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나그네/맨발걷기 경험담

맨발로 오른 파주 감악산

맨발나그네 2009. 6. 26. 06:29

맨발로 오른 파주 감악산

 

  누이좋고 매부좋고

  지난주 군에 가있는 아들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10월 5일날 휴가를 나온단다. 그것도 4박5일의 짧은 일정이었다. 아마도 제딴에는 제어미의 하늘나라 생일에 맞춰 짧으나마 휴가계획을 세워 나오는 모양이다. 전화를 받고 생각해보니 제대가 6개월정도 남았는데 그동안 한번밖에 면회를 못갔다. 내 군대생활 시절에는 부대 면회실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못하고 제대를 했건만, 그래서 가끔은 군시절 면회실 구경 못한걸 술안주로 삼곤 했는데, 그때야 7080시절이고, 때는 바야흐로 200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때에 울 아들녀석도 집에서 면회 한번밖에 안받아 보았노라고 두고 두고 술안주 삼지 않을까 걱정도 되는데다 휴가일정도 짧으니 시간이 되면 데리러 가겠다고 덜컥 약속을 하였다. 그리고나서 기왕 가는김에 근처에 있는 감악산을 올라보기로 했다. 더구나 지난번 면회때보니까 아들녀석이 근무중인 부대는 파주군 적성면 객현리에 있는 부대로, 남서쪽뒤로 감악산을 등지고 있으며, 부대정문에 감악산사수부대란 간판까지 달고 있었고, 10월 중순경에는 감악산정상의 초소로 약 3개월 근무를 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은바 있어 더더욱 이번 산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아들녀석 휴가 마중도 하고 감악산도 오르니 이를 일컬어 누이좋고 매부 좋은격이라고 할까.

 

감악산은 경기 5嶽 중의 하나

  감악산은 경기 파주 적성면. 양주시 남면, 연천군 전곡읍에 걸쳐있는 산으로 높이는 675m이다. 전국에는 10대 ‘악(嶽)’자가 들어가는 산이 있는데 이는 설악산(1708m), 화악산(1468m), 치악산(1288m), 황악산(1111m), 월악산(1097m), 운악산(936m), 모악산(794m), 감악산(675m), 삼악산(654m), 관악산(629m)이 있는데 나는 이중 설악산,치악산,월악산,삼악산,관악산에 이어 이번 감악산까지 하면 모두 6개의 ‘악(嶽)’자 산을 오른셈이다. 그중 가평-화악산, 개성-송악산, 과천-관악산, 포천-운악산과 더불어 파주-감악산까지를 경기 5악이라고 한다. 백두대간 한북정맥이 양주에서 갈라져 적성쪽으로 뻗아나간 산줄기인 이 감악산은 아마도 휴전선에 인접해 있는 탓에 80년대까지는 군사적이유로 등산로 개방이 안되다 80년대 후반부터 일부 등산로가 개방되었고, 아직도 많은 등산로가 입산통제구역이란다.

 

 또한 감악산(紺嶽山)은 신령스러운 산이란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일거라 추정된단다. 즉 우리말에서 신령스런 큰산에는 신(神)을 의미하는 고유어 감악이나 감앙과 같은 단어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단다. 일설에는 멀리서 산을 보면 전체적으로 감색을 띠고 있어 이와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기도 한단다. 구붓한 모양을 가지고 있어 수덕(水德)을 상징하는 산으로 널리 이해되기도 하며, 적성,양주 일대에서는 주민들 사이에 신령스러운 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토속신앙의 근원지가 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영산’이라고 전국의 무속인들이 모여들기도 하고, 시산제를 지내기 위해 전국의 많은 산악인들이 모여들기도 한단다.

