家門의 영광

역사에 입각한 문화류씨 선계에 대한 논의

맨발나그네 2009. 12. 23. 15:27

“한국성씨의 뿌리를 찾아서”를 읽고

- 채하 류주환 (彩霞 柳朱桓, 대승공 36세손)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신소재공학부 교수


최근 “한국성씨의 뿌리를 찾아서”(강경구 저, 기린원, 1991)이라는 흥미로운 책을 보았다. 내용이 3편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그 중 한 편을 “문화류씨 시조설화의 분석”이라는 제목으로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고조선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장황하게 여러 주장들을 하고 있다.

저자 강경구씨는 문화류씨 시조설화(원파록을 의미함)가 한국 성씨 시조설화의 압권이라고 부르며, 심지어 ‘민족 서사시’라고 극찬하고 있다. 저자는 시조를 왕조명이라 부르고 있다. (물론 문화류씨의 시조는 류차달이다.) 실상 저자의 관심은 그 속에서 단군설화, 조선(고조선, 저자는 ‘박달 나라’라고 부름), 고구려 등에 관한 역사의 편린(片鱗)을 찾는데 있다고 생각된다. 곧 왕조명, 왕수긍, 왕몽, 왕식시(원파록에는 ‘왕식’으로 나옴), 차씨, 류씨 등에 관한 묘사와 다양한 역사적 사실, 그리고 사료에 입각한 추정들을 엮어서 고조선에서 고려 초기까지의 변천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당한 부분이 추정들로 이루어져 있어, 저자는 확신을 하지만 여전히 전체적인 결론이 추정에 머무르고 말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며, 사실의 언급에 있어서 몇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러나 무척 흥미로운 주장들이 여럿이 들어 있어 한번 자세히 살펴볼만한 가치가 있다.

이 책의 내용에 상세한 점이 많아 그 주장하는 바를 모두 다루기는 어렵다. 여기서는 문화류씨 원파록과 직접 관계가 있는 부분들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책에서 문화류씨에 대해 펴고 있는 주장을 서술하여 본다. 단, 책에서는 추정에 추정을 거듭하고 있는데, 저자는 상당한 확신을 하고 있어 여기서는 추정으로 묘사된 것도 사실로 간주하여 정리했다.


    - 문화류씨의 선대인 왕씨가 등장한 것은 BC 2000년기 중반이다. 이때 이들은 당시 천왕 (天王)인 고조선 왕실에서 이단시 되어 신분적인 불이익을 벗어나기 위해 하우씨를 시조로 숭배했다.
    - (왕)조명(王祖明)은 문화류씨 족보에 당시 ‘박민(泊民)의 군장(君長)’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박민’은 ‘백민’이며 이것은 곧 ‘맥족’(貊族: 예족(濊族)과 함께 한족(韓族=예맥족)을 형성하는 족속)으로서 고대 조선족의 일파를 말한다. 즉 (왕)조명은 한 집단의 우두머리이었 다.
    - (왕)조명의 후손인 왕수긍(王受兢)은 단군의 왕검 조선을 역성혁명을 통해 정복하고 왕수긍 조선, 곧 백민족의 왕씨 조선을 시작했다. 이때가 BC 833년경이다. 이때쯤 성씨가 시작 되었고 왕수긍도 이때 왕씨를 시작했다.
    - 왕수긍의 13세 후손인 왕몽(王蒙)은 왕수긍 조선의 마지막 왕이고, 7자가 말자(末子) 상속에 의해 태자이었다(문화류씨 족보에 명기된 8자는 없었다). 왕수긍 조선은 BC 425년경에 회맥 조선(박씨 조선)에 망했고, 이때 왕수긍 직계의 일부(왕몽 부자)와 단군 조선의 후예들이 피하여 남하해서 평양과 구월산 지역 등지에 정착했다. 왕몽 부자가 피했다는 '지리산'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안식처’를 뜻하며, 구월산이다.
    - 왕씨는 한반도의 여러 지역에 존재하게 되었는데, 고구려의 대호족이었고, 왕몽의 3자 왕식시(王式時)의 후손에서 고려태조 왕건이 나왔다.
    - 왕몽의 후손은 여전히 왕씨로 남았다가 기원전후에 차량(車輛)을 대대적으로 만들어 나라에 공급하여 ‘차량의 장관’이라는 뜻의 ‘차달’(車達)이라는 복성(復姓: 두 글자로 된 성)을 사성(賜姓)받았다. 차달씨들은 ‘차달’씨들은 구월산 지역에서 재령평야의 경제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에서 높은 벼슬을 했다(예를 들어 차제능은 고구려의 고관이 었음).
    - 신라의 통일 후에 그중 일부는 안승(고구려부흥운동 때 추대된 왕. 후에 신라에 망명, 귀족이 됨.)의 세력에 동참해서 신라로 귀순해 들어와서 신라의 귀족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나머지는 구월산 지역(문화)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신라 후기에 중앙 집권을 강화하려고 지방 제도를 정비하면서 성들을 분정(分定: 나누어 정해줌)하였는데 이때 당성(唐姓: 당시의 당나라의 성들은 주로 외자였음)을 따라 신라 중앙으로 진출한 차달씨들은 ‘차’라는 단성(單 姓: 한 글자로 된 성)으로 변하고, 문화에 남아있던 차달씨들은 계급이 낮아 ‘차’를 쓰지 못하고 ‘류’씨로 정해졌다.
    - ‘류’를 쓴 것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1) 당시 고구려 대성(大姓) 중 하나인 양씨를 모방한 것임. (2) 차달씨는 관향이 ‘박달’(이때는 지명임)이었는데, ‘박달’ 의 소리가 바뀌어 ‘버들’로 되고 한자로 버들 柳자를 빌려 쓴 것임.
    - 신라 헌덕왕 초에 9서당(군대조직)을 철파했는데 그때 중앙에 진출했던 일파(차승색 부자)가 지방호족의 분리정책(중앙에서 지방으로 보내는 것)에 따라 다시 연고지인 문화로 돌아왔다. 한편 이들은 그곳에 남아있던 토착 세력(류씨)에 눌려 그대로 차씨를 쓰지 못하고 류씨로 변했다가 고려 건국 후에 정식으로 차씨 성을 복원하였다.

