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나그네/맨발걷기 경험담

맨발나그네되어 꽃멀미에 취해 거닌 화성(華城)

맨발나그네 2010. 4. 25. 09:18

맨발나그네되어 꽃멀미에 취해 거닌 화성(華城)

 

● 어 디 를  : 수원 화성(華城) 성곽 일주

● 언     제  : 2010년 4월 24일 (토)

● 누 구 랑  : 나 홀 로

● 코     스  : 화성행궁 - 남포루-서남암문-화양루(서남각루)-서이치-서포루-서암문-서장대(화성장대)-서이치2-서포루2-서일치-서북각루-화서문과 서북공심돈-북포루-서북포루-북서적대-장안문-북동적대-북동포루-화홍문-방화수류정(용연)-북암문-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동북포루-북동암문-동장대(연무대)-동북공심돈-동북노대-창룡문-동일포루-동이치-봉돈-동이포루-동삼치-동남각루-지동시장-팔달문(5,744m)

 

 

 

토요일인데 이런 저런 일로 바쁘다.

그래서 대학 동문회 산악회는 광교산으로 오라하고,

중.고등학교 동문 산악회는 서봉산으로 오라하는데 어느 한군데도 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오후가 되니 자투리 시간이 생겨 고섭인 화성(華城)을 찾는다.

14시 40분쯤 화성 행궁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화성 행궁 뒤로 올려다 본 팔달산은 꽃폭탄이 터진듯 하다.

여기 저기 꽃폭탄을 맞은 자리에 꽃분화구가 자리 잡고 있다.

 

 

 그곳 화성행궁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길래 가 보았더니 줄타기 공연을 하고 있었다.

 

한참을 구경하다 행궁 옆으로 난 길로 팔달산으로 오른다.

물론 행궁옆 오름길 초입에서 이 맨발나그네는 신고 있던 양말과 신발을 벗어 부치고 맨발이 된다.

 

팔달산 중턱에 나있는 도로에 오르니, 그곳에서 꽃비를 만난다.

명지바람을 타고 꽃보라가 날린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마지막 가는 꽃을 전송하고 있다.

모두들 꽃에 취해 꽃멀미를 한다.

어린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들 즐거워한다.

맨발나그네도 꽃멀미에 취해 벤치에 앉아 잠시 시흥에 취해본다.

 

요즈음 새삼 느끼는 것인데,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참 벚꽃나무가 많다.

차를 타고 조금만 교외로 벋어나도 천지가 벚꽃이다.

일본의 국화라는 벚꽃이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도 곳곳에 많이 심어져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매년 3월 말경이 되면 진해 군항제를 시작으로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의 곳곳에서 벚꽃축제가 열리고,

중부지방으로 오면 대체로 4월 10일을 전후하여 벚꽃축제가 열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올해는 짓궂은 날씨 때문에 개화가 더뎌 중부지방의 경우 며칠전에야 겨우 꽃망울을 터트렸다.

 

 

 전국적으로 규모있는 벚꽃축제만 40여개에 이른다고 하니, 

벚꽃이 얼마나 사랑 받고 있는지 알만하다.

하긴 대부분의 꽃이 저 혼자만의 힘으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지만,

벚꽃은 무더기로 있어야만 그 진가가 발휘되는 꽃이다.

그저 봄날 며칠간 화려한 꽃을 피워 새생명을 잉태시킨후,

미련없이 명지바람을 타고 한바탕 화무(花舞)를 펼쳐보이곤 스러져 간다.

지난주만해도 피지않은 꽃을 야속해하며 꽃들의 사랑이 어쩌구 저쩌구 사설을 늘어 놓았는데,

벌써 꽃을 피워 사랑을 나누고 그 자식들의 식량인 잎을 피우기 위해 떠나가려 한다.

며칠만 더 두고 보고 싶건만,

아랑곳 하지 않고 뒤이어 꽃을 피울 연산홍이나 철죽꽃에 자리를 양보하고 다음을 기약 할 뿐이다.

