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나그네/맨발걷기 경험담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10)>융건능의 역사를 맨발되어 느끼다

맨발나그네 2011. 7. 31.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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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10)>

융건능의 역사를 맨발되어 느끼다

 

● 어 디 를  : 화성시 태안읍 융건능

● 언     제 : 2011년 7월 30일 오후            

● 누 구 랑 : 나홀로

● 코 스 는 : 매표소-융릉-화산 산책로-건릉-매표소

 

내고향 화성시는 편안한 고장이다.

높아봤자 337m인 건달산을 최고봉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구릉같은 산들과 한없이 정겨웁고 소박한 서해바다를 끼고 있다.

거기다 큰 가뭄이나 홍수 피해가 없는 풍성한 들판은 늘 넉넉한 인심을 나누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급격한 산업화는 화성시를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의 모티브가 된 연쇄살인사건의 고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내고향 화성시는 문화와 역사의 고장이다.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용주사와 융건능이 자리잡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으로 활약한 추연 우성전 선생을 배출하였으며, 3.1운동 때에는 일제에 용감히 항거한 제암리, 고주리, 화수리가 있었으며, 근대음악의 선구자 난파 홍영후와 신문학 초기 낭만파 시인인 노작 홍사용의 고향이기도 하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내고향 화성시를 황폐하게 만드는 것이 안스러워 나라도 화성의 곳곳을 사랑해보고자 작년부터 화성시의 많은 곳을 찾아보기로 했었다.

그러나 올해들어 이런저런 일로 마음의 여유가 없어 화성시의 산하와 사랑나누기를 제대로 할 수 없어 안타까웠는데 다행이 오늘 시간이 되어 화성시의 산하와 사랑나누기에 나설 수 있으니 행복하다.

 

오늘 사랑을 나눌 곳은 융건능이다.

물론 내고향 화성시에도 '화성팔경'이 있고, 그중 제1경으로 눈으로 뒤덥혀 별천지를 보여주는 '융건백설'을 꼽는다.

 능 전역에 빽빽히 들어선 노송에 백설이 덮힌 풍경은 세인들의 마음을 무아의 경지로 빠지게하는 장관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팔월 염천 더위 속이니 '융건백설'은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융건능은 봄,여름,가을,겨울  어느 계절에 찾아도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좋은 곳이다.

 

융능주변에는 아이들과 함께나온 가족들이 많이 있어 나도 아이들과 함께했던 아주 오래전의 융건능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잘 알다시피 융건릉(隆健陵)은 사적 제206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장조와 그의 비 헌경왕후(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융릉(隆陵)과 그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건릉(健陵)을 합쳐 부르는 이름으로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다.

 

이 융건능을 포함하여 조선 왕능은 조선시대 27대 왕과 왕비를 비롯해 사후에 추존된 왕과 왕비의 능 40기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잘 보존된 문화유산이자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조선왕릉은 하나의 우주세계를 반영하도록 조영됐다. 능역의 공간은 속세의 공간인 진입공간(재실, 연못, 금천교), 제향공간(홍살문, 정자각, 수복방), 그리고 성역공간(비각, 능침공간)의 3단계로 구분되어 조성돼 있으며 이는 사후의 세계관을 강조한 것이라 한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산책도 하고 휴식도 취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융건능 일대는 원래 삼국시대~조선후기 정조시기까지 수원의 중심지로  여러 유적이 발굴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1789년 융능을 조성하면서 600여호에 달하는 수원부 거주민을 지금의 수원시내 화성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융건능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울창한 송림이 맞이한다.

묘역주변에는 울창한 산림을 유지하기 위해 수목의 종류와 그루 수를 지정하여 특별관리하였으며, 매년 두 차례씩 묘역의 전반적인 상태를 왕에게 상세히 보고하여 능이 항상 온전하게 유지되도록 왕실에서 직접 관리하였다 하니 오늘날 유네스코가 그 진가를 인정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입구로 들어서면 바로 길이 갈라지는데, 오른쪽이 융릉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이 건릉으로 가는 길이다.

사람들은 이곳에 서서 잠시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오른쪽의 융릉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나도 그래도 아버지 묘부터 찾아야되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오른쪽으로 길을 잡는다.