기타:

    - 왕몽이 천안전씨의 시조설화에도 등장하는데, 차씨, 류씨, 전씨가 왕씨의 지파이지만 모두 왕몽에게서 갈라진 것은 아니다.
    - 왕몽이 王-田-申-車로 성을 바꾸었다는 얘기는 꾸며낸 이야기이다. 신라가 통일하자 고구려와 백제의 고급 귀족이었던 고구려 왕씨와 백제 왕씨들이 성씨 변경을 받았으며, 고려 때 왕건이 왕이 되자 왕족이 아닌 다른 왕씨들은 성씨 변경을 강요당했다. 따라서 이때 전, 신, 차씨 등으로 바꾼 사람들이 많았는데, 왕몽의 변성 이야기는 이것이 설화화된 것이다.
    - 차씨와 류씨가 고려 태조 때 나누어지고 장자는 차효전, 차자는 류효금이었다는 ‘작위적인 전승’은 믿을 수 없다. (곧 그보다 훨씬 전에 차씨와 류씨가 나뉘어졌다는 주장임.)


저자는 무척 많은 논증을 하고 있어 이렇게 간략하게만 적어놓으면 설득력이 떨어져 저자에게 부당한 측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 저자는 왕조명이 왕수긍의 선조로 나오고 있고,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 우리 한족의 한 줄기인 맥족의 군장(君長)이라는 사실을 문화류씨 원파보에서 유추할 수 있어 상당히 고무된 듯하다. 책에서는 왕수긍에 대한 설화가 하나 소개되며 그 설화를 거의 최대로 부풀려서 그가 단군 조선을 정복하고 ‘왕수긍 조선’을 연 아주 중요한 인물로 부각시키고 있다. 단군 조선의 정복은 그의 선조인 왕조명이 맥족의 군장이 되어 그 역시 같은 지위를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저자의 논리의 전개에서 왕조명이 맥족의 군장이라는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저자는 문화류씨 원파보에 왕조명이 ‘박민(泊民)의 군장(君長)’이라고 나온다는 사실을 부풀려서 ‘박민’은 ‘백민’과 통하고 ‘백민’은 곧 ‘맥족’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여기서 큰 문제는 문화류씨 원파록에는 왕조명이 ‘박민(泊民)의 군장(君長)’이 아니라 ‘치민장(治民長)’이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증보문헌비고”의 왕조명에 대한 기록에는 무슨 장(長)에 대한 표현이 없다. 글씨 한 글자를 잘못 읽고 상당량의 논의를 진행한 결과로 논리가 크게 무너져버린다.
    - 차씨와 류씨가 같은 왕씨의 근원을 갖고 있다는 가정 하에 그것을 나름대로의 역사관에 입각하여 타당하게 설명하느라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나는 류씨와 차씨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현재의 문화류씨의 원파보는 조선 16세기에서 19세기에 갑자기 세상에 나온 문헌들이 근간이 되어 만들어진 것으로서 고려시대의 금석문 등의 사료들과 합치되지 않는 후대의 조작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류효금과 차효전이 등장하는 부분을 ‘작위적인 전승’이라고 단정하고 있으면서도 류씨와 차씨의 관계는 인정하고 있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과연 그것이 작위적이라면 류씨와 차씨가 관계가 있다는 얘기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라서 구태여 책에서와 같이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라도 추정에 추정을 거듭하여 그 둘 사이의 유래를 만들어낼 이유는 전혀 없다.
    - 저자는 ‘차달’이라는 복성을 가정하고 여러 설명을 전개하고 있다. 아마 ‘차’씨가 일찍부터 존재했다고 가정하고 차전(車戰)과 관련되어 수레가 많이 쓰인 시대를 연결하여 기원전후에 그 성씨가 생겨났다는 논리를 세운 듯하다. 그러나, 비록 문화류씨 선계 문제에서 ‘차달’에 대한 논의가 여럿이지만, 그 어떤 사료와 그 해석에도 ‘차달’을 성이라 볼 아무런 근거가 없어 저자의 논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한 수레가 등장하는 얘기에도 전쟁용 차량이 아니라 곡식을 나르기 위한 수레들이다. 한편 차씨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나로서는 직접적, 곧 일차적인 사료를 입수할 수 없어 상당히 후대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차릉의 주인으로 알려진 차건신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며, 그 무덤이 다른 사람 것이라 주장되기도 한다.