하긴 옛 선비들은 낙화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 정원에 배, 살구, 복숭아나무를 심고,

그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낙화하는 것을 예찬하였다 하나,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겐 그저 그림의 떡이다.

이렇게 자투리 시간이라도 내어 팔달산에 올라 벚꽃의 꽃눈개비라도 감상할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게 한참을 꽃멀미에 취해 그곳에 머무르다 발걸음을 옮긴다.

성곽을 따라 이곳 저곳을 거쳐 서장대에 이르고,

그곳에서 또 잠시 머무르며 수원시내를 조망해 본다.

나의 조강지처이자 종교인 광교산과도 멀리서나마 안부인사를 나눈다.

 

 

 화성 성곽길은 언제 걸어도 좋다.

달밝은 한여름밤 내 그림자를 벗삼아 성곽을 따라 걷노라면,

휘엉청 밝은 달은 그리움이 되어 나를 따라 온다.

눈내린 한겨울 달밝은 밤 성곽을 따라 걷노라면,

휘엉청 밝은 달은 삶의 환희가 되어 나를 따라 온다.

 

꼭 달밝은 여름밤이나 겨울밤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같이 꽃비가 오는날 명지바람을 맞으며 성곽을 따라 걷노라면 슬픔조차도 기쁨으로 만나진다.

 

 

그렇게 걷다보면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을 만난다.

그리고 그 화서문 옆 주막집과도 만나게 되는데,

혼자 걷고 있는 나에겐 주막집에 산해진미가 있다한들  들려지지 않는다.

주막집 주변의 천막이 눈에 거슬린다.

그 천막만 아니었드라면, 성곽을 따라 걷던 사람들이 들려 막걸리 한잔 걸칠 낭만이 있을텐데....

 

 

 

 화서문의 홍예천정의 용그림도 지나는 길손의 발걸음을 잠시 머물게 한다.

 

 

그렇게 화서문을 떠나 잠깐 걷다 보면 장안문과 만난다.

화서문에서 장안문으로 가는 길 올려다 본 팔달산은 꽃폭탄에 의한 꽃분화구로 예쁘게 장식하고 있었다.

 장안문에서 화홍문으로 가는길 방화수류정을 올려다 본다.

뛰어난 건축미와 경관의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방화수류정은 연접한 용연(龍淵),화홍문과 함께 화성의 백미로 일컬어 진다고 한다.

화홍문의 일곱개의 수문을 통해 장쾌한 물보라가 넘쳐 나오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수원팔경 중 [화홍관창]이라 한다고 한다.

용연에는 가운데 당주(섬)을 만들어 놓고 버드나무를 심었는데, 남쪽 가파른 언덕위 방화수류정과 용머리 바위 그리고 버드나무 줄기 사이로 떠오르는 보름달이 수면 위에 비추어지는 아름다운 정취는 수원팔경중 [용지대월]이라 한다고 한다.

오늘은 쉬엄쉬엄 그곳 방화수류정 정자에 올라 비록 용지대월은 아닐지라도 그 아름다운 정취에 취해본다.

 

 

 길은 이어져 동장대(연무대)를 거쳐 동북공심돈으로 향한다.

동장대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활쏘기를 하고 있다.

동북공심돈에 이르니 문이 열려 있고 많은 사람들이 누각으로 오른다.

이 맨발나그네도 처음으로 동북공심돈에 올라 아름답기 그지 없는 화성도 둘러보고, 또다시 팔달산으로 눈길을 주어 꽃폭탄 자리의 꽃분화구에 가슴으로 빠져본다.

 

  

동북공심돈을 나와 창룡문을 둘러보고 봉돈(봉화대)를 거쳐 팔달문에 이르니,

오늘 화성 성곽과 5,744m를 2시간 20분간에 걸쳐 데이트를 끝낸다.

평상시 부지런히 걸으면 1시간 정도 소요되던 길인데,

오늘은

꽃멀미에 취해,

화성의 아름다움에 취해

더디게 더디게 그와의 데이트를 즐겼다.

