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시리즈1) 맨발나그네되어 꽃비 속을 꽃멀미 하며 걸은 화성 ( http://blog.daum.net/yooyh54/263 )
(화성시리즈2)
화성(華城)의 가을에 빠진 맨발나그네
● 어 디 를 : 수원 화성(華城) 성곽 일주
● 언 제 : 2010년 10월 12일
● 누 구 랑 : 나 홀 로
요즘들어 걷기가 꽤나 인기를 끌고 있다.
오늘은 평일이지만 늦은 오후 시간 짬을 내어 걷기에 나서본다.
동의보감은 '약보(藥補)보다는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보다는 행보(行補)가 낫다'라며 약이나 음식보다는 걷기를 권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은 자연속에서 한가로이 걷는 것이야 말로 청복(淸福 : 맑은 즐거움)이라며 걷기를 권한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이나 걷는 것이 곧 청복이라던 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시대에는 그야말로 걷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걸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현대인은 너무 많이 차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결과로 당뇨, 동맥경화, 비만, 고혈압등 삶의 질을 떨어트리는 치명적인 질병들이 우리 가까이 머물며 인간들을 우롱하기에 이르렀다.
동의보감이나 허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걷기야 말로 최상의 행복이요 건강전도사다.
걷기는 자연치유이다.
걷기는 느림을 통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독일 작가인 크니케는 그의 저서 <인간과의 교제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걷는 것이 확실히 여행하는 가장 편안한 방법이다. 걸어가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
의식하지 못한 채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섞일 수 있다. 그리고 걷지 않으면 체험하지 못할 것들을 관찰 할 수가 있다.
걸으면 구속감을 느끼지 않는다. 가장 좋은 날씨와 가장 아름다운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원할 때면 어느 곳에서든 멈출 수 있고, 돌아올 수도 있다.
걸으면 육체가 튼튼해진다. 옷을 간편하게 입어도 되고, 차의 덜컹거림에 고통을 받을 필요도 없다.
식욕이 생기고, 잠이 잘 온다. 그리고 피곤과 배고픔 때문에 어떤 음식이나 어떤 자리에도 쉽게 만족한다'라고.
행복을 얻기 위해 길을 나선다.
제주도 '올레길'이 아니면 어떻고, '지리산 둘레길' 아니면 어떠랴.
전남 신안의 한 섬인 중도에는 짱뚱어다리가 있고 그 옆에는 해송숲과 어울리는 '철학의 길'이 있다고 한다.
경기도에는 '남한산성길'이, 충남에는 '백제길'이, 충북에는 '산막이옛길', 경북 안동에는 '퇴계오솔길'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유명한 길이 아니라도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숲길, 강변길, 고갯길, 논둑길, 마을길들이 널려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주변에도 많은 길들이 나와의 데이트를 기다리고 있다.
그중에는 오늘 걷고자 하는 화성(華城) 성곽 일주길도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화성의 성곽 일주길은 총 5,744m에 이르며 놀멍 쉬멍 역사와 함께 걷는 곳이다.
지난 4월 꽃비를 맞으며 꽃멀미를 하며 화성 성곽을 한바퀴 돌았었는데( ☞ http://blog.daum.net/yooyh54/263), 오늘은 가을의 중턱에 가을을 품은 화성 성곽을 맨발나그네 되어 걷는다.
오늘의 출발점은 화홍문이다.
장안문을 거쳐 화서문을 지나서는 성곽 바깥의 공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곳에서 진한 가을의 향수를 만난다.
가을의 중턱 서쪽으로 지고 있는 햇살을 받은 억새가 바람결에 춤을 추고 있다.
도심 한가운데서 만나는 억새의 향연은 나의 발걸음을 자꾸 잡아끈다.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를 만나고 그옆의 방향 표지판과 만난다.
산속에서 만나는 이정표는 그녀(山)의 성감대를 표시해 놓은 것 같아 항상 반갑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곳의 이정표는 스케일이 크다.
북극점이며 남극점 등 세계 중요지점의 이곳으로 부터의 거리를 가르키고 있다.