 

 

 

 

가는길 소나무가 아닌 상수리나무 숲과도 만난다.

 

 

 

 가족단위 또는 친구들끼리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평화롭다.

아마도 여고 동창생쯤으로 보이는 너댓명의 여인들이 양산을 받쳐쓰고 옛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정겹기 그지없다.

 

 

 

 

 

 

 융능가는길 만나는 곤신지(坤申池)이다.

융능을 만든 이듬해 1790년 만들어진 연못이다.

묘지에서 풍수지리상 좋은 방향(坤申方, 남서방향)에 못을 파는데, 묘지로 부터 첫번째 물이다.

 

 

 

(홍살문)

 

(참도)

 

(배위)

 

(수라간)

 

(정자각)

 

 

능에 닥아가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왕능의 정문인 홍살문이다.

홍문이라고도 불리우는데, 본래 궁전, 관아, 능, 원(園 : 세자나 대군, 공주 등의 묘)등의 앞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신성한 곳을 알리는 문이다.

한자로는 홍전문(紅箭門)이라 표현하며, 30자 이상되는 둥근 기둥을 2개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는 붉은 살을 쭉 박는다.

홍살문의 오른쪽에는 왕이 제례시에 홍살문 앞에서 내려 절을 하고 들어가는 배위(拜位)가 있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정자각(丁字閣)까지 긴 돌길이 놓여 있는데 참도(參道)라 한다.

참도를 잘 살펴보면 오른쪽 부분은 단이 낮고, 왼쪽은 한 단을 높게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신성한 정령이 다니는 곳이 왼쪽이 신로(神路)이고, 오른쪽이 사람이 걸어가는 인로(人路)인데 이를  나누어 놓은 것이라 한다.

 

 

 

입구로 부터 500여m를 걸어들어오면 만날 수 있는 융능(隆陵)이다.

융릉은 조선 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인 장조(莊祖=사도세자, 1735~1762)와 비(헌경황후, 1735~1815)의 합장릉이다.

사도세자의 아버지이자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는 52년간의 재위기간 동안 신문고를 설치하여 백성의 고충을 들었으며, 탕평책을 펼쳐 당파싸움을 없애려 노력하였으며,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을 진작시키고, 균역법을 실시하여 백성의 세금을 덜어 주는 등 현군이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에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한다.

 

원래 사도세자의 능은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에 있었다.

하지만 불행한 삶을 보낸 아버지를 늘 가슴 아파하던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1789년(정조 13)에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좋다는 수원(현재의 화성)의 화산으로 묘를 옮긴 후 현릉원(顯隆園, 나중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했다.

정조는 아버지 묘소를 같은 격의 어느 원보다도 훌륭히 꾸며 능 주위에 병풍석을 돌리고 혼유석과 팔각 장명등, 문무인석을 세웠으며 융릉에만 소나무 45만 그루를 심었다.

궁궐의 세련된 의장과 최고 석물장인의 솜씨가 엿보인 아버지 무덤 앞에서 정조는 소매가 젖도록 울고, 재실에 들어가 아버지와 영혼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1762년 6월 영조는 사도세자의 자결을 명하나, 거부하자 뒤주에 갇어버리고, 손수 열쇠를 채운다.

물 한모금, 밥 한숟가락 주지 않았으며, 빛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모든 틈을 막고, 뒤주 주위에는 풀을 산더미같이 쌓아 놓았다.

오늘이 음력 6월 그믐날이니 아마 요즈음 날씨처럼 찌는 듯한 더위와 굶주림으로 8일만에 죽게 된다.

그런 슬픈 역사를 가진 융능이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그런 역사적인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만난 맨발 꼬맹이들도 그저 즐거워 하고 있길래 불러모아 한컷 찍어본다.

 

 

 

융능을 뒤로하고 화산 산책로로 들어선다.

융릉에만 소나무 45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니, 융능주변은 소나무로 뒤덥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의 이 나무들은 그때 심은 나무들의 자식 나무이거나 손자나무이겠지만 말이다.

 

 

 

가는 길 여기 저기에 쉴 수 있는 벤치가 많이 마련되어 있어 맨발나그네도 잠시 쉼을 갖는다.

 

 

 

 

 

 

또 한참을 가다 이번에는 벤치에 잠시 누워 생각을 정리한다.