 

 

 

PS) 아름다운 화성 자세히 보기(수원시청 홈페이지 - http://hs.suwon.ne.kr/index.asp)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성곽의 전돌, 건조물의 기와 등이 독특한 방법으로 제작되어 있어 현재의 기술로 이를 재현하기 어려워 보수시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돌의 교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 (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팔달문



 큰사진보기!
팔달문(八達門)

보물 제 402호

위치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2가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남쪽에 위치한 정문으로 화성축성(1794년)과 함께 건립되었다. 문은 화강암으로 홍예를 만들고 위에 2층의 육중한 목조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에는 낮은 담장을 둘러쌓았고 전면에는 반원형의 옹성을 검정벽돌로 쌓았는데, 이는 성문에 접근하는 적군을 뒤쪽에서 공격하기 위한 시설로 성문 앞으로 길게 반원형으로 빼어낸 것이다.


 팔달문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문의 좌우에는 옹성을 보호하기 위해 적대를 두었으나 도시화에 밀려 복원하지 못하였다. 문의 형태는 서울 숭례문(국보 제 1호)이나 흥인지문(보물 제1호)과 같은 형태이나 문루의 네 귀퉁이에 고주를 세우지 않고 평주 위에 이방을 고인 것이 약간 다르다.





 큰사진보기!

문루 동쪽(외측 옹성안) 화강석 육축에는 당시 참여한 책임당상과 기술자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2층 문루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69호인 만의사 동종이 있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의 참화등 격동기를 견디면서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현재 [보물]로 관리되고 있다.

 

 

 

남포루(南砲樓)

위치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남쪽 서남포사(서남암문)와 남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포루는 치성과 같이 성벽을 돌출시켜 검정벽돌로 쌓았으며 나무마루판을 이용 3층으로 구획하였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남포루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벽면에 포혈을 내어 화포를 두고 위에는 여담(담장)을 둘러 적을 위와 아래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서남암문 및 포사



 큰사진보기!
서남암문(西南暗門) 및 포사

위치 : 경기도 수원시 수원화성내

서남암문 및 포사는 화성의 서남쪽 서남각루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암문은 성곽의 중요지점에 축조하여 양식 무기 등을 은밀히 반입하는 곳으로 성곽의 비밀통로이다. 이곳은 다른 4개 암문과는 달리 암문 위에 건물을 지었는데 이를 포사라고 한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서남암문 및 포사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밖으로는 서남각루로 이어지는 용도가 있으며 암문 중에서 특이한 곳이다. 서남각루(화양루)로 나가는 문으로 유일하다.


화양루(서남각루)



 큰사진보기!
화양루(華陽樓)(서남각루)

위치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서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하나로 화성성곽 팔달산 서남쪽 끝머리에 있으며 일명 화양루라 부른다.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설치한 건물이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화양루(서남각루)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이곳에서 용도(甬道)(양편에 여담이 설치된 길 : 전시에 비상통로로 활용되도록 만듬)를 통해 170m에 이르면 서남암문(서남포사)이 있다.





 큰사진보기!


화양루에서 바라 보이는 수원시 전경.





서이치



 큰사진보기!
서이치 (西二雉)


치는 성곽의 요소 요소에 성벽을 돌출시켜서 전방과 좌우방향에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병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화성에는 10개소가 있다. 서이치는 그 중 서남암문과 서포루 사이에 위치한 치성이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서이치 사계절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기본적으로 치성 위에는 누각이 없이 여장만이 설치되어 있으며 치는 "꿩"이란 뜻으로 본래 꿩은 제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서포루


 서포루에서 바라본 수원시 팔달구일대  파노라마  큰사진 보기

*.서포루에서 바라본 수원시 팔달구일대 파노라마 입니다.