그렇게 놀멍 쉬멍 어슬렁 어슬렁 팔달문을 거쳐 지동 시장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남문시장을 통과하기가 쑥스럽다.
번잡한 시장통을 맨발로 걷고 있으니 여러 사람들의 눈길을 받아야만 한다.
나는 시장안 여러 풍경을 구경하고, 사람들은 그런 나를 힐끔 힐끔 구경한다.
지동시장 입구부터 다시 성곽 바깥쪽 길을 택한다.
거기에서 다시 한무리의 억새풀의 군무를 감상할 수 있다.
고색창연한 동남각루와 성곽을 배경삼아 억새들이 바람결에 무희로 변해있다.
그곳에서 또 한참을 머물며 그들과의 대화를 나눈다.
벽돌 한장, 돌 하나에도 그 시절 이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을 민초들의 애환을 이야기 하고, 설계자인 정약용, 진행을 맡은 초대 화성유수이자 화성성역 총리대신인 체재공, 이 성곽을 만든 화성부사 조심태와 이야기를 나눈다.
아니 그들이 성곽을 쌓으며 나눈 이야기를 엿듣는다.
이 화성의 축조를 결정한 정조에 대해서도 묻고, 그의 할아버지인 영조에 대해서도 묻는다.
정조의 증조 할머니인 '동이(숙빈 최씨)'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다시 길을 떠난다.
아직은 파릇파릇한 기운을 담은 잔디길 위를 맨발로 걸으니 꼭 양탄자위를 걷는 기분이다.
그동안 꽤 많은 세월을 화성과 함께 해왔지만, 이렇게 성곽 바깥쪽을 걸어보진 않았었는데, 성곽 안쪽길보다 훨씬 조용하고 부드럽다.
그렇게 창용문을 지나 다시 성곽 바깥쪽으로 방향을 잡아 걷는다.
동북공심돈이 있는 성곽 바깥쪽 공원에서 다시 가을꽃과 억새밭과 만난다.
석양에 하늘거리는 억새가 장관이다.
민둥산이나 신불산의 억새에 비하면 어림없겠지만, 엎드리면 코닿을 곳에 아주 훌륭한 억새파노라마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혹시 화성 성곽주변의 억새를 보려거든 저녁 어스름 석양이 질 무렵 찾으시라.
북동암문에서 북암문까지의 성곽 바깥쪽은 맨발로 걷기가 다소 불편하다.
그러나 출발한 상태이니 어쩔 수 없이 계속 걷는다.
그곳에서 올려다 본 하늘은 석양을 배경삼아 구름들이 또다른 군무를 펼치고 있다.
비록 수원팔경중의 하나인 <용지대월>은 아니지만, 그 모습 또한 아름답기 그지 없다.
북암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 또한 나를 가슴 벅차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북암문을 통과하여 다시 성곽 안쪽으로 들어온 후, 방화수류정을 거쳐 출발지인 화홍문에 도착하니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오늘도 세계문화유산 화성 성곽길을 맨발나그네 되어 홀로 걸으며 또 한번 가장 가난한 방법으로 부유한 천국을 맛보았다.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남쪽에 위치한 정문으로 화성축성(1794년)과 함께 건립되었다. 문은 화강암으로 홍예를 만들고 위에 2층의 육중한 목조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에는 낮은 담장을 둘러쌓았고 전면에는 반원형의 옹성을 검정벽돌로 쌓았는데, 이는 성문에 접근하는 적군을 뒤쪽에서 공격하기 위한 시설로 성문 앞으로 길게 반원형으로 빼어낸 것이다. 문의 좌우에는 옹성을 보호하기 위해 적대를 두었으나 도시화에 밀려 복원하지 못하였다. 문의 형태는 서울 숭례문(국보 제 1호)이나 흥인지문(보물 제1호)과 같은 형태이나 문루의 네 귀퉁이에 고주를 세우지 않고 평주 위에 이방을 고인 것이 약간 다르다. 문루 동쪽(외측 옹성안) 화강석 육축에는 당시 참여한 책임당상과 기술자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2층 문루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69호인 만의사 동종이 있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의 참화등 격동기를 견디면서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현재 [보물]로 관리되고 있다.