    - 송나라의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도 왕씨가 본래 고구려의 대호족이었다고 나온다는 말도 있고, “대동운부군옥”에 인용된 글에 “왕수긍의 후손이 왕식시이고 그의 후손이 왕건”이란 말도 있어 이들을 바탕으로, 저자는 호경(왕건의 조상)은 고구려 왕씨임이 분명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고려사”의 “고려세계”편에서도 왕씨가 왕건이 시작한 것이 아닐 가능성을 결론으로 제시하면서도 그 이상의 아무런 논의를 제기하고 있지 않다. 대동운부군옥의 인용글은 구절을 검토하면 정지상(鄭知常)의 “보음록”(報陰錄)을 다른 책(“동방설원”(東方說苑))이 인용하고, 또 그 책을 또 다른 책(“서경잡록”)이 인용하고, 그것을 비로소 대동운부군옥이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지상의 “보음록”이 실제 존재했었는지도 의문이 갈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책이며 얼마만큼 신빙성을 갖고 있었던 책인지 알 수 없다. 가장 중요한 점은 고려사의 저자들도 저런 내용(책이 없어져서 그 책에 있던 내용이 다른 책에 전해져 있었을 것임)에 관해 전혀 암시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태조에 관계되는 묘사이기 때문에 고려나 조선 시대에 누구나 한번 들으면 기억할 만한 내용임이 분명한데도 그런 내용이 고려사의 저자들도 모르게 세상에 드러나지 않다가 비로소 대동운부군옥에 나타났다는 것도 의심해 볼 대목이다. 또한 고려도경의 말처럼 고구려에 왕씨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고려사의 저자들도 그 사실을 왕건과 연결시킬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 더불어 나는 “차원부설원기”는 그 책에 나온 1456년에 쓰인 것이 아닌 증거가 책 안의 곳곳에서 발견되어 후대의 첨삭이 가해진 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설원기 속에 류씨와 차씨의 관계에 대한 증거로서 정지상, 서희 및 김방경의 작품 등이 언급되어 사실성을 부여하고 있는데, 주목할 점은 이들이 모두 주석에서만 주어져 있고, 어떤 사료는 그 존재의 성립이 부정되고, 직접 인용이 전무하며, 정지상과 서희의 경우 작품 이름이 두 가지로 나오고 있다는 등의 문제점을 갖고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없다. 구체적으로 정지상의 경우 “서경야사”와 “서경잡기”라는 이름이 혼동되어 언급되고 있는데 대동운부군옥의 내용과 비교해보면 이것은 누구의 작품인지 모를 “서경잡록”의 오기(誤記)이고 실제로는 “보음록”이라 해야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설원기의 저자들이 실제 정지상의 책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심증을 갖게 하여, 왕씨의 존재는 논외로 하고, 류씨와 차씨가 같은 근원을 갖는다는 류-차 동원설(同源說)은 근거가 없는데도 마치 사료가 있는 듯 조작하여 만들어낸 주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책의 세세한 부분까지는 그다지 언급하고 싶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지적은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 말자(末子) 상속이나 ‘지리산’이 고유명사로서의 ‘지리산’이 아니라는 주장 등 곳곳에 들어 있는 가정들은 맞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 맞지 않을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이런 경우, 그 논리 전개에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문화류씨 구보(舊譜)와 신보(新譜), 특히 가정보에 대한 언급들은 대부분 잘못되어 있다. 나아가서 저자가 기본 사료로 사용하고 있는 문화류씨 시조설화, 곧 원파보에 대한 자료의 평가는 해보았는지 궁금하다. 원파보의 많은 부분은 단지 조선 중기와 그 이후에 세상에 나타난 사람들의 말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한국성씨의 뿌리를 찾아서”에서는 문화류씨 원파보에서 왕조명, 왕수긍 등의 몇몇 인물들은 받아들이고 차승색, 차공숙, 류효금, 차효전 같은 이들의 존재는 완전 무시하고 있다. 곧 자신의 논리에 맞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은 심할 만큼 부풀리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그 묘사의 자세함의 정도에 상관없이 완전 무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화류씨 원파보의 사료로서의 가치를 어디까지 둘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고 과연 감탄고토(甘呑苦吐)의 자의적인 취사선택의 기준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저자가 중요한 사료 혹은 사실로 생각하는 왕조명이 ‘박민의 군장’이라는 기록이나 차달씨라는 성씨의 존재는 원파보를 잘못 읽는 치명적인 실수에서 나온 주장들인 것으로 보인다. 곧 왕조명은 ‘박민의 군장’으로 쓰여 있지 않고 ‘치민장’으로 쓰여 있으며, ‘차달’은 분명히 역사적 인물인 류차달의 이름인데, 다만 후대에 ‘차달’이 왕건의 사호(賜號)나 사명(賜名)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의 논쟁이 있을 따름이다.