 큰사진보기!
서포루(西砲樓)


서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포루는 성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군사들이 몸을 숨길 수 있는 건물을 세워 초소나 대기소와 같은 용도로 쓰이던 곳이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서포루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마루 아래 성벽 여장(담장)에는 여러개의 총구멍을 뚫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서암문



 큰사진보기!
서암문


암문은 성곽의 비밀통로로 성곽의 굴곡된 부분이나 후미진 곳, 수목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 곳 등에 설치되어 있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서암문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서암문은 서장대의 남쪽 약 50m의 위치에 있으며 성문이 바깥쪽을 향하지 않고 옆으로 틀어져 있어 밖에서 구별하기가 어렵도록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서장대와 서노대


 서장대에서 바라본 수원시내 장안구일대  파노라마  큰사진 보기

*.서장대에서 바라본 수원시내 장안구일대 파노라마 입니다.



 큰사진보기!
서장대(西將臺)(화성장대)

사적 제 3호

서장대는 일명 '화성장대'라 불리우며 화성의 군사를 총지휘하는 본부로 성의 사방을 조망할 수 있도록 화성에서 가장 높은 팔달산 정상(해발 143m)에 위치하고 있다.

*.수원시 장안구 겨울파노라마

 다른사진 둘러보기! 서장대와 서노대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1795년(정조 19년) 원행시에 정조는 현륭원 참배를 마치고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훈련과 야간 훈련을 시행하였다. 이 훈련은 화성의 방어체제를 점검하고 일원적인 지휘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서 '화성성조주조식'과 '야조식'의 훈련규정에 따라 진행되었다.





 큰사진보기!


2층 규모의 장대 주변에는 쇠뇌를 갖춘 팔각의 노대와 휴식을 취하는 군무소가 있었으나 현재 군무소(후당)는 복원하지 못하였다.





 큰사진보기!


12개의 팔면주석(八面柱石)이 서장대를 떠받치고 있다.



 

서이치2



 큰사진보기!
서이치


치는 성곽의 요소 요소에 성벽을 돌출시켜 전방과 좌우방향에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병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화성에는 10개소가 있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서이치2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서이치는 서장대와 서포루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타 치성과 동일하게 누각이 없이 여장만이 설치되어 있다.


서포루2



 큰사진보기!
서포루2(西砲樓)

서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화성장대와 서일치 사이 서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서포루2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포루는 치성과 같이 성벽을 돌출시켜 검정벽돌로 쌓았으며 나무 마루판을 이용 3층으로 구획 하였다.





 큰사진보기!


벽면에 포혈을 내어 화포를 두고 위에는 여담(담장)을 둘러 적을 위와 아래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서일치




 큰사진보기!
서일치

서일치는 서포루와 서북각루 사이에 위치한 치성으로 누각이 없이 여장만이 설치되어 적병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활용되었다.



 큰사진보기!



 다른사진 둘러보기! 서일치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큰사진보기!  



 

 

서북각루



 큰사진보기!
서북각루(西北角樓)

서북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서북쪽 화서문 위 팔달산 자락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설치한 높은 마루식 목조건물이다. 아래층은 군사들이 수직을 하던 온돌방이 꾸며져 있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서북각루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서북각루 내부에서 바라본 북쪽 성곽이다.





 큰사진보기!


서북각루에서 본 서쪽 성곽이다. 가까이 서일치와 멀리 서포루가 보인다.





 큰사진보기!


누조(漏漕)로써 현안에 뜨거운 물이나 기름을 붓는 시설이다.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큰사진보기!
화서문(華西門)과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보물 제 403호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은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원형을 유지하여 [보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화서문은 화성의 서쪽에 있는 문으로 조선 정조 20년(1796년)에 완공되었고 동쪽에 있는 창룡문과 같은 규모이며 문을 보호하는 옹성도 같은 형식이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문루는 홍예문 위에 단층이며, 바깥쪽은 평여담이 설치되었고, 문안의 남쪽에는 수문청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며 바깥쪽은 한쪽이 터진 반원형의 옹성이 있다.





 큰사진보기!


옹성은 전돌로 쌓았고, 적을 막기 위해 세로로 길게 구멍을 만든 현안과 총과 활을 쏘는 구멍인 총혈과 사혈이 각각 뚫려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공포는 간단한 익공식이다.





 큰사진보기!


화서문 홍예천장의 용그림이다.





 큰사진보기!


화서문 내부 가구의 모습이다.





 큰사진보기!