남포루(南砲樓) 남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남쪽 서남포사(서남암문)와 남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포루는 치성과 같이 성벽을 돌출시켜 검정벽돌로 쌓았으며 나무마루판을 이용 3층으로 구획하였다. 벽면에 포혈을 내어 화포를 두고 위에는 여담(담장)을 둘러 적을 위와 아래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서남암문 및 포사는 화성의 서남쪽 서남각루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암문은 성곽의 중요지점에 축조하여 양식 무기 등을 은밀히 반입하는 곳으로 성곽의 비밀통로이다. 이곳은 다른 4개 암문과는 달리 암문 위에 건물을 지었는데 이를 포사라고 한다. 밖으로는 서남각루로 이어지는 용도가 있으며 암문 중에서 특이한 곳이다. 서남각루(화양루)로 나가는 문으로 유일하다.
서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하나로 화성성곽 팔달산 서남쪽 끝머리에 있으며 일명 화양루라 부른다.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설치한 건물이다. 이곳에서 용도(甬道)(양편에 여담이 설치된 길 : 전시에 비상통로로 활용되도록 만듬)를 통해 170m에 이르면 서남암문(서남포사)이 있다. 화양루에서 바라 보이는 수원시 전경.
기본적으로 치성 위에는 누각이 없이 여장만이 설치되어 있으며 치는 "꿩"이란 뜻으로 본래 꿩은 제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서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포루는 성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군사들이 몸을 숨길 수 있는 건물을 세워 초소나 대기소와 같은 용도로 쓰이던 곳이다. 마루 아래 성벽 여장(담장)에는 여러개의 총구멍을 뚫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암문은 성곽의 비밀통로로 성곽의 굴곡된 부분이나 후미진 곳, 수목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 곳 등에 설치되어 있다. 서암문은 서장대의 남쪽 약 50m의 위치에 있으며 성문이 바깥쪽을 향하지 않고 옆으로 틀어져 있어 밖에서 구별하기가 어렵도록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서장대는 일명 '화성장대'라 불리우며 화성의 군사를 총지휘하는 본부로 성의 사방을 조망할 수 있도록 화성에서 가장 높은 팔달산 정상(해발 143m)에 위치하고 있다. 1795년(정조 19년) 원행시에 정조는 현륭원 참배를 마치고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훈련과 야간 훈련을 시행하였다. 이 훈련은 화성의 방어체제를 점검하고 일원적인 지휘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서 '화성성조주조식'과 '야조식'의 훈련규정에 따라 진행되었다. 2층 규모의 장대 주변에는 쇠뇌를 갖춘 팔각의 노대와 휴식을 취하는 군무소가 있었으나 현재 군무소(후당)는 복원하지 못하였다. 12개의 팔면주석(八面柱石)이 서장대를 떠받치고 있다.
치는 성곽의 요소 요소에 성벽을 돌출시켜 전방과 좌우방향에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병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화성에는 10개소가 있다. 서이치는 서장대와 서포루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타 치성과 동일하게 누각이 없이 여장만이 설치되어 있다. 서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화성장대와 서일치 사이 서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포루는 치성과 같이 성벽을 돌출시켜 검정벽돌로 쌓았으며 나무 마루판을 이용 3층으로 구획 하였다. 벽면에 포혈을 내어 화포를 두고 위에는 여담(담장)을 둘러 적을 위와 아래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서일치는 서포루와 서북각루 사이에 위치한 치성으로 누각이 없이 여장만이 설치되어 적병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활용되었다.
