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나그네/맨발걷기 경험담

맨발로 소요산을 소요(逍遙)하다

맨발나그네 2009. 6. 26. 07:02

● 산행일시 : 2009년 4월 12일 (日) 10:20 ~ 15:20

                     (소요시간 5시간 00분, 휴식 포함)

● 누 구 랑 : 중고딩동문및 산7000 산악회원들이랑 벙개로

● 산행코스 : 소요산역-하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나한대-의상대-공주봉-매표소

● 사진은 ? : 산7000 부회장이신 이규범님 작

 

중고딩 동문과 산7000의 몇몇 회원들과의 벙개산행이다.

각자 소요산역에서 10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수원에서는 화서역에 7시에 만나 출발이다.

모두 낮익은 모습들이 모여든다.

 

 

수원을 출발하여 성북역에서 한번 갈아타고 2시간 반만에 소요산역에 도착이다.

천수백년전 신라의 서울 서라벌을 출발하여 며칠만에야 소요산에 올 수 있었던 요석공주가 환생했다면 무지 부러워했을 전철로 소요산을 간것이다.

정말 편리한 세상이다.

집에서 왕복 5시간, 요금 5,200원으로 소요산을 다녀왔으니 말이다.

오늘날이었다면 요석공주가 경주에서  KTX와 전철을 이용하여 아들 설총과 함께 소요산을 찿아와 원효를 만날 수 있었을 것이고 원효 또한 요석공주와 사랑을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속된 생각을 전철 안에서 해본다.

하긴 세속의 연을 끊고 소요산으로 온 원효 입장에서는 요석공주의 잦은 출현이 반가울리 없었을 것이고 천리길 멀다 않고 달려온 요석공주는 속리교앞에서 먼발치로 바라보다 이내 서라벌로 되돌아가야하는 날이 비일비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또다른 속된 생각에 입가에 웃음이 돈다.

 

 

 

오늘은 소요산(逍遙山)을 산려소요(散慮逍遙)하기 위한 날이다.

그것도 맨발로 말이다.

산려소요(散慮逍遙)란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자연속에서 한가롭게 즐긴다는 뜻을 가졌단다.

소금강이라 불리우며 대자연의 많은 수림과 자연경관을 갖춘 소요산의 유래가 조선시대 당대의 지성인 화담 서경덕, 봉래 양사언과 매월당(김시습)이 자주 소요하였다 하여 "소요산"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길을 맨발로 중고딩 동문들과 산7000의 몇몇 회원들과 함께 걸으니 그야말로 꽃피는 봄을 옛날 선비가 되어 만끽한다.

화담이나 봉래, 매월당처럼 자주는 아니지만 소요산을 소요할 수 있게한 동문들과 산7000회원들이 고마울 뿐이다.

 

 

 

소요산까지 전철 개통으로 등산객이 인산인해다.

그들 틈에 끼어 일행 열명이 산을 오르는데 식당 삐끼(?)께서 친절히 입장료 안내고 산을 오르는 법을 안내하고 있다.

하긴 국립공원은 모두 입장료가 폐지된 마당에 어떤 명목인지 모르지만 입장료를 받는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는것 같다.

그렇다고 입장료를 내지 않고 산을 오른 우리도 약간은 가슴이 뜨끔하다.

그냥 원효와 요석공주의 러브스토리를 전해듣는 값이라고 생각하면 편할것을........

하여간 그바람에 나중에 하산할때 자재암을 들르지 못했으니 입장료 안낸 값을 톡톡히 치룬것이라......

 

그뿐인가?

올라가는 길에 시들음병에 걸린 참나무들을 베어내서 토막을 낸 후 숨어있는 벌레를 훈증해 죽이고자 비닐로 감싸 밀봉한  나무토막 뭉치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인간만 포악해 지는 것이 아니고 이제 벌레들까지 독해져 인간들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요산역을 출발한지 1시간 반정도 자재암 좌측 능선을 따라 맨발로 오르니 하백운대이다.