옹성은 여담을 두르고 통로를 만들었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큰사진보기!


서북공심돈은 화성의 2개 공심돈 중 하나로 화서문 옆 지척에 위치하고 있다.





 큰사진보기!


공심돈이란 적의 동정을 살피는 일종의 망루로 수비와 공격을 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





 큰사진보기!


공심돈은 목조 3층으로 안에는 계단을 따라 위로 오를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하여 총안과 포혈이 뚫려 있으며 주위 성벽보다 높게 하여 경계와 방어에 효율적으로 되어있다.


 

북포루



 큰사진보기!
북포루(北砲樓)

북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포루는 성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건물을 지은 것이며 성내에 있는 아군의 동향을 적이 알지 못하도록 설치한 시설물로 초소나 군사 대기소와 같은 곳이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북포루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포루 아래 성벽 여장(담장)에는 여러 개의 총구멍을 뚫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큰사진보기!


총구멍을 통해 바라 본 북쪽 성곽, 멀리 북서포루가 보인다.





북서포루


 큰사진보기!
북서포루(北西砲樓)

화성의 5개 포루 중 북서쪽에 위치한 북서포루는 검정벽돌을 쌓아 치성과 같이 성밖으로 돌출시키고 내부는 나무판을 이용 3층으로 구획하였으며 포혈을 만들어 화포를 감추어 두고 위와 아래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북서포루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3층 건물임에도 성 안쪽에서 보면 단층 건물로 보이고 지붕의 외쪽은 우진각 내쪽은 맞배 모양이다.




북서적대


 큰사진보기!
북서적대

장안문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북서적대라고 부른다.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로써 포루와 치성은 성곽 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이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북서적대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적대는 성곽보다 높게 만들어서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였으며 총안등을 만들어 유사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장안문


 큰사진보기!
장안문 (長安門)

사적 제 3호

위치 :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장안동

이 문은 화성 4대문의 북쪽 문으로서 정조 18년(1794년) 건축되었으며 중국의 역사에서 장안은 국가의 안녕을 상징하는 문자로 이를 정조가 북문의 이름으로 정해 태평성대를 구가한 중국 한.당의 서울이었던 장안의 영화를 화성에서 재현하려 이름을 장안문이라 하였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장안문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이 문은 남쪽문인 팔달문과 함께 화성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6.25전쟁 때 전화로 문루가 완전히 불타버리고 구조물도 많이 파손된 것을 1976년 옛모습대로 복원하였다. 홍예문의 구조는 높이 6.47m, 너비 5.57m이고 홍예 위에 2층으로 된 누각이 설치된 전형적인 성문 구조이다. 문루의 높이 는 13.5m이고, 정면의 너비가 18m, 측면너비가 9m이다.



 큰사진보기!

장안문의 바깥에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반으로 포갠 독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북옹성의 정면 초루는 축성당시에는 없었으나 후에 세운 것이다. 옹성은 전벽돌로 쌓았는데 높이가 6.6m에 바깥 둘레는 67.5m이다.




 큰사진보기!

이 옹성에 현안 16개를 뚫었으며 안쪽에는 누조 8개가 있고 옹성의 중앙에 문을 내어 장안문과 마주 대하게 하였다. 문의 좌우에는 북옹성을 공격하는 적을 격퇴할 수 있도록 적대가 있으며, 적대는 우리나라 다른 성곽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귀중한 시설이다.








 큰사진보기!


장안문 옹성의 홍예문이다.





 큰사진보기!


장안문의 다포계 공포다.





 큰사진보기!


장안문의 내관 전경이다.





 큰사진보기!


장안문 문루 2층의 내관 전경이다.





 큰사진보기!


장안문 홍예천장의 용그림이다.







 큰사진보기!


장안문 왼쪽에 위치하고 있는 북동적대의 장대한 모습이다.





 큰사진보기!


장안문 오른쪽에 위치한 북서적대의 견고한 모습이다.





