어, 이 교수의 연구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고, 또한 2003년에 나온 저서 "한국의 성씨와 족보"(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는 설원기를 직접적인 대상으로 다루진 않았지만 수차례에 걸쳐 그것이 위작이고 위서임을 거듭 명시하고 있었다.

2007년 5월에는 드디어 더 이상 의미 없게 된 차류대종회가 해체되었고 장학재단도 해체되어 문화류씨 단독의 재단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2008년은 여러 모로 류차문제에서 결정적인 해이다. 바로 류씨와 차씨가 완전 별개임을 선언한 문화류씨 대동보인 무자보가 발간된 해이고, 뿌리공원에 문화류씨 유래비가 세워지고 그 안에 명시적으로 같은 내용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실로 몇 십년만의 류릉의 방문을 통해 차씨들이 류상운 선조께서 대승공의 성을 "류차"라고 불렀다는 망발을 일거에 깨뜨릴 수 있었다. 여기에 필자는 다음에 언급할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차원부설원기의 공식적 부정도 넣고 싶다.

 
4. 진실의 전파

필자는 그 후 설원기의 연구나 차문에서 주도한 설원기의 국역에 관련되었거나 혹은 기타 어떤 식으로든 설원기와 관련된 개인 및 단체들을 찾아 설원기의 실상을 알리는 노력을 해왔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국학중앙연구원"(구 정신문화연구원)이다. 이곳은 권위 있고 인터넷의 대형 포털 사이트들에서 사용하고 있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편찬한 곳이다. 그런데 이 사전에서는 "차원부" 및 관련 항목들이 검색이 되고 그것들은 차원부설원기에 입각한 설명들을 하고 있다. 일반인들은 국사사전에도 나오는 것을 누가 믿지 않을 것인가. 그래서 이것을 수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판단하고 "차원부" 및 관련 항목들을 삭제 내지는 정정해달라는 장문의 요청서를 연구원에 송부했고, 드디어 2008년 8월 6일자 공문으로 필자의 요청을 모두 수용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다만 현재 개정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 작업이 2011년에 완성된다고 했다. 이 공문은 바로 "차원부설원기"의 사망선고라 평가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보내온 공문(일부). 이로써 위서 "차원부설원기"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음.]

다른 것은 한국 사학계의 중진이며 정도전 연구에 권위자인, 서울대에서 정년퇴직하고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 한영우 교수이다. 한 교수는 자신의 저서 "정도전사상의 연구"의 앞부분에서 설원기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정도전 가계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했고 한 교수는 2008년 7월 19일에 설원기가 "위서가 확실하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밝히는 답장을 보내왔다.

설원기 국역을 축하해준 작가이며 컬럼니스트인 김제영 여사에게도 연락해서 설원기가 위서임을 인정한다는 답변을 들었으며, 국역에 발간위원회의 위원으로 이름을 올린 홍일식 박사(전 교려대학교 총장)에게도 연락해서 병환으로 인해 그 비서를 통해 사안을 인지하고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번역 자문을 해준 강원대의 철학과의 고재욱 교수는 그런 문헌인지 몰랐다며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륜의 진주하씨 문중의 몇몇 분에게 하륜이 설원기에서 얼마나 그릇 매도당하고 있는지를 일찍이 전언했는데, 더 이상 논의를 나눌 문중의 주체는 찾기가 어려웠다. 대신 박팽년 선생의 순천박씨종친회와는 여러 차례의 대화를 통해 박팽년 선생이 설원기의 저자로 참칭되고 있음을 알렸고 박씨 문중에서는 검토 끝에 동의한다는 연락을 해왔다. 재미있는 사실은 1998년의 설원기 국역 시 차문에서는 순천박씨종친회장까지 발간위원회 고문으로 끌어들인 점인데, 필자는 그렇게 끌려들어간 순천박씨는 그 선조인 박팽년 선생에게 부지불식간에 얼마나 큰 불효를 행한 것인가를 생각할 때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 문중에 연락을 해서 차문에 박팽년 선생의 참칭을 중지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길 권했는데, 문중간의 싸움으로 비화할 것을 걱정한 탓인지 그에 대한 대답은 아직 받지 못하고 있다. 조상이 위서에 참칭되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보다도 더 큰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필자의 좁은 소견 탓일까.