저자가 중요시 여기는 왕수긍의 경우 대동운부군옥에 그 존재가 확실하게 나와 있으며 저자는 그 설화를 확대해석하여 ‘왕수긍 조선’의 존재에 대한 중요한 증거로 삼고 있다. 따라서 그런 것만 이용해도 구태여 다른 사료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논리를 펴는 데 지장이 없을 것이고, 또 그 선조로서 이미 왕의 지위에 있는 왕조명의 존재가 실재했음을 증명할 수 있다면 도움이 되겠지만 왕조명이란 사람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으로 보여 역시 문화류씨의 설화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

문화류씨의 시조설화를 중요시 여기는 저자로서는 그 기본 골격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 설화 자체의 출처와 가치에 대한 평가는 볼 수 없다. 만일 그것을 엄밀히 검토해 보았다면 사료로서의 신빙성에 큰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혹시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면 앞에 언급된 정지상 등의 자료이지만 이것들도 그 실체가 남아 있지 않고, 이미 논의했듯이 다른 증거들에 입각해서 검토하면 그 존재와 내용에 의심의 여지가 많은 작품들이다. “한국성씨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책은 어차피 추정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는 우리 고대사에 대한 훌륭한 통찰을 보이고 있지만, 그 논리 전개에서 조금 더 엄밀해야 할 것이며, 특히 문화류씨의 시조설화에 대한 논의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고 여겨진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아서, 황제에 기원을 두고 문화류씨와 연안차씨가 동원(同源)이라는 현재의 문화류씨의 원파보가 잘못되었음을 간접 증언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 고대사에 대해 높은 식견을 갖고 있는 저자가 역사적 관점에서 고조선에서 고려 초기까지의 역사를 묘사하는 중에 현재의 원파보를 부정하는 내용들을 다수 제시하고 있으며, 이 책에서 비판없이 가정하고 있는 류-차 동원을 완전 부정하고도 여전히 타당하면서 유사한 묘사가 그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2005. 1. 16.

채하 류주환 (대승공 36세손)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신소재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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