북동적대



 큰사진보기!
북동적대


북동적대는 장안문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서적대와 기능 및 형태가 거의 같다.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로써 포루와 치성은 성곽 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이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북동적대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적대는 성곽보다 높게 만들어서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였으며 총안등을 만들어 유사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북동포루



 큰사진보기!
북동포루(北東砲樓)

북동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북쪽 장안문과 화홍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포루는 치성과 같이성벽을 돌출시켜 검정벽돌로 쌓았으며 나무마루판을 이용 3층으로 구획하였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북동포루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벽면에 포혈을 내어 화포를 두고 위에는 여담(담장)을 둘러 적을 위와 아래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화홍문



 큰사진보기!
화홍문(華虹門)

화성의 북쪽 수문으로 정조 19년(1795년)에 완성되었으나 1922년 7월 대홍수로 파손된 후 1932년 5월 9일 복원하였다. 이 문은 아름다운 일곱개의 무지개 홍예 돌다리 위에 문루를 세웠으며 홍예다리 위에는 빗물이 배수되도록 7개의 누조를 만들었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화홍문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담장은 벽돌로 쌓았으며 타구를 만들지 않고 네모 모양의 대포구멍 8개를 만들었고 다시 그 위에 평담장을 만들어 소포구멍 4개를 내었다.





 큰사진보기!


문루는 정면에 기둥 4개 측면에 기둥 3개이고 바깥쪽은 관문에 귀면을 그렸으며 이 문은 평소에는 성곽의 일부이자 교량으로 설계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시내를 관통하는 수원천이 범람하지 않도록 물길을 조정하는 구실도 하였다.





 큰사진보기!


이 문은 일곱개의 수문을 통해 장쾌한 물보라가 넘쳐 나오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보고 수원팔경 중 [화홍관창]이라 불려지고 있다.

 

방화수류정



 큰사진보기!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방화수류정은 다각형 정자로 본래 이름은 동북각루라 하며 화성에 있는 4개 각루 중 하나이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방화수류정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각루는 비교적 성곽의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 감시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설치한 건물이다.





 큰사진보기!


뛰어난 건축미와 경관의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방화수류정은 연접한 용연(龍淵) 홍화문(華虹門)과 함께 화성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큰사진보기!


서쪽 벽에 십자(十字)무늬를 넣어 멋을 부렸다. 높은 주초 위에 세운 기둥이 아래는 둥글고 위는 네무지게 변화를 주었다.


 

용연



 큰사진보기!
용연(龍淵)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살려 용연 수면 가운데 당주(섬)를 만들어 놓고 버드나무를 심었다. 남쪽 가파른 언덕 위 방화수류정과 용머리 바위 그리고 버드나무 줄기 사이로 떠오르는 보름달이 수면 위에 비추어지는 아름다운 정취를 용지대월이라 하며 수원팔경 중 하나이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용연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용연에 솟아오른 용대가리 위에 방화수류정이 세워졌다.





 큰사진보기!


용연의 배수구 이무기(석리두)이다.




 

북암문



 큰사진보기!
북암문(北暗門)

적이 알지 못하도록 후미진 곳에 문을 내어, 평상시에 사람, 가축, 수레가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이 암문(暗門)이다. 비상시에는 문을 흙으로 채워 막아버릴 수 있다. 수원 화성에는 모두 다섯 개의 암문이 있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북암문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그 중 방화수류정과 동북포루 사이에 있는 것이 북암문이다. 북암문은 지형상으로 골짜기진 곳에 있어서 성 밖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큰사진보기!


북암문 바깥쪽에서 보면 암문 주변에 전돌로 둥글게 성벽을 쌓아 좌우벽이 첨성대처럼 보인다.



 

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



 큰사진보기!
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
(彰聖寺 眞覺國獅 大覺圓照塔碑)


이 비는 전각국사(1307~1385)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우왕 11년(1385)에 만들어졌다. 진각국사는 13세에 출가하여 여러 절에서 수행하였고, 원라라에서 돌아와 치악산에서 은거하던 중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관직을 받았으며, 부석사를 중수하는 등 고려말기에 활약하였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비문은 이색이 짓고 글씨는 혜잠이 새겼다. 비의 형태는 장방형 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어 고려말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비는 본래 광교산(상광교동 산 41번지) 기슭의 창성사 폐사지에 있었던 것을 보물로서의 가치와 문화유산 보존관리 방안의 하나로 1965년 6월 9일 이곳을 옮겨 놓았다.


