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나그네/일반산행후기

태봉산-상방산-서봉산-명봉산을 걷다

맨발나그네 2013. 3. 5. 00:35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1)> 건달산 ( )http://blog.daum.net/yooyh54/265)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2)> 칠보산 (   http://blog.daum.net/yooyh54/266)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3)> 동탄무봉산 (http://blog.daum.net/yooyh54/267)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4)> 삼봉산-지내산-태행산 ( http://blog.daum.net/yooyh54/280)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5)> 서봉지맥(태봉산-서봉산-천석산-주산봉)( )http://blog.daum.net/yooyh54/286)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6)> 남양무봉산(http://blog.daum.net/yooyh54/287)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7)> 유봉산-초록산(http://blog.daum.net/yooyh54/291)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8)> 서신 구봉산과 당성(http://blog.daum.net/yooyh54/306)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9)> 송산면 공룡알화석 산지 (http://blog.daum.net/yooyh54/307)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10)> 태안읍 융건능 (http://blog.daum.net/yooyh54/377)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11)> 철마산-서학산 (http://blog.daum.net/yooyh54/403)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12)> 오두산-천덕산-등고산 (http://blog.daum.net/yooyh54/412)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13)> 화성우리꽃식물원 (http://blog.daum.net/yooyh54/413)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14)> 왕자봉-남이장군묘-해망산(http://blog.daum.net/yooyh54/416)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15)> 잃어버린 오래전의 나를 찾은 건달산(http://blog.daum.net/yooyh54/452)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16)> 융건백설 (http://blog.daum.net/yooyh54/455)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17)> 태봉산-상방산-서봉산-명봉산 (http://blog.daum.net/yooyh54/467)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18)> 봉화산-함경산 ( http://blog.daum.net/yooyh54/468)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19)> 이봉산-승학산-와룡산 (http://blog.daum.net/yooyh54/470)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20)> 응봉산-천등산 (http://blog.daum.net/yooyh54/474)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21)> 쌍봉산~남산~꽃당산~신술산 (http://blog.daum.net/yooyh54/515)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22)> 청명산~해운산 (http://blog.daum.net/yooyh54/530)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17)>

태봉산-상방산-서봉산-명봉산을 걷다 

 

 

어 디 를 : 화성시 태봉산(226m) - 상방산(153m) - 서봉산(250m) - 명봉산(173m)

언 제 : 201333

누 구 랑 : 나홀로

코 스 는 : 43번국도 수원카톨릭대학앞 버스정류장-노루고개-태봉산-상방산-서봉산-명봉산-홍승인고가-309번도로 문학2리 버스정류장

 

 

(오늘 사랑나누기를 한 태봉산-상방산-서봉산-명봉산 코스)

 

 

역사와 전설이 함께하는 정다운 고장 ~ 내고향 화성

 

역사와 전설이 함께하고, 아름답고 정다운 내고향 화성이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망가져가고 있다.

사람들은 벌써 오래전의 연쇄살인사건의 고장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내고향 화성은 서쪽으로 바다를 가까이 두고 있어 산세가 밋밋하고 부드러운 육산들을을 끼고 정답고 인정 넘치는 이웃들이 살을 비비며 살고 있는 그런 고장이다.

더 망가지기 전에 내고향 화성시 산하와 사랑을 나누어 보겠다고 작심하고 건달산과 꽃잠을 이룬게 20105월이니 벌써 3년여...

그동안 화성의 산들을 중심으로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가 18회에 이르지만 아직 갈 길이 멀기만 하다.

최근에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이 전국의 7,391개에 이르는 산들의 높이를 발표하였는데 이 자료에 의하면 화성시의 산들은 최고봉인 건달산(336m)이 유일하게 300m를 넘을 뿐이다.

200m급 산들도 태행산(295m), 삼봉산(270m), 동탄 무봉산(258m), 서봉산(250m), 칠보산(238m), 태봉산(226m), 남양 무봉산(202m) 뿐으로 모두 7개뿐이다.

남들이야 300m도 넘지 못하는 산도 산 축에 드느냐고 할런지 모르겠지만 화성시를 고향으로 둔 내겐 모두가 정다운 고향의 산하인 것이다.