이런 맥락에서 아직도 진행 중인 사안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문헌 해제의 정정이다. "차원부설원기"는 그동안 여러 이름으로 출간되어온 카멜레온 같이 종잡을 수 없는 문헌인데다 위서인데 문헌의 해제라는 것은 대개 그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라서 해제를 읽는 사람이 그 내용을 사실로 오인할 소지가 크다. 그런 해제를 제공하는 기관이 권위 있는 곳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런 일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사이트에 "차문절공유사" 해제를 쓴 것으로 나와 있는 황재문 교수(서울대학교 연구교수)에게 연락을 취했는데 자신들은 역사학계에서 내리는 평가 같은 것을 함부로 내릴 입장이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문을 제시했더니 현재는 규장각에서 근무하고 있지 않기에 어렵지만 기회가 된다면 그런 내용을 반영하겠다고 전해왔다. 규장각 자체에는 그 추이를 봐서 접근할 예정으로 있다. 하나의 예를 만든 다음 다른 많은 도서관 등지에 연락해서 비록 책 내용을 그 자체로 소개는 하더라도 최대한 설원기가 위서임을 명기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안은 설원기를 찍어냈던 목판에 관한 것이다. 그중 하나가 200년이 좀 넘은 것이라 하여 전남도의 지방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 필자는 목판으로서의 가치가 그 위서 자체의 해악을 상쇄할 만큼 크지 않다면 문화재지정에서 해제하도록 민원을 제기한 상태이고 현재 처리가 진행 중이다. 근본적으로 전문가들로 구성되는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사항이기 때문에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 문화재는 국가나 지방단체의 재정지원도 받기 때문에 지정 해제 요청을 차문에서는 심각한 상황으로 인식해서 대책회의까지 했다는 후문이다.

주간동아 2005년 12월 6일자(통권 513호)에서 "'杜門不出' 두문동 72賢을 찾아서. 7. 연안 차씨와 차원부"에는 말미의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차원부설원기를 그대로 옮긴 기사가 실려 있다. 이에 대해 주간동아와 작가에게 설원기가 위서임을 지적했고 나아가서 두문동 72현이라는 개념 자체가 말 그대로 연관성이 별로 없는 72명(실제는 숫자도 110명이 넘음)을 묶은 성립할 수 없는 개념임을 밝혔다. 주간동아는 한 발 빼고 아무런 반응이 없고 대신 작가(컬럼니스트 허시명)는 충분히 연구하지 않고 작성된 기사이며 차문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는 고백을 해왔다.

 
5. 차문의 역사 왜곡은 현재 진행형

이 시점에서 차문의 교지(敎旨)와 차성묘(車城墓)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우선 교지라 하면 왕이 일정한 품계 이상의 벼슬이나 시호 등을 내리는 임명장이다. 그런데 차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교지를 족보와 각종 서적에서 선전하고 있다.


차문에서 위조한 교지(敎旨)

