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나그네/남이 본 맨발나그네

70년대 수원의 밤문화

맨발나그네 2012. 10. 9. 18:24

 

(수원문화원에서 발간하고 있는 계간지 '수원사랑' 2012년 가을호에 실린 글입니다)

 

 

 

 

 

 

 

 

 

 

 

70년대

수원의 밤문화

                                                                                                  유 윤 희

 

 1970년대의 우리나라는 역동적이라는 말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세계경제의 높고 험한 격랑 속에서도 연평균 10%이상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며 경제,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부분이 변혁을 겪던 시절이다. 6.25이후에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들이 영 파워를 형성하던 그 70년대를 가로지르며 나의 대학생활과 군대생활이 있었으니, 그 시절의 젊음과 객기를 추억해 보고자 한다.

 

 

통제와 금지의 시대

 

 70년대는 경제는 발전하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암울한 시대였다. 1971년 3선개헌을 필두로 그해 12월에는 국가비상사태가 선언되었으며, 1972년에는 유신헌법이 공포되었고 1975년에는 학도호국단 제도가 만들어져 대학은 병영화되었다. 반복되는 계엄령, 긴급조치, 위수령, 휴교령으로 젊은이들에게 70년대는 모든 것이 금지된 시대였다. 반복되는 휴교령으로 대학생활은 반토막이었고, 머리가 길다고 경찰들은 가위로 머리를 자르고 짧은 치마를 단속하겠다고 여성들의 허벅지에 자를 들이대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면 ‘불온집회’요 춤추고 놀면 ‘퇴폐문화’로 단속을 받기도 했다. 그뿐아니라 밤10시가 되면 방송을 통해 ‘이제 밤이 깊었습니다. 청소년 여러분들은 어서 집으로 돌아갑시다’라는 경고성 멘트가 흘러나왔고, 밤12시가 되면 싸이렌이 울리고 야간통행금지가 시작되었으니 지금에 비하면 밤의 문화라야 초라할 수 밖에 없던 시절이다.

 

 

(1971년 6월 푸른지대에서의 행사<사진:수원시청>)

 

 

(1976년 7월 28일 원천유원지<사진:수원시청>)

 

 하지만 그 시절에도 젊은이들은 무언가 젊음을 불태울 돌파구가 필요했으니 봄철이 되면 지금의 서둔동에 위치한 푸른지대와 노송지대의 딸기밭에서 미팅을 하기도 했고, 광교신도시로 편입된 원천유원지에서 쌍쌍보트를 타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 미팅에서 짝을 이루는데 성공을 하게 되면 당시 수원에 있었던 중앙극장, 로얄극장, 수원극장, 아카데미극장으로 영화관람을 가서는 슬쩍 손을 잡아보는 행운을 얻기도 하였다.

 하지만 영화는 계몽과 반공을 강조하는 ‘문예영화’가 대부분이었고, ‘별들의 고향’이나 ‘겨울여자’가 그나마 화제작이었으며, 외화도 검열단의 가위질에 내용연결이 안될 정도라고 했지만 문화에 굶주린 젊은이들은 그 정도에 만족하며 극장을 찾았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그 시절 DJ가 있는 음악다방인 중앙다방, 아카데미다방, 제일다방 등으로 자리를 옮겨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양희은, 김민기로 대표되는 음악을 신청하고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자리를 지켰고, 조금 더 폼을 잡고 싶으면 남문 근처의 고전음악감상실이라는 곳을 찾기도 했다.

 

 

 

(1974년 10월 11일 아카데미극장, 신성일 주연의 '속 눈물의 웨딩드레스'가 상영중이다

<사진:수원시청>)

 

부어라 마셔라, 젊음을 마시다

 

 젊은이에게 술이 빠질 수 없다. 국가의 장래를 걱정해서도 마셔야 했고, 긴급조치위반으로 수배령이 내려진 학우의 안위를 걱정해서도 마셔야 했고, 친구의 입영이 슬퍼서도 마셔야 했으며, 쌍권총을 찬 학점 걱정에도 마셔야 했다. 맨 처음 발동이야 학교 앞 허름한 대폿집에서 시작되지만, 거나해지면 중동사거리 근처의 곱창전골집으로 자리를 옮겨 시대적 아젠다에 비분강개하며 조국의 미래를 논하고, 각자가 살아 갈 미래를 그리며 각종 유언비어를 안주삼아 마셔댔다. 주머니 사정이 빠듯한 우리들은 음식점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지금의 리젠시호텔 근처에 있던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양동이로 사다가 마셔야만 직성이 풀렸다. 70년대 초반 히트를 친 가수 이장희의 ‘한잔의 술’을 목청껏 외쳐대며 통음을 했다.