  감악산이란 땅이름은 삼국사기(1211년)에서 처음 등장한다고 한다. 국토의 중심부에 있어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가르는 임진강 일대는 옛날부터 우리 민족과 영욕을 함께 해온 땅이다. 구석기와 신석기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고 온조의 한성백제가 자리 잡은 곳이 서울 한강변의 풍납토성이 아니라 임진강변의 육계토성이란 설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삼국시대부터 이곳은 서로가 주인이 되기 위해 싸워야 했고, 그래서 백제가 주인일때는 오두산성과 중성산성을 쌓았고, 고구려가 주인일때는 중성산성을 낭비성이라 바꿔 불렀으며, 신라는 이성을 다시 칠중성이라 바꿔 불렀다 하니 그 시절 이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그 시절 이 지역에 살던 민초들의 삶은 어떻했을까? 고구려가 주인일때는 고구려 국왕 만세를 외쳐야 했고, 백제가 주인일때는 백제 국왕 만세를 외쳐야 했으며, 신라가 주인일때는 신라 국왕 만세를 외쳐야 했지 않았을까?감악산 정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임진강의 다른 이름은 칠중하(七重河)인데 바로 칠중성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가 고구려의 점령군 행세를 하던 당나라 안동도호부를 압록강 밖으로 몰아낸 시발점이 되는 매소성전투가 있었던 곳도 이곳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이란다. 고려시대에는 몽고군의 침입으로 개경에 인접한 이지역 옥토가 수차례 유린되었으며,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는 도원수 김명원장군이 임진강전투에서 왜군의 북진을 막다 패하였고, 광해군은 여기서 가까운 교하로 한양천도 계획을 세웠다 하는데 이는 고려사, 조선왕조실록등 대부분의 지리지,읍지,관찬사료에서도 확인된다고 한다. 어디 옛날뿐이랴. 6.25때도 이곳은 격전지로써 서울을 점령했던 중공군이 양평에서 패한후 임진강 북쪽까지 밀려갔다가 다시 재정비를 하여 1951년 4월 이른바 춘계대공세라 불린 대대적인 공격전을 감행할 때 이 근처 마지리 아유리 설마리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영국군 글로스터대대는 상부의 투항권유에도 불구하고 3일동안 분전해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되었다는 기록을 갖고 있으니 고금을 통해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던거 같다. 하긴 아직까지도 이 산에서 멀지않은곳에 삼팔선이라는 선을 그어놓고 남북이 대치하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리오. 또한 감악산에는 감악사, 범륜사, 운계사, 운림사 등의 4개 사찰이 있었다는데 현재는 1970년 옛 운계사 터에 재창건한 범륜사만 남아있다.

 

 

 맨발로 오른 감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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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4일 아침 9시 수원을 출발하였다. 3일간 계속된 연휴 때문인지 적성을 향하는 길은 막힘이 없어 11시 20분 범계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옷도 갈아입고 신발과 양말도 벗었다. 그리고 등산화를 비닐봉투에 넣어 배낭에 넣는다. 사실 ‘악(嶽)자가 들어가는 산이어서 좀 망설이긴 했지만 그간 광교산에서 갈고 닦은 실력이 있으니 어떠랴. 주차장에서 좀 올라가니 매표소가 있는데 어른 1000원 어린이 500원의 이용료를 받고 있다. 왠 매표소? 최근에는 웬만한 산행에서 입장료 받는곳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설마 이곳 감악산에 임꺽정굴이 있다고 하던데 이곳이 임꺽정 나와바리여서 임꺽정이 휘하를 보내 입장료를 받는건 아니겠지? ㅎㅎ

  계곡을 따라 범계사, 명상의 숲, 만남의 숲을 거쳐 한참 가다보니 약수터가 나왔다. 그곳에서 잠깐 목을 축이고 계속 걷는다. ‘악(嶽)’자 들어가는 산답게 제법 많은 돌로 뒤덮인 다소 거친 돌밭길이다. 맨발로 걷다보니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어준다. 사실 광교산에서의 맨발은 거의 무관심인데 말이다. 가장 많은 질문은 “안 아퍼요?”다. 내 대답은 “좀 아퍼요”고. 좀 더 길게 대답을 해야 할 때는 “좀 아퍼요. 그런데 아픔도 즐기죠”다. 그 다음에 오는 질문은 "다치면 어떻게 할려고 그러느냐?" “맨발로 걸으면 어디가 좋느냐?” “등산화 아낄려고 맨발로 걷느냐?”등 여러 가지이지만, 일일이 대꾸하기 어렵다. 7월이후로 맨발로 벌써 100여km이상 산행을 했으니 이골이 날만하지만 아직도 약간의 고통과 묘한 쾌감을 동시에 느낀다. 또 유리나 돌부리등에 치여 다쳐 본 적도 없다. 그러나 아직은 얼마나 건강에 도움이 되었는지 얼마나 지기(地氣)를 느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맨발걷기의 즐거움’이란 책을 쓴 저자 박동창님은 “맨발걷기는 자연이 선사하는 ‘리플렉솔로지(Reflexology)’”라 정의한다. 리플렉솔로지란 발과 손, 귀 등에 분포한 반사부위를 손가락등으로 지압함으로써 건강을 증진시키는 요법을 말한다. 이 저자에 의하면 “맨발걷기는 배변활동을 촉진시키고 감기와 위장장애, 무좀 등을 개선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 경지에 이르려면 앞으로 얼마나 맨발로 걷고 또 걸어야 한단 말인가?