동북포루


 동북포루에서 바라본 수원시내 파노라마  큰사진 보기

*.동북포루에서 바라본 수원시내 파노라마 입니다.



 큰사진보기!


동북포루(東北砲樓)

동북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포루는 성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위에 건물을 세워서 군사들이 적에게 노출되지 않게 하기 위한 초소나 대기소와 같은 곳이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동북포루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건물 모양이 춤추는 아이의 머리에 수건을 돌려 맨 모습과 같다하여 일명 각건대라 한다.





 큰사진보기!


동북포루에서 본 북쪽 성곽, 멀리 방화수류정이 보인다.





 큰사진보기!


동북포루에서 본 수원시 전경이다.





 큰사진보기!


동북포루에서 본 동쪽 성곽, 멀리 동장대(연무대)가 보인다.




 

북동암문



 큰사진보기!
북동암문(北東暗門)

수원 화성에는 모두 다섯 개의 암문이 있다. 그 중 북동암문은 동북포루와 동장대(연무대) 사이에 있는 것이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북동암문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암문이란 성의 샛문으로 으슥하고 후미진 곳에 축조하여 적이 모르게 양식이나 무기 등의 물자를 반입하거나, 사람들이 은밀히 내왕할 수 있게 만든 비밀통로이다.





 큰사진보기!


따라서 암문에는 누각도 없거니와 문의 크기도 겨우 말 한 필이 드나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으며 위는 보통 성곽처럼 되어 있다.


 

동장대(연무대)


 동장대에서 바라본 수원시내 장안구일대  파노라마  큰사진 보기

*.동장대에서 바라본 수원시내 장안구일대 파노라마 입니다.



 큰사진보기!
동장대(東將臺)

동장대는 화성의 2개 장대 중 하나로 일명 연무대라고도 부른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동장대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화성장대가 군사령관의 지휘소라면 동장대는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곳으로 지형은 높지는 않지만 사방이 트여 있는 낮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성의 동쪽 군사시설 중 중요한 곳으로 화성 시설물 중 가장 위용이 있는 곳이다.





 큰사진보기!


동장대 뒤편으로 영롱담과 성벽에 이르는 석계이다.





 큰사진보기!


동장대 뒷편에 있는 꽃담으로 일명 '영롱담'이라 한다.


 

동북공심돈


 동북공심돈에서 바라본 창룡문과 동장대일대  큰사진 보기

*.동북공심돈에서 바라본 창룡문과 동장대일대 전경 입니다.




 큰사진보기!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동북공심돈은 화성의 2개 공심돈 중 하나로 창룡문과 동장대 사이에 있다. 내부가 속이 비어있고 나선형 모습으로 되어 있어 일명 소라각 이라고도 한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동북공심돈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이곳은 일종의 망루로서 수비와 공격을 할 수 있고 포를 쏠수 있으며 검정벽돌로 둥글게 축조한 건물은 우리나라에선 화성에만 있는 특이한 건물 중 하나이다.





 큰사진보기!


동북공심돈은 원형 3층으로 구조하고 위에 목조건축물이 있다.



 

동북노대



 큰사진보기!
동북노대(東北弩臺)

노대는 내부 시설없이 대 위에서만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게 만든 곳이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동북노대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치(雉)처럼 돌출한 높이 13척 석벽 위에 방형 평면을 형성하고 전돌을 18척 높이로 쌓아 완성했다. 대의 넓이는 외벽의 폭이 19척이고 내면의 너비는 17.4척이다. 성벽으로부터 돌출한 길이는 20.5척이고 삼면에 원여담(圓女담)을 설치하였다.





 큰사진보기!


성 밖 면에 현안을 만들어 접근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게 하였고 여담마다에 총구멍을 내었다.