이 교지에는 차원부에게 벼슬들을 증직(贈職)하고 있고,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내린다고 쓰여 있고, 시호의 해설이 주어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날짜이다. 바로 경태7년(세조 2년, 1456년) 5월이며, 6월 2일의 사육신 변고 직전의 시기이며 위서(僞書) 설원기의 작성날짜로 조작된 바로 그 시기이다. 한편 "일성록(日省錄)"은 일차적 왕실 사료로서 조선왕조실록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된다. 이 "일성록"의 정조 10년(1786년) 9월 7일, 정조 11년(1787년) 2월 6일, 그리고 정조 12년(1788년) 4월 4일의 3년에 걸친 세 번의 기사에서 차원부에게 시호를 내려주길 요청하는 상언(上言: 왕에게 올리는 글)에 대하여 정조와 해당 부서는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태조에서 세조까지 역대 왕들이 차원부 및 그 설원에 큰 관심을 갖고 실제 설원을 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모두 거짓임을 의미할뿐더러, 더욱 명명백백하게 시호를 내린 적이, 곧 교지가 내린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 나아가서 이것은 저 교지가 위조되었음을 증명한다. 이 위조는 심각해서 차문에서는 이것이 위조가 아님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심각한 도덕적 타격을 받을 것이다. 곧 과거에 조작된 설원기의 경우는 누군가 조작한 사람 때문에 자신들도 지금까지 속았다는 변명이라도 꺼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교지는 최근의 조작임이 확실하기에 현재의 조작의 주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교지 못지않은 또 하나의 이슈는 차성묘(車城墓)이다. '차성'은 부산 기장의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오는 별칭인데, 그곳에 큰 무덤이 하나 전해져 오고 있다. 차문은 18세기 이전의 어느 시점에 그 지명을 주목하고 견강부회를 했다. 바로 그 무덤을 대승공의 꾸며진 6대조인 차건신(車建申 혹은 차건갑)의 무덤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그리고는 신라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를 꾸며냈다. 차건신이 신라의 높은 벼슬을 한 신하로서 40대 애장왕(哀莊王, 재위 800-809)의 섭정을 하다가 죽어 왕의 예로 기장에 장사지내서 그 고을을 '차성'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차씨는 "고려사"에 처음 등장했고 신라시대까지 그 어떤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다. 섭정이라면 왕의 대리자로서 왕에 버금가는, 또는 경우에 따라 그 이상 가는 권력자이니, 실제 그런 인물과 사건이 있었다면 사서에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차성'이라는 명칭의 유래를 보면 이미 경덕왕 16년(757년)에 전국의 지명을 한자화할 때 생겨난 지명이며, 그 뜻 역시 한문의 차(車)자와는 전혀 무관한 우리말의 한자화일 따름이다(車 = '수리'). 실정이 이런데도 차성의 車자에 가공인물 차건신의 車자를 견강부회하여 '차릉'이라고까지 부르고 있다. 설원기에서 대승공 류차달의 車자 때문에 차효금을 견강부회시킨 것과 동일한 맥락이어서 흥미롭다.

차건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이 차승색(車承穡)으로서 이 역시 벼슬이 높았고 어린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헌덕왕(憲德王, 재위 809-826)을 암살하려고 시도하다 발각되어서 구월산 지역으로 도망쳐 류씨로 가짜 성을 붙이고 이름도 '색'으로 바꾸어 '류색'(柳穡)으로서 최초의 류씨가 되었다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 인물도, 당연한 얘기지만, 그런 대단한 인물이고 그런 대단한 일을 벌였다는 증거가 아무런 사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국사편찬위원회가 공문(2008. 11. 27.)으로 확인한 사항이다.

 
6. 뒤틀린 가문의식의 발로

차문에서 시작된 역사 왜곡은 이미 1619년에 류몽인(고흥류씨)이 썼다는 차식(車軾: 차천로의 부)의 신도비명에서 그 큰 싹을 보이고 있다. 묘비명의 성씨 내력은 대개 해당 집안에서 제공하는 것을 기초로 작성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신도비명에서는 대승공은 일언반구도 없고 일찍이 고려 금석문에서부터 대승공이 세운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공적을 차문의 시조라는 차효전이 혼자 세운 것으로 몇 백 년 후에 기록하고 있다. 설원기가 조작된 것으로 판단되는 시기가 대략 1580년 전후이다. 위서 설원기에서조차 차마 대승공을 배제할 수 없어 대승공과 차효전이 같이 공을 세운 것으로 조작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면 불과 30여년 후에는 아비의 공까지 모두 가로채고 있는 것이다.

이수건 교수도 김난옥 박사도 모두 한미한 가계를 높이려는 그릇된 가문의식에서 설원기가 나왔다고 설파하고 있고, 그런 심리적 계기를 차식, 차천로, 차운로 3부자의 재주에 비해 낮은 관직에 대한 불만, 그리고 특히 차천로와 차운로의 부정과 패악함 등을 들고 있다.

