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나그네/맨발걷기 경험담

賢妻 광교산의 품에서 惡妻를 생각해 보다

맨발나그네 2010. 9. 21. 11:20

(미인시리즈1) 미(美)에 대한 정의와 현대 세계의 10대 미인과 현대 한국의 시대별 미인 ( http://blog.daum.net/yooyh54/291 )

 (미인시리즈2) 중국의 10대 미인과 미인의 조건 ( http://blog.daum.net/yooyh54/295  )

(미인시리즈3)역사속의 한국 미인들 ( http://blog.daum.net/yooyh54/301  )

(미인시리즈4) 팜므파탈 ( http://blog.daum.net/yooyh54/309  )

(미인시리즈5) 조강지처 ( http://blog.daum.net/yooyh54/243 )

 

 

(미인시리즈6)

賢妻 광교산의 품에서 惡妻를 생각해보다

 

● 산 행 지 : 광교산 형제봉-시루봉( 수원시 )

● 산행일시 : 2010년 9월 19일 (일)

● 누 구 랑  : 산7000산악회 번개모임

● 산행코스 : 경기대-형제봉-시루봉-노루목-상광교버스터미널

 

 

정말 오래간만에 만나는 조강지처 광교산이다.

하긴 이런저런 일로 바빠 조강지처 뿐 아니라 그 많은 애인(山)들의 유혹도 들어 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산7000에서 번개산행이 있다길래 만사 제처두고 길을 나선다.

조강지처 광교산이 추석을 며칠 앞둔 휴일이어서 인지, 날씨가 제법 선선해져서 인지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만원사례이다.

 

 

그 사람들 틈에 끼어 조강지처(광교산)의 품에 안긴다.

꽤 오래간만에 들렸건만 그 넉넉한 품으로 말없이 맞아주는 조강지처 광교산이야 말로 현처(賢妻)임에 틀림없다.

賢妻 광교산이 있기에 이산 저산 기웃거리며 운우지정을 나누다 어느날 불쑥 나타나 그녀의 품에 안겨 또다른 산과의 데이트를 상상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賢妻, 良妻에 반대되는 사람을 惡妻라 일컽는다.

그동안 내가 겪어던 惡妻(惡山)에는 어디가 있을까?

맨발로 고통을 안겨주었던 진도 동석산?

아님 맨발로 힘들었던 설악의 공룡능선?

하긴 현처라 일컫는 조강지처 광교산도 내가 맨처음 맨발로 경기대에서 지지대고개까지 걸을 때에는 나를 엄청 고통스럽게 한 악처였던게 분명하다.

아니 내가 악처로 기억하는 진도 동석산이나 설악의 공룡능선을 산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고 보면 현처와 악처의 경계는 보는 눈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부부의 일을 제3자의 눈으로 재단한다는 것은 분명 어불성설이다.

그래도 말이 나왔으니 악처에 대해서 이것 저것 뒤적여본다.

 

惡妻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먼저 떠올린다.

소크라테스는 결혼을 해야 옳은 것이냐 안해야 옳은 것이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결혼하시요. 당신이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고, 나쁜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터이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세계 3대 악처중의 으뜸으로 소문나 있는 사람이다.

크산티페가 경제에는 무능력하여 살림도 돌보지 않고, 알아 듣지도 못하는 말을 늘어 놓는 소크라테스에게 바가지를 긁어 댔지만 대꾸도 없자 화가난 그녀가 물통의 물을 소크라테스에게 쏟아 부었는데, 그는 태연하게 " 허허, 천둥이 치더니 소나기가 쏟아지는구려"라고 말했다 한다.

 

(소크라테스에게 물을 끼얹는 크산티페(1655), Reyer van Blommendael c. )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그런 악한 여자와 결혼하여 고초를 겪느냐고 묻자, "훌륭한 기수는 가장 성질이 사나운 말을 선택하는 법이오. 그런 말을 잘 훈련시켜서 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말이라도 다 잘 탈 수가 있기 때문이오. 나 역시 성질 나쁜 아내를 잘 달랠 수만 있다면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잘 달랠 수가 있을 것이 아니오"라고 했단다.