 하지만 그것가지고도 성이 차지 않으면 아주 가끔은 남문 뒷골목이나 구천동의 퇴폐(?)술집을 기웃거리기도 하였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마음씨고운 누님 또래의 술집아가씨와 하룻밤 풋사랑을 나누기도 하였고, 누군가는 그 누님과 오랫동안 사랑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리고 술값으로 손목시계나 학생증을 맡기곤 다음에 그 손목시계나 학생증을 찾기 위해 고향집에 향토장학금의 증액을 요구하기가 다반사였다.

 70년대 수원의 밤에 막걸리집만 있었던 건 아니다. 어딘가에는 룸살롱이나 요릿집이 있어 어른들의 쾌락과 정경유착이 오고가는 밤문화가 있었겠지만 아직 20대를 보내던 나는 소문조차 들어 본 적이 없다. 70년대 어른들의 또다른 밤의 문화였던 카바레는 남문과 수원역 근처에 꽤 여러개가 있어서 그 곳을 지나던 우리에게 넌지시 손짓하기도 하였다. 차차차, 지루박, 트위스트, 탱고등의 사교댄스를 출 수 있는 곳이지만, ‘제비족’, ‘꽃뱀’, ‘독사 부인’이란 단어가 생각나며, 일부 퇴폐 카바레에서는 주부들 대신 웨이터가 장을 봐준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카바레에는 극히 일부의 젊은이를 제외하곤 그저 어른들의 놀이터로 치부하고 눈길을 주지 않았다.

 

 

(1972년 11월20일 10월 유신선거 홍보 플래카드가 걸린 시가지 모습<사진: 수원시청>)

 

 

젊은이들의 청량제, 고고춤

 

 그시절 대학생들에게 숨통을 틔어 일탈을 맛볼 수 있게 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대학축제이다. 축제에 빠지지 않는 것이 댄스파티였고 그중 ‘고고춤’이 단연 인기였다. 고고춤의 인기에 힘입어 스펜서 데이비스 그룹의 ‘Keep on Running', Steam의 ’Na Na Hey Hey Kis Him Goodbye', Rare Earth의 ‘Hey Big Brother', Bay City Rollers의 ’Saturday Night'등의 노래가 대히트를 쳤다. 대학생들 사이에 가끔은 다방을 빌려 ‘고고미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고, ‘고고’의 인기는 전국에 ‘고고장’(나이트클럽) 열풍을 불게 하였다.

 수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팔달산자락의 ‘오아시스’, 중동사거리 근처의 ‘디기디기’등의 나이트클럽이 있어 유신시대 젊은이들의 해방구 노릇을 하였다. 나이트클럽에서 고고춤에 열중하다보면 학교기숙사나 학교근처 숙소로 가는 시내버스 막차를 놓쳐 학교까지 걸어가야 했다. 통금시간이 임박해서 성빈센트옆 지동파출소를 거쳐 학교까지 걸어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장발인채로 파출소 앞을 지난다는 것은 호랑이 굴 앞을 지나는 것과 같았다. 가끔 통금시간을 넘겨 다닐 때는 경찰이나 방범대원을 피하느라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각고의 노력에도 붙잡일 경우에는 대학생신분증이 보증수표가 되어 훈방으로 풀려나기도 하고, 경찰서유치장 신세를 지는 사람도 있었다. 가끔은 술을 먹다 통행금지시간이 되는 바람에 술집 주모는 한쪽에서 졸고, 우리는 밤새 통음을 하며 국사(?)를 논하다 새벽4시 통금해제가 되어야만 돌아가기도 했다. 또 가끔은 밤새 술을 마시며 고고춤을 추는 젊은이들도 있었으니 이름하여 그들을 ‘고고족’이라고 하였고 그들은 ‘올나이트했다’며 밤새 춤춘 무용담을 입이 닳도록 자랑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고장에서 춤을 추다가 통금에 걸린 걸 핑계삼아 ‘하룻밤 만리장성 쌓기’를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계속되는 수원의 밤