백운산이란 이름을 가진 산은, 경기포천의 백운산, 강원 정선의 백운산, 강원 원주의 백운산, 경기의왕의 백운산, 인천의 백운산, 전남광양의 백운산,경남함양의 백운산, 부산 기장의 백운산. 경남밀양의 백운산이 있고 경기양평 용문산의 백운봉, 북한산의 백운대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데 이 소요산에는 그 백운을 상중하로 나누어 백운대란 이름을 붙였다.

이 땅에 유독 흰 구름의 백운산이 많은 것은 우리 조상들께서 산을 두 다리로 오르기보다는 두 눈으로 바라보는 대상으로만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백운대를 지나 나한대로 향하는 길에 점심상을 펼친다.

이것 저것 준비를 해오겠다던 제니님이 사정이 있어 참석을 못해 걱정을 했는데, 웬걸 산토끼님의 준비는 그야말로 부페 수준이다. 

홍어회, 돼지껍질요리, 갈비찜 등등..... 

노루귀님이 싸온 문어회는 또 어떻고.......

 

  

 

 

상백운대에서 나한대에 이르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점심에다가 한잔씩 걸친 곡주에 모두 힙들어 한다.

맨발인 내게도 쉽지 않은 길이다.

그러나 노송과 기암이 빚어낸 절경과 함께 암름길을 오르내리는 재미도 쏠쏠하다.

 

 

 

 

 

 

지나가는 아가씨 두명이 다시는 소요산에 안오겠다고 다짐을 하며 지나간다.

소나무밖에 볼게 없단다.

내생각은 다르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단풍이 지천인 가을이면 더 좋겠지만,  이 봄도 진달래 아름답게 맵씨를 뽐내고, 입구의 벗꽃 또한 무지 아름답다.

소나무밖에 없는 그 소나무도 모두 멋진 기품을 뽐낸다.

더군다나 이곳은 원효와 요석공주의 러브스토리가 곳곳에 배여있는 그런 산이다.

 

 나한대이다

의상대에 16m 못 미치지만 정상부가 비교적 평평하여 잠깐 머무르며 궁극의 깨달음을 얻어 나한이 되는 데는 이만한데도 없다 싶다.

 

 

 

나한대에서 의상대로 오르는 길은 철계단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하는 길이다. 

뾰족한 바위돌이 많아 맨발 산행에 어려움이 있지만 원효가 도를 닥듯, 그런 기분으로 걷는다.

 

 

 이제 소요산 최고봉인 의상대(536m)이다.

뾰족한 암벽이다. 

그런데 왜 최고봉이 원효대가 아니고 의상대일까 하고 생각해 본다.

신라시대 쌍벽을 이루던 두 고승. 둘은 같이 유학길에 올랐다가 원효가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서로 가는길을 달리했던 의상대사에 대한 예의로 그런 이름을 붙인건 아닌가 하는 괜한 망상에 빠져본다.

이곳에 잠시 머무는데 저쪽 공주봉에서 예불을 드리는 요석공주의 숨소리가 여기까지 전해오는 듯한 전율을 느낀다.

 

 

 

 

 

 

 

의상대에서 공주봉에 이르는 길도 쉽지 않다.

거기다  모두들 약간 지친 모습이다.

앉아서 엉기는 내모습도 가관이다.

 

 

 공주봉이다

맨발인 나도 발바닥이 아리지만 신라 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가 소요산 아래 별궁에 거쳐하며 아침저녁으로 올라가 원효대사가 수도하는 원효대를 향해 예배를 올렸다는 공주봉의 애절한 사연을 생각하며 힘껏 마지막 피치를 올리며 오른 공주봉이다.

그곳에서 먹은 시원한 맥주 한잔은 정말 꿀맛이었다.

 

  

 

 

 

내려오는 길 전망바위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지금까지 지나온 하중상백운대와 나한대, 의상대, 공주봉을 조망해본다.

 

소요산은 산세가 그다지 장쾌하고 웅대하지는 않지만 형상미의 극치를 보이듯 뾰족뾰족한 기암괴석이 절묘하게 봉우리를 이루어 놓아 만물상을 연상케하고, 심연의 계곡은 오묘한 정취를 발산한다. 

 

 

 하산길의 뒤풀이는 항상 정답다.