그래서 후세에 소크라테스는 명망높은 철학자로 추앙받고, 크산티페는 악녀로 매도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소크라테스가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이혼을 당하고도 남을 인간이다.

부부는 인생의 반려일진대, 가정사는 돌보지 않고, 아고라에 나가 젊은이들과 알아듣지도 못할 개똥철학(크산티페의 입장에서 보면)만 늘어놓는 소크라테스에게 누군들 가만있었겠는가?

부부가 원만하고 행복하려면 서로 양보하고 서로 인내하고 서로 관용해야 한다.

 

 

(톨스토이와 소피아)

 

기왕 악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세계 3대 악처중의 2번째로 지목되고 있는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를 이야기 안 할 수 없다.

톨스토이가 누구인가? <전쟁과 평화><부활>등 주옥같은 소설들의 저자이자, 러시아의 대문호로 추앙받는 사람이다.

그가 가정생활의 모순을 해결할 방법중의 하나로 몇차례 가출을 생각하던 중, 말년인 82세(1910년)에 장녀와 주치의를 데리고 집을 떠나 방랑의 여행길에 올랐으나 도중에 병을 얻어 아스타포보(현 톨스토이역)의 역장 관사에서 숨을 거두게되자, 사람들은 이 모든 책임을 소피아에게 돌리며 그녀를 세계3대 악처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하지만 두 살 때 어머니를 잃고 모성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톨스토이가 많은 여성과의 염문을 뿌리다 소피아와 결혼하게 된다.

두사람은 13명의 자녀를 두게 되는데, 유모를 두지 않겠다는 톨스토이의 완강한 고집 때문인지, 허약하게 태어나서인지는 모르나 자식들 중 6명은 어려서 죽게 된다.

또한 악필이었던 대문호 톨스토이의 원고는 사람이 읽을 수 없을 정도였는데, 많은 분량의 악필 원고들을 교정해야 했던 것은 매번 소피아의 몫이었다.

소피아는 참고 참았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방탕은 한때의 치기로 넘겨주고, 유모를 두지 않는 것이나 성격이 모난 것은 모정에 굶주려서 그럴 수 있다고 이해했으며, 글씨는 악필이지만 글을 잘 써 저작권료도 제법 두둑하게 받아와 크산티페처럼 생활고에 시달리게 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또다시 일을 저질렀으니, 생활신조의 변화가 온 톨스토이가 재산과 저작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였고, 이 문제로 두 사람간에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부부간의 일이니 두 사람만이 아는 일이겠지만, 한 발짝 물러서서 소피아의 그럴 수 밖에 없었을 사정을 이해해 보려한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

 

또다른 세계3대 악처중의 하나로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를 꼽는다.

그녀를 악처로 꼽는 사람들은 그녀가 남편의 불규칙한 수입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낭비벽을 가지고 있으며, 매년 출산을 하였으며, 변덕스럽고 이성적이지 못한 성품 탓에 천재작곡가 모차르트가 3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모차르트는 첫사랑 알로시아 베버를 무척 사랑했지만 모차르트의 뻔한 앞날을 내다본 알로시아 어머니의 반대와 귀족가문의 여자와 결혼하길 원하는 아버지의 반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오, 신이여. 제 이야기를 들어보소서>, <포폴리 디 테살리아>등 그녀를 위해 곡을 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후 남은 세딸을 결혼시키기 위해 독신남을 위한 하숙집까지 차렸던 알로시아의 어머니의 마수에 걸려 그녀의 동생인 콘스탄체와 결혼을 하게된다.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는 철저한 페미니스트였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모차르트의 인생을 지배한 다섯 여자가 있으니, 허영심 많고 자기위에 군림하려 든 아버지와 달리 항상 자상했던 어머니 안나 마리아, 음악의 동반자이며 자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준 누나 난넬, 소꿉친구이면서 이성으로 처음 좋아했던 테클라, 첫사랑인 알로시아, 그리고 아내인 콘스탄체라고 한다.