실제 실록에는 차천로의 과거 부정(1586년)과 그로 인한 유배를 언급하고 있고, 차천로가 과거 때 본관을 적지 않아 문제가 된 일도 거론되며(1596년), "어리석고 용렬"하고 "거칠고 야비한 행동을 많이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직책에서 파직되곤 했다(1601년, 1602년). 더구나 한번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종실(宗室)의 여자에게 장가들었는데, 처가 있으면서 또 처를 들인 행위가 되었기에 기강을 무너뜨린 짓이었고 뒤의 처는 아내가 될 수 없는데 왕실 계보에 아내라고 임의로 올려 선조임금도 "지금 차천로의 행위는 너무도 풍속을 해치고 윤리에 어긋나는 것"(1606년)이라고 탄식할 지경이었다. 계속 차천로는 사치스럽다, 아첨한다, 행실이 형편없다는 등의 묘사가 계속된다. 오랜 후에 1792년 정조 때의 실록 기자는 그가 글재주가 뛰어났으나 "집안이 미천하고 관직이 현달하지 못하여 그의 시(詩)도 또한 오래 전하지 못했었다."하고 종합평가를 하고 있다.

차운로 역시 경망스럽다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며(1589년), 1618년에도 역시 "차운로(車雲輅)는 관원으로 있으면서 삼가지 않아서 도처에서 낭패를 당하고 더욱이 집안에서의 행동이 패려하여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진신의 반열에 둘 수 없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라는 탄핵을 받고 파직된다. 1622년에도 미천한 사람이며, 백성과 관리들을 침탈하고 자기 집안 제사의 제물(祭物)까지 뜯어냈다고 탄핵을 받았다.

이런 와중에도 이들은 문장이 뛰어났다는 말이 계속 나온다. 특히 차천로는 조선 후기까지도 문장의 대명사로 회자되었다. 그러나 한시를 좋아하는 필자로서도 현재 그의 글이나 시로서 명문으로 소개되는 것을 본 적은 없어 그 연유가 의아하다. 그 뛰어난 재주가 집안의 한미함 때문에 더 큰 출세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콤플렉스를 크게 느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차천로는 실제 아내의 일에서 신분상승을 극도로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실록에 드러내 밝힐 정도이기에 연구자들이 바로 이런 점을 설원기의 위작 동기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7. 설원기는 위서이며 악서

여기까지는 왜 설원기가, 그리고 그에 대부분을 기초하고 있는 원파록이 조작된 문헌들인가를 직접 밝히지는 않았다. 간략하게 그 내용의 문제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설원기는 내용 전체가 악의적으로 꾸며낸 거짓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차원부의 행적을 조작하기 위해 4명의 사람들, 특히 그 중에 하륜을 극악한 인물로 꾸민다. 그리고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종용하여 고려를 망하게 만들었으면서도 이성계에게 벼슬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선에는 엄청난 공을 세웠고 고려에는 절신(節臣)이라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자가당착적인 억지 이야기를 꾸며댄다. 또한 차원부를 높이기 위해 도입한 방법 중 하나가 차원부는 적자(嫡子)이고 하륜은 얼자(?子)라는 대비인데, 하륜을 악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 출신을 조작하고 왕자의 난의 역사적 사실들을 교묘하게 뒤틀고 있다. 특히 당시의 이성계의 행적은 어떤 다른 역사적 기술과도 맞지 않는 극도의 왜곡을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대단해서 왕들뿐만 아니라 허다한 최상층 신하들의 극진한 관심의 대상이었다는 차원부라는 인물은 앞서 살펴본 바대로 "일성록"에서도 그리고 실록에서도 직접 등장한 적이 없고, 오히려 부인되는 기사들이 나오며, 차원부설원기의 등장 이전에는 다른 여하한 문헌에서조차 보이질 않는다. 대개 차원부가 실재한 인물이었는지조차 의심이 갈 정도의 상황이다.