더군다나 오늘은 꼭 참석하기로 하고 다른 일때문에 아침에 같이 하지 못한 제니님이 양주 한병을 싸들고 그 먼 소요산까지 달려와줘 남달랐던 뒤풀이 였다.

 

다만 시간관계로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이야기가 깃든 자재암에 들르지 못했으나, 전해오는 이야기로나마 대신할까 한다.

 [

소요산에는 곳곳에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이야기가 스며 있다.  요석공주가 머물렀다는 별궁터와 원효가 수도했다는 원효대도 있고 정상인 의상대 옆에 있는 공주봉(원효가 요석공주를 두고 지은 이름)도 있다.  산 중턱의 '자재암'은 원효대사가 도를 깨친 곳으로 원효가 요석공주와 인연이 있은 후 심산유곡인 이곳을 찾아와 수행하다가 절을 지었다고 한다.  수행 도중 관세음보살과 친견하여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하여 자재암이라 했다고 한다. 

자재암 주변엔 아담한 물줄기의 폭포가 널려 있다.  원효폭포, 옥류폭포, 청량폭포, 선녀탕 주변엔  여름철마다 피서객 들로 북적댄다. 자연석굴인 나한전과 산중턱의 금송굴도 신비롭다.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혼란한 시기에 생존하였던 원효 (元曉 617-686) 는 의상과 더불어 당나라에 유학하려 두차례(34세, 650년 및 45세, 661년) 나 시도하였으나 자신의 마음밖에  따로 법이 없음을 깨닫고 혼자 되돌아와 보편적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왕성한 저술,선교활동을 펴,그 사변력, 통찰력과 문장력에 대한 명성이 항간에 자자하였다. 

  

그는 광대들이나 쓰는 무애박을 치고, 무애가를 부르며, 무애춤을 추며, 광대, 백정, 기생, 시정잡배,  몽매하고 늙은사람들 사이를 방방곡곡 떠돌며 춤추고 노래하며 술마시고 거문고를 켜며 무수한 대중에게 불법을 전하였다. 코흘리개 아이까지도 부처에 대해알게 되었다. 김춘추의 둘째누이인 요석공주(瑤石公主)는 첫남편을 백제전투에서 잃고 홀로 되었는데 불심이 깊었던 공주는 인격이 고매하고 화랑시절 백제전투에도 참가했던 원효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는  667년 문무왕 7년경(51세) 부왕인 태종무열왕의 과부공주인 요석과 만나 얼마후 설총을 낳고 이후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 小姓居士) 라 하며 무애의 보살행을 행하였다 한다.결혼전 원효는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누가 자루빠진 도끼를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이를 귀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다는 원효의 결혼에의 관심으로 보는 견해도 많지만 새 시대의 지평을 열어보이리라는 사상사의 선언으로 보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 소요산에 가면 원효가 과연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알수 있는 자취가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원효폭포에 얽힌 전설 도 한가지 덧붙인다

 

스님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망설였다.

여인은 황급하게 문을 두드리며 스님을 불렀다.

스님은 문을 열었다. 왈칵 비바람이 방안으로

밀려들면서 방안의 등잔불이 꺼졌다.

 

『스님, 죄송합니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찾아와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비를 맞고 서 있는 여인을

보고도 스님은 선뜻 들어오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스님, 하룻밤만 지내고 가게 해주세요.
 

여인의 간곡한 애원에 스님은 문 한쪽으로 비켜섰다.

여인이 토막으로 들어섰다.

『스님, 불 좀 켜 주세요. 너무 컴컴해요.

스님은 묵묵히 화롯불을 찾아 등잔에 불을 옮겼다.

 

방 안이 밝아지자 비에 젖은 여인의 육체가 눈에 들어왔다.

와들와들 떨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스님, 추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제 몸 좀 비벼 주세요.

여인의 아름다움에 잠시 취해 있던 스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공연히 들여놨나 싶어 후회했다.


떨며 신음하는 여인을 안 보려고 스님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비에 젖어 속살이 들여다보이는

여인의 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것.

 

내 마음에 색심이 없다면 이 여인이 목석과 다를 바 있으랴.