 

 그렇게 나의 20대의 밤은 흘러갔다. 밤의 문화라고 하면 욕망과 음악이 어우러져 향락과 퇴폐에 젖어 끈적이는 것을 상상하겠지만 70년대 젊은이들의 밤은 지금과 비교한다면 갑갑한 현실에서 잠깐 잠깐씩 탈출을 하게해준 해방구였다.

군부독재의 탄압, 단속, 규제, 감시가 판치던 70년대이건만 지나고 보니 그 시절도 추억이었고, 낭만이었다. 이제 나의 아들 딸들이 그 20대의 젊은이가 되어 수원의 또 다른 밤의 문화를 찾아 헤매며 젊음을 맘껏 누릴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의 추억으로 간직할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

 

 

 원문보러가기 ☞ 수원문화원 http://www.suwonsarang.com

 

 

   ( 답글 )


  • 할로윈

    옛날 생각이 굴뚝처럼 나네요.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
    이제는 두어깨에 무거운 가장의 멍애를 메고 허우적 거리는 오륙십대가 되었네요.
    그립군요. 그 고고자이..그리고 탁배기 기울이던 선술집도..
    2013.01.05 16:50

  • 재순이

    끝모를 터널같은 어두운 시절 우리는 춤을 추었지요. 그냥 흔드는 춤을..그리고 밤새워 통음하며 아침이슬을 불렀지요..그러나 지금 지나고 보면 우리의 젊음을 그렇게 낭비하는게 아니었어요. 삶의 목표를 가지고 매진했너라면 지금쯤 시대를 이끄는 주역이 되었을텐데... 젊은이들이여 야망을 가져라..그리고 그야망을 가구고 키우는데 최선을 다하라.. 2013.01.05 22:00

  • 촌놈

    샹하이 트위스트..이걸 야외전축에 틀어놓고 땀을 뻘벌 흘리며 춤을 추던 시절이 어제 같기만한데..벌써 한갑이 지났네요. ㅎㅎㅎ. 세상은 참 무상?하네요. 되돌아볼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3.01.06 09:21

  • 후리지아

    몰래 언니들 옷 빌려입고 드나들던 고고장..생각이 납니다. 그리운 그날들..다시오지않을 나의 화려한 날들.. 2013.01.07 06:16

  • 미선이

    통행금지가 얼마나 우리를 괴롭게 했던가..그리운 옛날이여.. 춤을추고 노래하고 술을 마셔보아도..언제나 우리 마음속에는 울분투성이였는데...이제는 어느새 아이놈이 자라서 그때처럼 되어있으니..세월은 가고 오는것..
    그날을 그리워하면서 나그네님의 글을 읽고 갑니다.
    2013.01.07 20:36

  • 싸이

    술마시고 돼지 멱따는 소리하며 뒤골목 돌아다니는것이 문화? 아니죠. 그런건 현실도피...약한자들의 눈속임이지요. 세월이 지난후에는 두갈래길에서 우리가 서있었다는걸 알게 되지요. 때는 너무 늦은거지만...문화는 적어도 대다수의 공감대가 생겨야지 문화라고 볼수가 잇겠지요. 2013.01.08 20:59

  • 달빛토끼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곳이 밤문화라면 좀 서글프네요. 군밤을 팔고 군고구마를 팔고 호두빵을 팔고..심문을 돌리고시날을 닦고..우리의 일상이 문화가 되어야지 돼먹지 못한 퇴폐가 밤문화...좀 아닌것 같으네요. 좋은글 즐감하고 갑니다. 2013.01.10 06:21

  • 러브리숙

    밤에 일어나는 일은 밤문화..낮에 일어나는 일은 낮문화...하기야 어두컴컴한 뒷골목 이야기가 더 정겹지요. 2013.01.11 2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