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화성 & 수원 이야기

<화성의 역사 03> - 조선시대

맨발나그네 2010. 5. 13. 07:13

화성의 역사 03 - 조선시대

 

                                                                                  ◆ 화성문화원 09-01 | VIEW : 828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太祖) 3년(1394)에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양광도(楊廣道)에 속해 있던 수원부 · 남양부를 경기도로 편입하였다. 태종(太宗) 13년(1413) 전국을 8도(道)로 나누고 지방제도를 개혁할 때 수원도호부 · 남양도호부로 각각 승격되었으며, 수원도호부 밑에 쌍부(雙阜) · 영신(永新) · 정송(貞松) · 용성(龍城) · 광덕(廣德) 등 5개 현을 두었다. 세조(世祖) 12년(1456)에는 수원에 판관(判官)의 도임지인 진(鎭)을 설치하여 경사(京師)를 지키는 4보(輔)의 하나로 삼았으나 중종(中宗) 21년(1526)에 이 마을에서 부모를 죽인 패륜아가 생기자 다시 수원군으로 강등되고 진(鎭)도 인천으로 옮겼다가 중종 30년(1535)에 복구되었으며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宣祖) 35년(1602) 방어사(防禦使)를 겸하게 하여 국방상 요충지로 삼았다.

 

한편 남양(南陽)은 200여년간 변동없이 내려오다가 인조(仁祖) 22년(1644)에 역적 형(衡)이 태어난 마을이라는 이유로 현(縣)으로 강등되었으나 효종(孝宗) 4년(1655)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고 수원은 현종(顯宗) 6년(1665)에 남양 고을에 노비가 상전을 죽인 일이 발생하여 현으로 강등되었지만 현종 15년(1674)에 다시 복구되었다.

 

숙종(肅宗) 13년(1687)에 수원 소재의 진을 고쳐 총융좌영장(摠戎左營將)을 겸하도록 하여 국방요새로 이 곳을 더욱 강화하였고 정조(正祖) 13년(1789)에는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花山,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으로 옮기고 화산 일대에 있던 수원부(水原府) 읍치(邑治)를 현재의 수원시 팔달산으로 동쪽으로 이전하면서 광주부(廣州府) 소속의 일용(日用) · 송동(松洞) 2면을 편입하였으며 정조 16년(1792)에는 남양도호부를 이곳에 속하게 하였다. 이 때 정조는 수도를 수원부로 천도할 계획으로 이듬해인 1793년 1월 수원부를 화성(華城)으로 고치고 아울러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키면서 유수 2인을 배치하여 1인은 경기관찰사가 겸하고 다른 1인은 전관유수(專管留守)로서 장용외사(壯勇外使) ·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무하도록 하였으나 천도는 실패하였다.

 

그 뒤 갑오개혁 이듬해인 고종(高宗) 32년(1895)에 이르러 근대식 행정제도를 채택하여 전국의 지방관제를 23부(府)로 개정할 때 수원과 남양은 인천부(仁川府) 관할에 속하면서 각각 군으로 되었고 1896년 8월 4일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道)로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수원에 경기도관찰부(京畿道觀察府)를 둔 것을 계기로 수원은 경기도의 수부(首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수원부는 군이 되는 동시에 팔탄(八灘) · 가질등(加叱等. 갓등) · 화방(禾方) · 수류(水流) · 마정(馬井) · 초장(楚長) · 사정(奢井) · 팔라(八羅) · 압장(鴨長) 등 9개 면을 남양군에 넘겨주고 대신 광주목(廣州牧)의 의곡(儀谷) · 왕륜(旺倫) · 등 2개 면과 양성군(陽城郡)의 승량(升良) · 감미(甘味) · 율북(栗北) · 소고니(所古尼) 등 4개면, 충청도 직산군(稷山郡)의 안외(安外) · 언북(堰北)의 2개면을 편입하여 38개면을 관할하였으며 남양부 역시 군이 됨과 동시에 앞의 수원군 9개 면과 인천부의 이포면(梨浦面)을 편입하여 19개 면을 관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