스님은 부지중에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여인을 안아

침상에 눕히고는 언 몸을 주물러 녹여 주기 시작했다.

풍만한 여체를 대하자 스님은 묘한 느낌이 일기 시작했다.


스님은 순간 여인을 안아 침상에 눕히고는

언 몸을 주물러 녹여 주기 시작했다.

스님은 순간 여인을 침상에서 밀어냈다.

「나의 오랜 수도를 하룻밤 사이에 허물 수야 없지.

이미 해골 물을 달게 마시고 「일체유심조」의 도리를

깨달은 스님은 다시 자기 정리를 시작했다.

「해골은 물그릇으로 알았을 때는 그 물이 맛있더니,

해골을 해골로 볼 때는 그 물이 더럽고구역질이 나지 않았던가.


일체만물이 마음에서 비롯된다 하였으니내 어찌 더 이상 속으랴.

이 여인을 목석으로 볼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여인으로 보면서도 마음속에 색심이

일지 않으면 자신의 공부는 온전하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다시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여인의

몸을 비비면서 염불을 했다. 여인의 풍만한 육체는

여인의 육체가 아니라 한 생명일 뿐이었다.

스님은 여인의 혈맥을 찾아 한 생명에게 힘을 부어주고 있었다.

 

남을 돕는 것은 기쁜 일. 더욱이 남과 나를 가리지 않고

자비로써 도울 때 그것은 이미 남을 돕는것이 아니라 자기 삶이 되는 것이다.

도움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구별이 없을 때

사람은 경건 해진다. 여인과 자기의 분별을 떠나

한 생명을 위해 움직이는 원효 스님은 마치

자기 마음을 찾듯 준엄했다. 여인의 몸이

서서히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여인은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스님 앞에 일어나 앉았다. 여인과 자신의

경계를 느낀 스님은 순간 밖으로 뛰쳐나왔다.

폭풍우가 지난 후의 아침 해는 더욱 찬란하고 장엄했다.

 

간밤의 폭우로 물이 많아진 옥류폭포의 물기둥이

폭음을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스님은 훨훨 옷을 벗고 옥류천 맑은 물에 몸을 담 그었다.

뼛속까지 시원한 물속에서 무한한 희열을 느끼는데

여인이 다가왔다.
 

『스님, 저도 목욕 좀 해야겠어요.

여인은 옷을 벗어 던지고는 물속으로 들어와

스님 곁으로 다가왔다. 아침 햇살을 받은 여인의

몸매는 눈이 부셨다.

스님은 생명체 이상으로

보이는 그 느낌을 자제하고 항거했다.


결국 스님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너는 나를 유혹해서 어쩌자는 거냐?

『호호호, 스님도. 어디 제가 스님을 유혹합니까?스님이 저를 색안으로 보시면서.

큰 방망이로 얻어맞은 듯 순간 스님의 머리는무한한 혼돈이 일었다.

「색안으로 보는 원효의 마음」이란

여인의 목소리가 계속 스님의 귓전을 때렸다.

거센 폭포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계속하여 여인의 음성이 혼돈으로가득 찬 머리속을 후비고 들어올 뿐.

 

「색안으로 보는 원효의 마음」을 거듭거듭 뇌이면서

원효스님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폭포소리가들렸고 캄캄했던

눈앞의 사물이 제 빛을 찾고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의식되는 눈앞의 경계를 놓치지 않고 원효

스님은 갑자기 눈을 떴다.

원효스님은 처음으로 빛을 발견한 듯 모든 것을 명료하게 보았다.

「옳거니, 바로 그 거로구나. 모든 것이 그것으로

인하여 생기는 그 마음까지도 버려야 하는 그 도리!

스님은 물을 차고 일어섰다. 그의 발가벗은 몸을 여인 앞에

아랑곳없이 드러내며 유유히 걸어 나왔다.


여인은 어느새 금빛 찬란한 후광을 띤 보살이 되어

폭포를 거슬러 사라졌다. 원효 스님은 그곳에 암자를 세웠다.

자기의 몸과 마음을 뜻대로 한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자제암」이라 했다


주변의 산과 물, 여인과 나무 등 일체의 모습이생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