서북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서북쪽 화서문 위 팔달산 자락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서북각루 내부에서 바라본 북쪽 성곽이다. 서북각루에서 본 서쪽 성곽이다. 가까이 서일치와 멀리 서포루가 보인다. 누조(漏漕)로써 현안에 뜨거운 물이나 기름을 붓는 시설이다.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은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원형을 유지하여 [보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화서문은 화성의 서쪽에 있는 문으로 조선 정조 20년(1796년)에 완공되었고 동쪽에 있는 창룡문과 같은 규모이며 문을 보호하는 옹성도 같은 형식이다. 문루는 홍예문 위에 단층이며, 바깥쪽은 평여담이 설치되었고, 문안의 남쪽에는 수문청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며 바깥쪽은 한쪽이 터진 반원형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전돌로 쌓았고, 적을 막기 위해 세로로 길게 구멍을 만든 현안과 총과 활을 쏘는 구멍인 총혈과 사혈이 각각 뚫려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공포는 간단한 익공식이다. 화서문 홍예천장의 용그림이다. 화서문 내부 가구의 모습이다. 옹성은 여담을 두르고 통로를 만들었다. 서북공심돈은 화성의 2개 공심돈 중 하나로 화서문 옆 지척에 위치하고 있다. 공심돈이란 적의 동정을 살피는 일종의 망루로 수비와 공격을 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 공심돈은 목조 3층으로 안에는 계단을 따라 위로 오를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하여 총안과 포혈이 뚫려 있으며 주위 성벽보다 높게 하여 경계와 방어에 효율적으로 되어있다.
북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포루는 성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건물을 지은 것이며 성내에 있는 아군의 동향을 적이 알지 못하도록 설치한 시설물로 초소나 군사 대기소와 같은 곳이다. 포루 아래 성벽 여장(담장)에는 여러 개의 총구멍을 뚫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총구멍을 통해 바라 본 북쪽 성곽, 멀리 북서포루가 보인다.
북동적대 북동적대는 장안문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서적대와 기능 및 형태가 거의 같다. 적대는 성곽보다 높게 만들어서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였으며 총안등을 만들어 유사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북동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북쪽 장안문과 화홍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포루는 치성과 같이성벽을 돌출시켜 검정벽돌로 쌓았으며 나무마루판을 이용 3층으로 구획하였다. 벽면에 포혈을 내어 화포를 두고 위에는 여담(담장)을 둘러 적을 위와 아래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화성의 북쪽 수문으로 정조 19년(1795년)에 완성되었으나 1922년 7월 대홍수로 파손된 후 1932년 5월 9일 복원하였다. 이 문은 아름다운 일곱개의 무지개 홍예 돌다리 위에 문루를 세웠으며 홍예다리 위에는 빗물이 배수되도록 7개의 누조를 만들었다. 담장은 벽돌로 쌓았으며 타구를 만들지 않고 네모 모양의 대포구멍 8개를 만들었고 다시 그 위에 평담장을 만들어 소포구멍 4개를 내었다. 문루는 정면에 기둥 4개 측면에 기둥 3개이고 바깥쪽은 관문에 귀면을 그렸으며 이 문은 평소에는 성곽의 일부이자 교량으로 설계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시내를 관통하는 수원천이 범람하지 않도록 물길을 조정하는 구실도 하였다. 이 문은 일곱개의 수문을 통해 장쾌한 물보라가 넘쳐 나오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보고 수원팔경 중 [화홍관창]이라 불려지고 있다.
방화수류정은 다각형 정자로 본래 이름은 동북각루라 하며 화성에 있는 4개 각루 중 하나이다. 각루는 비교적 성곽의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 감시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설치한 건물이다. 뛰어난 건축미와 경관의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방화수류정은 연접한 용연(龍淵) 홍화문(華虹門)과 함께 화성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서쪽 벽에 십자(十字)무늬를 넣어 멋을 부렸다. 높은 주초 위에 세운 기둥이 아래는 둥글고 위는 네무지게 변화를 주었다.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살려 용연 수면 가운데 당주(섬)를 만들어 놓고 버드나무를 심었다. 남쪽 가파른 언덕 위 방화수류정과 용머리 바위 그리고 버드나무 줄기 사이로 떠오르는 보름달이 수면 위에 비추어지는 아름다운 정취를 용지대월이라 하며 수원팔경 중 하나이다. 용연에 솟아오른 용대가리 위에 방화수류정이 세워졌다. 용연의 배수구 이무기(석리두)이다.