다행히 200m이상인 산들과 100m가 넘는 산들중 일부와 데이트를 마쳤고, 이제 100~200m에 이르는 산들과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중인데 오늘은 태봉산(226m)-상방산(153m)-서봉산(250m)-명봉산(173m) 코스를 걸어보기 위해 집을 나선다.

 

노루고개의 전설과 태봉산

 

 

 

(공사중인 노루고개, 붉은색 선은 절개지를 어렵게 오른 표시)

 

오늘의 들머리는 43번국도 수원카톨릭대학앞 버스정류장이다.

정류장을 출발하여 노루고개로 향한다.

노루고개는 분천-송산간 도로 개설로 파헤쳐져 등산로를 찾기가 어려워 간신히 절개지를 오른다.

이 노루고개에 얽힌 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으니 다음과 같다.

< 화성시 봉담읍 분천리의 태봉산(太鳳山)과 각씨봉 중간쯤에 분천리에서 왕림(旺林)으로 넘어가는 산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옛날부터 노루고개라 불러오고 있다.

고개 이름이 노루고개라 불리워지고 있는 데는 그러한 연유가 있어서였다.

고려 광종(光宗) 때의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낸 이언(李彦)을 시조로 하는 함평이씨(咸平李氏)가 살고 있었다.

중시조인 이종생(李從生, 시조의 11대손)은 세조때 무장으로서 이시애난(李施愛亂 1467) 토평(討平)에 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올랐고 각 도의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는데 함평이씨가 배출한 문무의 현신은 거의 그의 후손이었다.

그의 아들인 위()는 낭(), 자는 자방(子房)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무과(武科)에 등제(登第)하여 의주목사(義州牧使병사(兵使가선대부(嘉善大夫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여 함천군(咸川君)에 봉군(封君)된 사람이었다.

이랑(李良 1446-1511)이 돌아가실 당시의 일이었다.

어느 날 아들이 뒷산에 올라 양지바른 곳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이때 홀연히 노루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구원을 청하는 듯 슬프고 가련한 모습으로 어쩔 줄을 모르면서 허리에 차고 있던 화살집을 비벼대 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상히 여기면서 근처에 있는 풀잎으로 노루를 덮어 주었다.

그때였다.

사냥꾼이 헐레벌떡 뛰어오면서 노루의 도망친 방향을 묻는 것이었다.

그는 태연한 태도로 못 보았노라고 대답하니 사냥꾼은 그대로 각씨봉 쪽으로 가면서

"이곳으로 지나갔을 텐데"

하고 중얼거리면서 지나가고 말았다.

그는 사냥꾼이 지나간 뒤 곧 풀잎에 숨어 있는 노루를 일으켜 주었다.

그러자 노루는 몸에 묻은 풀을 훌훌 털고는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듯 의기양양하게 사람들이 다니는 산 고개를 넘어 어디론지 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이 곳 사람들은 이 고개로 노루가 넘어갔다 하여 '노루고개'라 불러오고 있다.

그 며칠 후의 일이었다.

그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더니 지난 번 내가 갑작스레 사경에 이르렀을 때 구해주어서 고맙다고 하례를 한 다음,

"나는 본래 산신(山神)으로서 산이 하도 조용하기에 대자연과 더불어 잠시 즐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노루로 변신하여 놀고 있었는데, 별안간 뜻하지 않은 사냥꾼을 만나 하마터면 죽음에 직면하는 변을 당할 뻔했는데 당신이 구원해 주어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소.

그러하니 내 생명의 은인으로서 보답을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인즉 당신에게 묘자리를 하나 일러주리라."

하고는 노인은 꿈에서 사라져 갔다.

꿈에서 일러준 묘자리는 태봉산에서 남향으로 산줄기가 뻗어있는 내룡(來龍)이였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부친인 함천군이 별세하게 되었다.

그는 이처럼 상을 당하게 되어 장례 준비를 할 즈음에 좋은 묘자리를 잡기 위해 이산저산 돌아다녀 보았으나 별로 신통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전날 현몽(現夢)하였던 곳에 가서 보니 과연 길지(吉地)라고 지사는 탄복을 하는 것이었다.