사느라 무심했던 것들을....

사는동안 스쳐왔던 것들을....

그리고는 누워서 하늘을 보고 산바람이 내곁을 스쳐가며 읊어주는 시 속에 빠져본다.

중국의 문장가인 양만리는

 "강바람이 나에게 시를 읊게 하고, 산 위에 걸린 달은 나에게 술을 마시게 하네.

  취해서 꽃밭 앞에 쓰러지니, 천지가 그대로 이부자리로구나" 라고 읊었다지.

 

 

 

산책로에는 야생화들이 반겨주기도 하여 놀멍 쉬멍 걷고 있는 맨발나그네의 발걸음을 또다시 잠시 머물게 한다.

그들이 서툰 몸짓으로 들려주는 오케스트라에 귀를 기울인다.

비록 화려하진 않지만, 그 수수한 모습이 내 어릴적 이웃집 누이들의 모습같아 정겹기만 하다.

 

 

 

다시 맨발나그네가 되어 걷는다.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된 사도세자를 안타까워하며 걷는다.

정조가 지었다는 시를 읊조리며 걷는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사모하는 마음 다하지 못해

오늘 또 화성에 왔구나

부슬 부슬 비 내리니

배회하는 마음 둘 곳이 없어라

만약에 여기서 사흘 밤만 잘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네

더디고 더딘 길

아바마마 생각하는 마음

구름 속에 생기네" 라고

 

 

 

또 걷는다.

오늘은 느려터진 굼벵이처럼 걷는다.

가끔씩 와보곤 하던 곳인데도 새롭고, 정겹고, 새삼스럽다.

세상살이로 혼탁해진 마음을 정화하며 걷는다.

 

 

 

건능이 가까울 수록 수종은 소나무에서 상수리나무로 변한다.

 

 

 

그렇게 도착한 건능(健陵)이다.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능으로, 정조는 생전에 선친의 묘 곁에 자신의 묘를 써달라 유언을 남겼고, 그에 따라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 옆에 정조임금의 건릉이 자리하고 있다.

융릉은 화산의 서남쪽, 건릉은 서북쪽 기슭으로 융릉과 건릉은 모습이 거의 같다.

정조는 조선 제22대 임금으로 우리 역사상 제일의 효자로 누구도 감히 토를 달지 못한다.

정조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부친 능을 참배하기 위해 능행차를 하였기에 수원시에서는 지금도 이를 기려 능행차를 자주 시연하고 있다.

죽은후에도 아버지의능침의 발치에 묻혀서라도 시묘효행(侍墓孝行)을 하겠다고 생전에 정하여 둔 이곳에 묻혀 효를 행하고 있는 정조다.

일찍이 토인비는 "한국의 효 문화야 말로 21세기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유일한 구원의 가치이다"라고 극찬하였다고 하나, 오늘날 한국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어 안타깝지만 말이다.

 

 

 

건능부터 융능과 건능이 갈리는 삼거리까지 또다시 상수리나무 숲이 이어진다.

 

 

 

느리게 느리게 걷는다고 걸었지만 아직도 '빨리빨리'병이 제대로 치료되지 않은 듯하다.

주마간산으로 대충 지나 다시 매표소 앞이다.

내가 역사속을 걸은 것인지 걷다보니 역사가 내 머리를 채운 것인지 아리송하다.

며칠간의 폭우가 지난 끝의 무더위속이지만 맨발나그네되어 소나무를 끌어 안아보기도 하고, 상수리나무를 끌어 안아보기도 하며 화산과 융건능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으랴.

숲이라는 보물창고 안에서 역사와 연애를 하고 아주 오래된 숲과 연애를 하였으니 두뇌속 도파민이 넘쳐남을 느낄 수 있다.

둔감해진 오감이 나를 다시 깨운다.

정말 가장 가난한 방법으로 가장 부유한 천국을 맛보고 온 날이다.

다만 융건능의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고자 너무 많은 사진을 실어 혹시 귀찮아 하실 분이 있을 것 같아 살짝 걱정이 되긴 하지만, 사진이 아무리 많은 들 내 눈과 마음속에 담아 둔 모습보다는 못하다는 것을 밝혀두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