적이 알지 못하도록 후미진 곳에 문을 내어, 평상시에 사람, 가축, 수레가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이 암문(暗門)이다. 비상시에는 문을 흙으로 채워 막아버릴 수 있다. 수원 화성에는 모두 다섯 개의 암문이 있다. 그 중 방화수류정과 동북포루 사이에 있는 것이 북암문이다. 북암문은 지형상으로 골짜기진 곳에 있어서 성 밖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북암문 바깥쪽에서 보면 암문 주변에 전돌로 둥글게 성벽을 쌓아 좌우벽이 첨성대처럼 보인다.
이 비는 전각국사(1307~1385)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우왕 11년(1385)에 만들어졌다. 진각국사는 13세에 출가하여 여러 절에서 수행하였고, 원라라에서 돌아와 치악산에서 은거하던 중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관직을 받았으며, 부석사를 중수하는 등 고려말기에 활약하였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글씨는 혜잠이 새겼다. 비의 형태는 장방형 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어 고려말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비는 본래 광교산(상광교동 산 41번지) 기슭의 창성사 폐사지에 있었던 것을 보물로서의 가치와 문화유산 보존관리 방안의 하나로 1965년 6월 9일 이곳을 옮겨 놓았다. 동북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포루는 성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위에 건물을 세워서 군사들이 적에게 노출되지 않게 하기 위한 초소나 대기소와 같은 곳이다. 건물 모양이 춤추는 아이의 머리에 수건을 돌려 맨 모습과 같다하여 일명 각건대라 한다. 동북포루에서 본 북쪽 성곽, 멀리 방화수류정이 보인다. 동북포루에서 본 수원시 전경이다. 동북포루에서 본 동쪽 성곽, 멀리 동장대(연무대)가 보인다.
수원 화성에는 모두 다섯 개의 암문이 있다. 그 중 북동암문은 동북포루와 동장대(연무대) 사이에 있는 것이다. 암문이란 성의 샛문으로 으슥하고 후미진 곳에 축조하여 적이 모르게 양식이나 무기 등의 물자를 반입하거나, 사람들이 은밀히 내왕할 수 있게 만든 비밀통로이다. 따라서 암문에는 누각도 없거니와 문의 크기도 겨우 말 한 필이 드나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으며 위는 보통 성곽처럼 되어 있다.
동장대는 화성의 2개 장대 중 하나로 일명 연무대라고도 부른다. 화성장대가 군사령관의 지휘소라면 동장대는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곳으로 지형은 높지는 않지만 사방이 트여 있는 낮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성의 동쪽 군사시설 중 중요한 곳으로 화성 시설물 중 가장 위용이 있는 곳이다. 동장대 뒤편으로 영롱담과 성벽에 이르는 석계이다. 동장대 뒷편에 있는 꽃담으로 일명 '영롱담'이라 한다.
동북공심돈은 화성의 2개 공심돈 중 하나로 창룡문과 동장대 사이에 있다. 내부가 속이 비어있고 나선형 모습으로 되어 있어 일명 소라각 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일종의 망루로서 수비와 공격을 할 수 있고 포를 쏠수 있으며 검정벽돌로 둥글게 축조한 건물은 우리나라에선 화성에만 있는 특이한 건물 중 하나이다. 동북공심돈은 원형 3층으로 구조하고 위에 목조건축물이 있다.
노대는 내부 시설없이 대 위에서만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게 만든 곳이다. 치(雉)처럼 돌출한 높이 13척 석벽 위에 방형 평면을 형성하고 전돌을 18척 높이로 쌓아 완성했다. 대의 넓이는 외벽의 폭이 19척이고 내면의 너비는 17.4척이다. 성벽으로부터 돌출한 길이는 20.5척이고 삼면에 원여담(圓女담)을 설치하였다. 성 밖 면에 현안을 만들어 접근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게 하였고 여담마다에 총구멍을 내었다.