그 뒤 이곳에 산소를 슨 뒤부터는 가세(家勢)가 번창하면서 자손들이 복록을 누리게 되고 번족하게 되었는가 하면 대대로 내려가면서 문무(文武)할 것 없이 벼슬길에 많이 올랐을 뿐 아니라 고결청백(高潔淸白)한 문장가가 또한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선조에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 7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조선 정조 때에 이르러서였다.

정조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소를 화산(花山)에 이장하고 본래 수원의 도읍지를 팔달산 밑으로 옮겨졌을 때였다.

정조는 지극한 효성에서 내가 죽거든 우리 아버지 산소 근처에 묻어 달라고 하여 같은 화산에 묻히게 되었다.

그 때 능을 중심으로 하여 능역(陵域)을 정할 때에 태봉산이 모두 이 구역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태봉산 일대에는 함평 이씨의 묘들이 있는 곳인지라 나라에서도 이곳은 제외토록 하였다.

현재 함평 이씨의 종산(宗山)9만평에 이르고 있어 선조들의 내력을 짐작케 하고 있다.

함평 이씨들은 아무리 좋다 해도 노루고기를 먹지 않으며 또한 잠을 잘땐 몸을 모로 누워 자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산행중 만나는 리본은 왠지 그녀(山)들의 성감대를 보는 듯 하다)

 

 

(태봉산 정상에서의 맨발나그네)

 

절개지를 어렵게 올라 함평 이씨들은 정말 잠을 잘땐 몸을 모로 누워 자는 버릇이 있는지 궁금해 하며 한참을 쉰 후 다시 길을 떠난다.

태봉산 0.3km라는 표지가 보이는 봉우리에 오르니 서남쪽으로는 화성시 최고봉인 건달산, 서북쪽으로는 삼봉산에서 태행산으로 이어지는 태행지맥이 위용을 뽐낸다.

태봉산 정상에는 몇 년전 이곳을 지날때는 손바닥보다 조금 큰 태봉산이라는 표지판이 나무등걸에 매달려 있더니 그나마도 삭아 없어졌는지 돌무덤 하나만이 외로이 지나가는 객을 맞는다.

태봉산 정상 부근에는 백제시대의 산성이 약 800m 남아있다고 하는데 관심없이 지나쳐 확인을 할 수 없었다.

그곳 태봉산 정상에서 다시 한참을 머문다.

 

 

역사가 숨쉬는 상방산

 

 

(상방산을 향해 가던 중 잠시...)

 

 

그리고 상방산을 향해 떠난다.

태봉산에서 상방산으로 가는 길 좌측은 정남면 관항리이고 우측은 마하리이다.

관항리는 높고 귀한 관리가 배출된 지역이라는 관골(官谷)과 높고 큰 골짜기에 위치하였다는 항골(項谷)을 합하여 생긴 지명이라 한다.

높아봐야 이백몇십미터이지만 이곳 화성에서는 몇 손가락안에 드는 높이의 산이니 그런 마을이름이 생길만도 하겠다 싶다.

이곳 관항리에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있으며 석탑 뒤편 산 능선에는 청동기시대 고인돌 1기가 있어 마하리 고분군과 함께 이 지역이 아주 오래전부터 조상들의 삶의 터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마하리에는 원삼국~삼국시대까지의 목관묘, 목곽묘, 석곽묘와 토기등 많은 유물이 발견된 화성마하리백제고분군(사적 451)이 있어 한강유역에 한정되었던 초기백제의 형성과 전개과정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문헌상 백제 이전 삼한시대(三韓時代)에 이 지역은 약 54개의 부족국가로 이루어진 마한(馬韓)의 모수국(牟水國)으로 알려져 있고,기록으로 남아있는 역사 이전에도 살기 좋은 이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마을 이름은 옛날 마을의 우물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고 용마가 솟아나와 마을을 일곱 바퀴 돌고 난 뒤 죽어, 그 말을 이곳에 묻었다고 하여 말무덤, 말무더미, 말무데미로 불리우다 말 마()자와 안개 하()자를 써서 마하리라 불리운다고 전한다.

 

 

 

(점심을 해결한 식당과 밥상, 배가 고파서 그런지 무조건 맛있었다)

 

그렇게 걷다보니 상방산을 거쳐 정남에서 해병대사령부로 이어지는 332번도로와 만나게 되는데 도로옆 상봉시골밥상이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쉰길바위 전설이 깃든 서봉산

 

 

(서봉산 정상에서)

 

점심식사후 고속철도 우측 능선을 따라 한참을 오르니 서봉산이다.