  혹자는 현대인들의 질병 대부분이 혈액순환의 부조화, 즉 피가 상체로 몰리고 하체쪽은 저하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피가 발끝까지 원활하게 흐르게 해야한단다. 그러기위해서는 신체의 가장 아래부분인 발바닥에 있는 수많은 모세혈관의 기능을 강화시켜야 한단다. 즉 발바닥을 자극하여야 한단다. 발바닥을 자극하면 내부 장기의 자율신경이 자극되어 내부기관의 운동기관을 향상시켜 준다고 한다. 발바닥을 자극하면 발바닥 부위의 모세혈관의 운동기능도 증가되어 상체부위로 흐르던 피의 흐름을 발끝까지 끌어내려서 신체 전신의 혈액순환을 원만하게 해준단다. 맨발로 걸어서 발쪽의 모세혈관이 강화되면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얼음이나 눈위를 걸어도 발이 시리지 않고 열이 난다고 한다. 그러나 내게 그러한 경지까지는 아직 멀었다. 아니 그런 경지가 오지 못할거 같다. 얼음이나 눈위를 걸을 용기는 아직 없으니까...... 그러나 ‘걷기예찬’이라는 책을 쓴 프랑스의 디비드 르 브르동 박사에 의하면 “발로 머리로 몸으로 걸으면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찿는다”고 한다. 한마디로 스트레스 해소에는 무척 좋다는 이야기이니 그 정도 얻는게 있다는게 어디인가.

 

임꺽정은 농민저항운동가?

  매표소에서 한시간쯤 오르니 장군봉과 정상 갈림길이 있는 안부 삼거리가 나오길래 장군봉으로 향하였다. 장군봉 밑에는 굴이 있으며 임꺽정굴 또는 설인귀굴이라 불리기도 한다. 장군봉은 임꺽정에 대한 전설이 많이 전해오는 곳이다. 그 옛날 구월산 청석골을 거점으로 활약하던 임꺽정이 중간 거점으로 이용하였다고 하고, 관군의 추격을 피해 이곳에 은거했다고 하는데, 이 산이 갖고 있는 지형적, 전략적 가치로 볼때 그럴만도 했겠다 싶다. ‘성호사설’을 쓴 이익은 그의 저서에서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을 조선의 3대 도적이라고 일컬었다지만, 현대에서의 평가는 임꺽정은 부패한 관료사회에 저항한 조선시대 최대규모의 조직적인 농민저항운동가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조선중기 명종때 윤원형등의 외척들과 지방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극에 달했을때 전국 곳곳에서 삶의 기반을 잃은 농민들과 천민들이 소규모 집단을 이루어 산발적인 봉기를 일으키며 부패한 지배층에 대항한것은 어쩌면 당연한 권리 주장이었으리라. 이곳에서 잠깐 양주쪽을 조망해 보곤 왔던길을 되돌아 정상으로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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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굴)

 

진흥왕순수비일까? 설인귀일까?

  12시 50분 정상에 도착이다. 정상에 제법 시원한 막걸리 한 대접(아주 작은 )을 2000원 주고 사 마셨다. 정말 꿀맛이다. 그러나 안전 산행을 위해 더 이상은 금물이다. 정상에는 흔적도 없이 마모되어 글씨를 찿아 볼 수 없는 감악산비가 석대위에 서있다. 그 옛날에는 위용을 자랑하였으련만 지금은 정상에 있는 KBS송신탑의 위용에 눌려 그저 볼품없는 비석이다. 파주시 향토유적 제8호인 이 비는 글자가 없다고 하여 몰자비(沒子碑)로 불리는 연대미상의 비석이 있는데, 신라고비, 빗돌대왕비, 또는 설인귀사적비등 여러 개의 비 이름이 전설과 함께 구전되어 오고 있다고 한다.

 

  신라고비는 1982년 동국대 학술팀의 조사에 의해 비의 크기와 형태, 추정 건립연대, 감악산의 군사적 지형적 여건등을 보아 혹시 진흥왕순수비가 아닐까 하는 추측에서 불린 이름이라 한다.