이 문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 동녘 '동' 은 같은 뜻이라 연유한데서 창룡문이라 하고 조선 정조 19년(1795년)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6.25전쟁 때 전화를 입어 문루가 소실되고 문의 기틀인 홍예까지 크게 파손되었던 것을 1978년의 화성복원정화사업시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에 따라 옛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문루 하부 구조는 규모를 각기 달리하면서 내, 외 이중 홍예로 구축되어 있는 것이 특색인데 내홍예는 높이 3.97m, 너비 4.2m이고 외홍에는 높이 3.7m, 너비 3.6m로 홍예만으로 볼 때에는 장안문 보다 그 규모가 크다. 문루는 1층 건축물로 정면이 4.9m에 협문이 있고 수문청은 문안쪽 가장자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창룡문의 바깥으로 동옹성이 있는데 한쪽이 북쪽으로 열려 있는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높이 2.9m에 둘레는 17.2m이다. 여기에는 누조 4개와 현안 3개가 설치되어 있다.
동일포루는 창룡문과 동포루 사이에 위치한다. 성밖으로 돌출되어 있으며 지붕의 형태가 성안쪽은 맞베지붕 형식으로 바깥쪽은 우진각 형식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동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포루는 성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작은 건물이며 성내에 있는 아군의 동향을 적이 알지 못하도록 설치한 시설물로 초소나 군사 대기서와 같은 곳이다. 마루 아래 여장(담장)에는 여러개의 총구멍을 뚫어 적을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치는 성곽 요소 요소에 성벽을 돌출시켜 전방과 좌우방향에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병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동이치는 동포루와 봉돈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화성봉돈(봉수, 봉화)은 성곽과 맞물려 검정벽돌로 축조된 우리나라 성 제도에선 보기 드문 시설이다. 봉돈에는 봉수(봉화)군을 두어 화성행궁과 주변을 정찰하며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을 통신 신호로 하였다. 화성군 장안면 흥천대 해봉에서 봉담읍 건달산 간봉을 받아 용인시 석성산(에버랜드 인근산) 육봉으로 전달하였다. 봉화신호 체계
동이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포루는 성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작은 건물이며 성내에 있는 아군의 동향을 적이 알지 못하도록 설치한 시설물로 초소나 군사 대기서와 같은 곳이다. 마루 아래 여장(담장)에는 여러개의 총구멍을 뚫어 적을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치는 성곽 요소 요소에 성벽을 돌출시켜 전방과 좌우방향에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병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동남쪽 남수문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설치한 높은 마루식 목조건물이다. 이곳은 주위를 감시하기 좋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 화성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행차할 때 임시 거처로 사용되던 곳이다. 당시에는 봉수당, 경룡관, 복내당, 유여택, 노래당, 신풍루, 남·북군영, 강무당, 무고, 수성고, 집사청, 서사청, 비장청, 우화관, 득중정과 행각 등 33개 동의 건물이 있어 궁전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침략기에 행궁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던 봉수당이나 신풍루등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자리에 도립병원, 경찰서, 신풍초등학교 등이 들어서면서 지금은 행궁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현재 도립병원이 헐리고 봉수당, 장락당 등이 복원되고 있다. 봉수당 낙남헌
화령전은 순조 원년(1801년)에 지은 건축물로 부왕인 정조의 어진을 봉안한 곳으로 조선 말기까지 제조 위장 이하의 관리를 두고 화성유수와 판관이 관리토록 하여 해마다 제향을 드렸다. 순조는 화산릉을 참배하고 돌아가다 이곳에 들러 부왕인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해서 정전인 운한각 북쪽 풍화당에 노인들을 모아 시회와 주연을 베풀었다고 전한다. 정조의 어진은 한일합방 직전에 창덕궁으로 옮겨 봉안 하던 중 일제강점기에 분실되었으며 지금의 것은 1992년 새로 복원하여 봉안한 것이다. 치는 성곽 요소 요소에 성벽을 돌출시켜 전방과 좌우방향에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병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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賢妻 광교산의 품에서 惡妻를 생각해 보다 (0) | 2010.09.21 |
강산이 두번반이나 변한 후 만난 옛애인~도일봉과 중원계곡 (0) | 2010.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