서봉산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산이다.

오늘도 등산로가 녹아 질척이는데도 가족단위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서봉산을 찾아 걷고 있었다.

나도 중고등학교시절의 소풍까지 포함하여 꽤 여러번 이곳 서봉산과의 데이트를 즐긴 사이가 되었다.

이곳 서봉산은 옛부터 봉황이 깃드는 산이라 하여 서봉산이라 불러 오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 산을 신성시하여 산 안팎을 중심으로 곳곳에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고, 또한 옛날 젊은이들은 호연지기(浩然志氣)를 기르기 위하여 쉰길바위의 암벽을 오르내리며 이 곳에 매달려 턱걸이를 하는 등 심신을 단련하기도 했던 곳이다.

 

 

(서봉산 쉰길바위에서 바라본 북쪽 조망)

 

(서봉산 정상에서 바라 본 서북쪽)

 

(서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쪽)

 

(서봉산 정상의 육각정인 서봉루)

 

이 서봉산에 쉰길바위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니 다음과 같다.

<서봉산 중턱에는 옛날부터 작은 암자가 있었는데 젊은 스님과 동자승 한 분만이 살고 있었고 늘 다니던 우물을 찾아갔다.

그 때 물을 긷던 아낙네들은 물동이를 이고 하나 둘씩 마을로 들어가고 있었으며 젊은 스님이 우물 가까이 갔을 때에는 어떤 낭자 혼자만이 남아 물동이에 물을 담고 있었다.

젊은 스님은 낭자를 바라보는 순간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훤칠한 몸매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곱기가 이를데 없어 하늘에서 선녀가 하강(下降)하여 노닐고 있는 듯하여 '참 아름답기도 하구나'하고 속으로 감탄하면서 우물가에 다다랐다.

낭자는 뒤에서 인기척이 나서 돌아보니 젊은 스님이 다가서는 것을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어 물 긷던 바가지와 물동이도 버려둔채로 마을로 향해 줄달음을 쳤다.

스님은 낭자가 놀라서 뛰어가는 것을 보고는 우두커니 뒷모습만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로 인하여 물동이 마저 놓고 간 낭자에게 미안한 생각과 함께 다시 한 번 보았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에서 물동이에 물을 가득 채워서 나무 밑에 놓고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그 동안 해는 서산에 기울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스님은 피곤한 나머지 물동이 옆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스님이 잠에서 깨어 날 즈음이었다.

이 때 마침 어제 그 낭자가 일찌감치 동이를 찾으러 오다가 물이 가득한 동이 옆에서 스님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스님은 잘못이라도 했다는 듯이 낭자를 바라보며 합장하고 머리 숙여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을 외운 다음 그 곳을 떠나려고 하였다.

그 때 낭자가 어제 있었던 자기의 행동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어 바가지에 물을 떠서 스님에게 권하자, 스님은 또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을 받아마신 다음 아리따운 낭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암자로 돌아갔다.

한편, 암자로 돌아온 스님은 낭자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잠이 오질 않았고 불경을 외우는 것도 마음이 내키질 않았으며 시주걸립도 떠나기가 싫었다.

불도(佛道)에만 골몰무가(汨沒無暇)해야 할 스님의 처지에서 속세의 낭자가 그리워 번민하고 있는 것은 불제자의 도리가 아닌 줄 알면서도 점점 더 마음이 혼란에 빠져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모든 것을 잊기로 결심하고 다시 마을로 시주걸립을 떠났다.

한편 낭자네 집에서는 부친이 우연히 병이 나서 눕게 되었다.

그래서 백방으로 약을 구해다 쓰고 용한 의원을 불러 치료해 보았으나 효험이 없었다.

낭자는 부친의 병환이 여의치 않자 근심과 걱정으로 나날이 지내다보니 몸이 수척해지기까지 했다.

그 즈음 스님은 시주걸립을 마치고 지나는 길에 자신도 모르게 우물을 찾았다.