두사람은 9년간의 결혼생활 중 무려 여섯명의 자녀를 낳았다. 물론 어릴 적 모두 죽고 두명 밖에 살아 남지 않았지만 말이다. 풍만한 육체파 미인이었던 그녀를 모차르트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낭비벽에 변덕스러움, 기분이 좋을 때는 온천 요양중에 다른 사람과의 스캔들로 나쁜 소문이 돌기도 하고, 우울할 때는 자살을 기도하는 등 감정 기복이 심했다고 한다.

거기다 연이은 자식들의 죽음, 왕과 귀족들의 후원금으로 꾸린 궁핍한 생활등을 벗어나고자 유럽 순회공연을 다녔지만 빚은 늘어나 모차르트는 파산에 이르고, 과로, 영양실조에 이르게 된다.

결국은 '레퀴엠'을 작곡하던 중 심장쇼크와 과다출혈로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35세였다.

그가 죽을 때, 콘스탄체 역시 병을 얻었고, 큰 비가 내려 장례식에 참석을 못했고, 지인들중 참석한 사람이 없어 지금까지도 모차르트의 유골이 어디에 묻혔는지 모르고 있어 콘스탄체는 더욱 더 악처의 대명사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 ... 정말 보고 싶다오.

   .....

  자, 이제 정말 건강하도록 해요. 자주 웃고 재미있고 행복한 생각만 해요.

  ....

 내 생각도, 내 이야기도 자주 하도록 하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듯 날 영원히 사랑해 주오.

그리고 영원한 나의 사랑이 되어주오.

안녕, 몸조심해요.

자 잡아봐요. 붕! 붕!붕!

설탕처럼 달콤한 키스 세개가 당신을 향해 날아가고 있어요.

                                            모차르트/1791년 7월 6일 /빈>

이란 편지에서 볼 수 있듯이 모차르트는 콘스탄체를 깊이 사랑하였으며, 이런 사랑을 받고 있던 여인을 악처라고 한다면 세상에 악처 아닌 사람을 찾을 수나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역대 작곡가 중에는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 이외에도 푸치니의 부인 엘비라, 하이든의 부인 마리아 알로이지아를 악처의 반열에 올리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그중에서 알로이지아가 남편 하이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나마 말년의 남편에게 자유를 주었다고 말한다.

하이든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던 테레제라는 예쁜 아가씨가 있었다.

그녀를 인생의 반려자로 생각한 하이든은 정성을 다했으나, 정성이 부족한 탓인지 그녀는 수녀가 되고자 수녀원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에 테레제의 아버지는 꿩대신 닭격으로 동생 테레제 대신 언니 마리아가 있으니 결혼하기를 졸랐고, 1760년 드디어 혼기 놓친 31세의 노처녀 마리아 알로이지아와 세살 연하의 28세 하이든은 결혼에 이르게 된다.

이 결혼으로 하이든은 40여년간 후회를 하며 살았다고 하니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는데 신중의 신중을 기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주부로서 살림이 엉망인 것이야 참으면 되지만, 연습실까지 찾아와 훼방을 놓기 일쑤인 질투심에 이르면 할 말을 잃었다 한다.

하이든이 완성한 악보는 머리를 세트하는데 사용한다든지, 빵 만드는 밑종이로 사용하는 등 음악에 대한 몰이해에 이르면 수녀원으로 떠난 처제 테레제가 더욱 더 생각 났을 것이다.

하이든이 훗날 "나의 아내인 마리아는 내가 음악가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마리아는 내가 작곡가이든 구두 수선공이든 그저 돈만 벌어다 주면 되었다"라고 술회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하이든은 12여년간이나 젊은 유부녀였던 루이지아 포르첼리와 연민을 거치고, 동정을 거쳐 친구 이상의 마음으로 지내왔다고 한다.

마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동생 테레제와 루이지아까지 마음속에 두고 있었으니 속끓이를 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루이지아의 두 아이중에 두 번 째 아이는 하이든의 자식이라는 소문까지 있었는데, 정작 마리아와의 사이에는 자식까지 없었으니 말이다.