설원기는 이런 내용뿐만 아니라 형태면에서만 봐도 위서임을 명확히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우선 본(本)에 따라 서문의 저자가 하위지에서 신석조로 왔다갔다 한다. 소위 왕명으로 만들어졌다는 책이 이런 실정이다. 또 그 작성연도도 본에 따라 1455년과 1456년으로 나온다. 더구나 설원기 본문의 말미에 그 저자라는 박팽년의 직책, 이름, 작성 날짜(년월일)이 밝혀져 있는데 엄밀하게 고증하면 그 날짜에 박팽년의 직책이 맞지 않는다. 왕에게 올리는 것으로 되어 있는 본문을 보면 왕에게 자신의 직책을 속이고 있는 것이 되어 왕을 능멸하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그 충심의 글이라는 것을 바치는 왕이 며칠 있다가 시해하려고 했던 세조이다. 박팽년이 쓰지 않았음을 100% 증명하는 대목이다. 기타 40여명의 응제시 저자들 중 많은 경우가 저자일 수 없는 다수의 문제점을 갖고 있는 등 형태적인 문제가 허다하다.

설원기라는 이해할 수 없는 위서(僞書)이자 악서(惡書)가 지금까지 문화류씨, 연안차씨, 개성왕씨 등 원파록을 받아들인 여러 관계 집안의 사람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식자(識者)들 사이에서까지 큰 권위를 갖고 내려왔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토록 중국 황제(黃帝)의 자손이 되는 것이 좋았던 것일까. 차원부의 꾸며진 절의(節義)의 가치에 눈이 멀어 제대로 판단할 이성(理性)도 마비되고 문헌 고증 의식도 전부 증발했기 때문이었을까.

 
8. 역사의 횃불

차문은 왕에게서 사성(賜姓)을 받아야만 진짜 성씨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등의 역사적 거짓을 일삼고, 정도전이 "고려사"를 마음대로 농단해서 대승공 류차달이 원래 다른 이름인데 류차달로 제멋대로 고쳤다는, 동기도 없고 증거도 없고 최종 "고려사"는 정도전과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도 무시하면서 음모론만 제시하는 예에서 보듯 막무가내식의 주장에, 심지어 이해할 수 없는 한문 해석의 왜곡까지 버젓이 동원하면서 류차문제를 지속적으로 확대해가며 역사왜곡을 계속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고려선양회"라는 단체에 차문 사람들이 회장 등의 임원들로 포진하고 대승공이 "류차달"과 "차해"로서 두 개의 위패로 모셔지고 있으니 경천동지할 일이 아닌가.

아직 류씨와 차씨의 선계가 다르다는 사실에 심정적으로 동의하지 못하는 류씨들도 없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선조들이 말로 또는 글로 명시하여 류씨와 차씨는 일가라고 전해온 것을 거역할 수 없다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그 선조들 위의 선조들은 류씨와 차씨의 혈연관계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또한 누가 하마를 돼지로 잘못 알았고 그렇게 자식을 가르쳤다 해서 그 후손들이 하마가 돼지가 아님을 알게 되고도 선조인 그를 존경해서 계속 돼지라고 부르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웃음을 살 일일 게다. 더구나 대승공 자신께서 없던 아들이 하나 더 생겼고, 그 잘난 가짜 아들 덕에, 당신께서 류씨 가문을 일으키셨는데, 차씨까지 되었다고 행여나 영광스러워 하실까.

문화류씨는 가문사와 족보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해왔고 그 위치를 통해 다른 가문들의 의식과 족보의 형성에 영향을 주어왔다. 그동안 깨닫지 못하는 사이 끼친 해악이 많으리라 짐작된다. 몇 백년에 걸친 그릇된 선계의 기술(記述)은 현재 각종 인터넷 자료와 문헌 등에 잘못된 정보를 넘치게 만들었다. 일본이나 중국어 등을 쓰는 외국 사이트와 문헌 자료들에까지도 영향을 미친 경우를 종종 목도한다. 차문은 그 동안의 분란에 대해 공개 사과를 하고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역사적 인식 위에 가문사를 재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류문은 향후 총체적인 노력을 경주해서 남겨진 과제들을 모두 해결해나가지 않으면 안 될 시대적 사명을 띠고 있다. 몇 백년 동안 사기에 넘어갔던 주체였다는 죄 아닌 죄에 대한 응보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제는 더 이상 굽은 것이 곧은 것을 물리칠 수 없는 세상을 향해 횃불을 높이 들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2008년 12월 11일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학술박사(Ph.D.) 대승공 36대손 류주환(柳朱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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