거기서 스님은 낭자를 만나게 되자 반가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소를 띄우는 낭자의 얼굴에는 수심이 서려 있어 사연을 물어본즉 부친의 병환 때문인 것을 알았다.

스님은 그 자리에서 약처방을 써주고는 차도가 있은 뒤 자기의 암자에 와서 3일간 불공을 드리라는 말을 남기고 암자로 돌아갔다.

그 후 낭자는 스님의 처방대로 약을 달여 부친에게 드리니 병세는 금방 호전되었다.

그래서 스님 말대로 3일간 불공을 드리기 위해 부친의 승락을 받은 다음 돈과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서봉산 암자에 들어갔다.

스님이 일편단심 낭자의 생각으로 지새던 차에 낭자가 부친의 병환이 좋아져서 약속대로 불공을 드리러 온 것이었다.

낭자가 사흘동안 정성을 다해 부처님께 불공을 드린 다음 스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떠날 때였다.

즉 낭자를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워하는 마음이 솟구쳐 한시라도 잊을 수가 없으니 낭자와 함께라면 불도수행(佛道修行)을 떠나서 환속을 하겠다는 하소연이었다.

낭자는 뜻밖의 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나, 스님의 처지를 생각해서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낭자는 부친의 승락을 빙자해서 그 날은 암자를 떠나왔다.

이튿날 낭자는 암자에 가서 스님을 만났다.

"스님께서 여러 해 동안 불도에 몸 담아 오신 터에 쉽사리 속세로 환속하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스님은 대답하기를

"소승이 불도의 길을 걷고 있음은 지당한 말씀이오나 낭자를 두고는 도저히 마음을 가다듬을 수가 없어 환속하기를 결심한 것이오니 소승의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요."

하고 말했다. 낭자는 또 다시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환속을 약속한다는 표시로써 저 서봉산 위 쉰길바위에서 턱걸이 백 번을 한다면 기꺼이 응하겠소."

하였다.

젊은 스님은 그 까짓 백 번쯤이야 걱정 없다는 듯 희희락락하며 자신있게 팔을 걷어 부치고 턱걸이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거뜬거뜬 올라 갔으나 횟수가 더해 갈 수록 힘이 들었고 80번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더욱 힘이 들었다.

스님은 사생결단 있는 힘을 다하여 턱걸이를 했지만 백 번을 채우지 못하고 99번째 가서 기운이 빠지고 의식이 몽롱해지고 손이 풀리면서 급기야는 높이가 쉰길이나 된다는 바위의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낭자는 스님을 부르면서 황급히 절벽 아래로 뛰어 갔으나 스님은 이미 유혈이 낭자한 채 숨을 거둔 후였다.

낭자는 생각하기를 "내가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하여 스님이 불의의 변을 당했구나"하고 슬픔을 못이겨 한참을 엎드려 울고 있다가 일어나니, 자기 앞에는 난데없이 바위가 하나 우뚝 솟아나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가 스님의 이루지 못한 영혼이 깃들어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다고 하여 '눈물바위'라 불러오게 되었으며 쉰길바위와 함께 지금까지도 스님과 낭자의 한 맺힌 사연이 담겨져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쉰길바위에 얽힌 애달픈 전설을 뒤로 하고 다음 목적지인 명봉산으로 향한다.

 

 

고독한 산길을 걷다 만난 명봉산

 

 

(명봉산 정상에서)

 

 

명봉산은 서봉산으로부터 서봉지맥을 따라 남쪽으로 15여분 내려오면 서쪽으로 전망이 탁트이는 218m봉이 나오고 다시 3분정도 진행하면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한참을 걷다보면 닿는 곳이다.

서봉산 등산로와 달리 호젓한 산길을 홀로 걷는다.

사람의 왕래가 적은 산길은 쌓인 낙엽으로 푹신푹신하다.

맨발이 되고픈 마음을 꾹 참는다.

아직은 낙엽 밑으로 얼어있는 경우가 많으니 사고의 위험 때문이다.

계절은 봄으로 성큼 닥아와 바람도 봄바람이다.

봄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히며 고독을 몰고온다.

봄바람과 함께 찾아온 고독이 가솜속에 잠시 머물다 떠난다.

애절한 그리움이 밀려와 텅빈 가슴을 휘저어 놓고 떠난다.