그저 부부사이의 일은 부부 사이에 놔 두면 될 것을 세상사람들은 배율도 좋지 않은 현미경을 들이대고 까발려 이야기거리로 만들지 못해 안달을 하곤 한다.

 

(엘비라)

 

푸치니는 <마농 레스코>, <나비부인>등의 작품을 남긴 '오페라의 달인'이다.

유부녀였던 엘비라와 눈이 맞아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였고, 원래 남편이 이혼을 해주지 않자 십 수년을 기다려 결혼을 했지만 끊임없이 여자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남자였다.

오죽하면 엘비라 앞에서도 "예술가라면 모름지기 여자를 알아야 한다"라며 당당했다고 한다.

그러니 엘비라의 속은 썩어 문들어져 갔고, 그런 과정에서 엘비라가 도리아라는 하녀를 의심하여 닦달하자 그 하녀가 자살에 이르게 된다.

부검결과 도리아가 쳐녀임이 밝혀졌고 그 가족이 엘비라를 고발하였는데, 푸치니가 거액을 들여 유족을 달래고 엘비라를 구했다 한다.

그래서 후세사람들은 엘비라를 악처의 반열에 올려 놓은 것 같은데,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혼까지 하고 선택한 사랑인데 남편이라는 작자가 허구 헌날 바람이나 피고 돌아다니면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아닌 다음에야 그 뉘라서 눈이 뒤집히지 않으리오.

하긴 푸치니의 다양한 여성편력 덕분에 후세의 사람들은 여성 심리묘사가 잘 된 그의 작품을 감상하게 되었으니 잃는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나보다.

 

이제 다시 작곡가에서 문인으로 넘어가 보자.

러시아의 대문호로 러시아 문학의 기초를 마련하여 '근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로 불린푸슈킨은 문학에 대한 천재성과 함께 귀족, 발레리나, 창녀등을 가리지 않는 방탕한 성생활로 명성을 떨쳤다.

심지어 자신이 안은 여인들을 정신적인 사랑을 나눈 여인과 육체적으로 사랑한 여인들로 나누어 기록 보관하였다고 하니 알만하지 않은가.

 

(나탈리아)

 

그런 그가 자유분망한 성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무도회에서 만난 뛰어난 미모를 가진 18세의 나탈리아와 첫눈에 반해 결혼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사교계의 화려한 아내와의 여러가지 문제로 정신적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그의 처형과 결혼한 청년 근위병 단테스가 푸슈킨의 아내 나탈리아에게 노골적으로 구애를 하고, 염문이 표면화되기에 이른다.

여기다 이 사건을 지켜보던 궁중의 귀족들이 푸슈킨을 제거하기 위해 익명의 쪽지를 보내니 그 내용은 이랬다.

"사방의 남자들에게 아내를 빼앗기고도 가만히 앉아있는 멍청이"라고.

푸슈킨의 인내심은 폭발했고,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하여 결투를 벌이게 되는데, 그 결투에서 푸슈킨은 복부에 치명상을 입어 37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뛰어난 천재성으로 불멸의 작품을 남긴 푸슈킨은 그렇게 아름다운 아내로 인하여 요절하게 되고 후세 사람들은 그의 부인 나탈리아를 악처의 반열에 올린다.

하지만 푸슈킨이 결투로 목숨을 잃은 데에는 그를 제거하기 위한 니콜라이 1세와 권력자들의 음모도 한 몫하였을 것이라고 하니 어찌 나탈리아에게만 돌팔매질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자고로 영웅호걸, 예술가, 문인들이 모두들 많은 여인들과 정을 나누었으며, 악처들에게 시달린 것 같다.

많은 연인(山)들과 운우지정을 나누고 있는 나도 그렇다면 영웅호걸이나 예술가, 또는 문인의 반열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건가?

나에겐 광교산이라는 조강지처인 현처가 있으니 그들하곤 좀 다르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추석연휴기간에 이 글을 읽으며 너무 길다고 투덜 댈 후배(?)가 있기에 이만 줄이고 비운의 천재 작가 푸슈킨이 유언처럼 남긴 시 한수를 읊으며 마치고자 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알렉산드로 푸쉬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순간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