 

  설인귀비로 불리는 것은 무속과 전설에 의해 전해지는데, 감악산 인근 지역에는 설인귀와 연관된 지명과 전설들이 여럿 있다. 물론 이 전설들은 설인귀가 이 지역 태생이라는 가정하에 비롯되었는데 아직은 고증이 없는 전설일 뿐이다. TV드라마 ‘연개소문’과 ‘대조영’ 덕분에 조명된 설인귀는 중국사서에는 당나라 강주 용문에서 태어난 걸로 되어있고, 봉황산전투에서 연개소문에 패해 위기에 빠진 당태종을 구한 명장으로 농민출신에서 대장군까지 올랐다 하여 중국인들도 좋아한다지만, 이고장 전설속에서는 파주 주월리 인근 태생이란다. 그래서 설인귀가 무공을 쌓았다고 해서 붙여진 ‘무건리’, 율포리 벼랑에서 바위가 갈라지며 뛰어나온 용마를 타고 뛰어다녔다는 ‘마제리’등이 관련된 지명이다. 다른 전설로는 설인귀가 워낙 강골이여서 을지문덕 장군 휘하에 들었다가 무슨일이 있어 장군의 미움을 사고, 이후 위기에 처한 당태종을 구하고 당나라 사람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그가 죽은후 감악산 정상에 있는 비를 설마치고개마루에 세웠는데, 비가 훼손되고 꿈에 나타난 사람이 감악산 정상으로 옮겼다는 전설인데, 이후 설인귀는 감악산 산신으로 받들어졌고, 옛 문헌에 신라때부터 마을 사람들이 설인귀를 산신으로 모셔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고려사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세조실록지리지등에 있단다. 과연 이비의 정체는 무엇이며, 언제쯤 진실이 밝혀질까? 아니 밝혀 질 수는 있는걸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늘을 보고 누워

  정상에는 군부대가 있다. 아마도 휴가를 끝낸 아들놈이 10월 중순경부터 삼개월가량 근무할 부대인가 보다. 그곳 망루에서 근무를 서고 있는 내아들 또래의 군인들을 보고 있노라니 또 내 젊을적 군생활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다. 올라오며 보이던 콘크리트 벙커들도 그렇다. 나도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법원리 근처 고지에서 무려 삼개월간 콘크리트 벙커 건립 작업에 투입된적도 있었으니까. 날씨가 좋은날은 북쪽으로는 멀리 개성 송악산도 보인다던데 오늘은 안개가 끼어 그런 호사를 누릴 형편이 못된다. 임진강 물줄기만이 굽이굽이 돌아가는게 흐릿하게 보일뿐이다. 적성에서 사온 김밥으로 허기를 때우고, 하늘을 보고 누워 이런 저런 망상에 젖어 보기도 하고, 잠깐의 오수를 맛보기도 하고, 그렇게 한 시간여를 보낸후 하산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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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각정에서 바라본 임진강)

 

  올라올때의 반대 방향인 서북쪽 능선으로 조금 내려오다 보니 팔각정이 있고,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아들의 부대 근처인 객현리로 내려가는 길과 범계사 쪽으로의 길인데 승용차를 범계사 입구 주차장에 두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 능선 산행길은 줄지어 늘어선 작은 소나무 숲을 지나 까치봉에 도착이다. 까치봉은 감악산 최고의 전망대이다. 안개 때문에 흐릿하기는 하지만 임진강과 적성면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이곳에서 마차산과 소요산, 칠봉산, 북한산이 조망된다고 하는데 초행길인 나에게는 어디가 어딘지 구별이 안된다. 또 쉰다. 몇몇분과 맨발산행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하긴 오늘은 적성에서 잠을 자기로 했으니 내게는 이렇게 저렇게 시간을 많이 보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까치봉 능선 쌍소나무 삼거리에서 다시 범계사 쪽으로 길을 잡는다. 이유는 그곳에 애마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간의 통증이 다가오는 발을 이끌고 범계사에 도착한 시간이 15시15분이다. 능선길은 바위가 부서져 생긴 콩알돌이 쫘악 깔려져 있어 제법 어려운 맨발 산행길이다. 약 4시간 정도 걸렸지만 오늘은 정상에서 1시간 이상 여유를 즐겼고, 내려오는 동안도 쉬엄쉬엄 왔으니 아마 정상적으론 3시간이면 충분하리라 본다. 이렇게 오늘도 맨발로 약 7.5km에 이르는 감악산 산행을 마쳤다. 오늘도 주인 잘못 만나 고생한 내 발한테 미안함을 전하며, 고마움도 전하며, 사랑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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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길에 본 까치봉)

 

하산후에는 영국군 참전비도 들려보고 임진강변의 황포돗대 나루터에도 들려보고,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에 있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릉도 들려보는 호사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