아무도 없는 산길이 꼭 나의 인생길 같아 애잔하다.

그래도 봄바람과 친구가 되어 걷다보니 명봉산 정상이다.

정상이라고 해봐야 그 흔한 표지판 하나 없지만 그곳에서 배낭 속 사과 한알을 까먹으며 휴식을 취해 본다.

그리고 정남면 문학리 쪽으로 방향을 잡아 길을 나선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4호로 관리되고 있는 홍승인고가)

 

문학리는 조선시대 중엽부터 전주 최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문학을 숭상했다고 하여 생긴 동네이다.

그 문학리에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4호로 관리되고 있는 홍승인고가를 들른다.

문이 잠겨있어 겉모습만 감상하고 날머리인 309번 도로로 나와 시내버스를 기다리니 5시간에 걸친 내고향 화성시와의 사랑나누기를 끝낸다.

 

(이 글속의 전설은 화성문화원 홈페이지를 전제하였으며, 지명에 대한 설명은 두산백과 인터넷판을 참조하였음을 밝혀둔다.)

 

 

(답글)

  • 만병초

    아름다운 전설이 살아 숨쉬는 화성...나그네님의 재미난 산행이야기에 단숨에 읽고 말았네요. 아주 즐거웠습니다. 2013.03.05 13:26

  • 은미

    얕은 뒷동산이지만 나그네님이 산행기로 불러주니 거대한 산으로 달려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로 더욱 재미있는 글 즐기며 읽습니다. 2013.03.05 17:17

  • 이원

    나그네님의 재미난 글을 읽으면 너무 재미가 있어 시간이 어떻게 가는줄 모르겠네요. 2013.03.06 12:27

  • 유진

    아무도 없는 산길이 꼭 나의 인생길 같아 애잔하다...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고독감을 느낀다는 도시인들...나그네님은 안그럴것 같은데요. 항상 주위가 와글와글..ㅎㅎㅎ
    2013.03.07 11:47

  • 이연

    나그네님의 글로 인해 상방산 명봉산 산같지도 않은 산들이 이름을 자랑처럼 내밀고 있네요. 즐감하고 갑니다. 2013.03.09 11:04

  • 쌍룡

    나그네님의 구수한 옛날이야기에 산행의 묘미가 살아나네요.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2013.03.11 12:48

  • 숙녀

    낮고 작은 산이지만 나그네님과 함께라면 큰산이되고 멋진 산이 될거 같아요. 산행기 내내 즐기고 갑니다. 2013.03.12 12:41

  • 준꼬

    혼자서도 잘 걸으시나봐요. 자연을 친구로 삼아...두런 두런 이야기도 나누면서... 2013.03.14 16:34

     

  • 김광회 13.03.24. 11:16
    맨발은 어느일정한 산이 정해저 있나봅니다.ㅎㅎ
    산이 그렇게 좋은지요. 잘보고갑니다.
     
    이길선 13.03.24. 15:49
    정말 오늘은 맨발이 아니네유^^^^*
     
    남윤철 13.03.26. 14:00
    언제나 재미있는 산에 얽힌 전설과 건강한 모습의 사진들을 보고 마음이 정화됨을 느낌니다.
    항상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 따스한마음(회장) 13.03.06. 16:33
    혼자걷는 그길이 쓸쓸하시면 언제구 불러주세요
    동행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ㅎㅎㅎ

     

  •   브레드 13.03.05. 11:20

    수원 주변의 산들을 종주 하셨군요!~ 나도 조금더 시간지나면 서울의 산 종주한다고 설쳐댈것 같습니다. 도봉산,수락산,사패산,북한산,불암산,5대산 다넘을때까지 잠안자고 해야겠다고 마음먹겠군요,그러다가 나혼자 보낼 자그만한 산하나 찾으면 로또 맞은 것처럼 좋아할것 같습니다.
     
    아드반 13.03.11. 15:36
    홀로 걷는 길...나그네님 분위기 만땅..^^

     

  • 최중영(혜안) 13.03.06. 09:27
    부럽습니다 ... 난 수원관내의 아름다운 산을 언제 다녀보지요... 감사합니다
     
    3대장-전용훈 13.03.06. 17:14
    소중한 후기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