 

창룡문



 큰사진보기!
창룡문(蒼龍門)

이 문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 동녘 '동' 은 같은 뜻이라 연유한데서 창룡문이라 하고 조선 정조 19년(1795년)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6.25전쟁 때 전화를 입어 문루가 소실되고 문의 기틀인 홍예까지 크게 파손되었던 것을 1978년의 화성복원정화사업시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에 따라 옛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창룡문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문루 하부 구조는 규모를 각기 달리하면서 내, 외 이중 홍예로 구축되어 있는 것이 특색인데 내홍예는 높이 3.97m, 너비 4.2m이고 외홍에는 높이 3.7m, 너비 3.6m로 홍예만으로 볼 때에는 장안문 보다 그 규모가 크다.





 큰사진보기!


문루는 1층 건축물로 정면이 4.9m에 협문이 있고 수문청은 문안쪽 가장자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큰사진보기!


이 창룡문의 바깥으로 동옹성이 있는데 한쪽이 북쪽으로 열려 있는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높이 2.9m에 둘레는 17.2m이다. 여기에는 누조 4개와 현안 3개가 설치되어 있다.


 

동일포루



 큰사진보기!
동일포루

동일포루는 창룡문과 동포루 사이에 위치한다.
포루는 성벽에서 돌출시켜 벽돌로 지은 누각건물로 화포를 감추어 두고 위, 아래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성곽 시설물 중에서 가장 중무장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동일포루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성밖으로 돌출되어 있으며 지붕의 형태가 성안쪽은 맞베지붕 형식으로 바깥쪽은 우진각 형식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동포루



 큰사진보기!
동포루(東砲樓)

동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동포루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포루는 성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작은 건물이며 성내에 있는 아군의 동향을 적이 알지 못하도록 설치한 시설물로 초소나 군사 대기서와 같은 곳이다. 마루 아래 여장(담장)에는 여러개의 총구멍을 뚫어 적을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이치


 파노라마 큰 사진보기!

*.수원화성 동이치에서 바라본 수원시내 파노라마 입니다.



 큰사진보기!
동이치(東二雉)

치는 성곽 요소 요소에 성벽을 돌출시켜 전방과 좌우방향에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병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동이치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동이치는 동포루와 봉돈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큰사진보기!






 

봉돈



 큰사진보기!
봉돈(烽墩)(봉화대)

화성봉돈(봉수, 봉화)은 성곽과 맞물려 검정벽돌로 축조된 우리나라 성 제도에선 보기 드문 시설이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봉돈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봉돈에는 봉수(봉화)군을 두어 화성행궁과 주변을 정찰하며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을 통신 신호로 하였다. 화성군 장안면 흥천대 해봉에서 봉담읍 건달산 간봉을 받아 용인시 석성산(에버랜드 인근산) 육봉으로 전달하였다.





 큰사진보기!


봉화신호 체계

봉돈에는 화두 5개가 있다. 신호체계는 남쪽 첫째 화두로 부터 시작하여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를 올리고 적군이 국경근처에 나타나면 봉수 2개, 국경선에 도달하면 봉수 3개, 국경선을 침범하면 봉수 4개, 싸움이 벌어지면 봉수 5개를 전부 올렸다.


 

동이포루


 동이포루에서 바라본 수원시 팔달구일대  파노라마  큰사진 보기

*.동이포루에서 바라본 수원시 팔달구일대 파노라마 입니다.




 큰사진보기!
동이포루(東二砲樓)

동이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동이포루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포루는 성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작은 건물이며 성내에 있는 아군의 동향을 적이 알지 못하도록 설치한 시설물로 초소나 군사 대기서와 같은 곳이다. 마루 아래 여장(담장)에는 여러개의 총구멍을 뚫어 적을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삼치



 큰사진보기!
동삼치(東三雉)

치는 성곽 요소 요소에 성벽을 돌출시켜 전방과 좌우방향에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병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동삼치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큰사진보기!






 

동남각루


 동남각루에서 바라본 수원시 팔달구일대  파노라마  큰사진 보기

*.동남각루에서 바라본 수원시 팔달구일대 파노라마 입니다.



 큰사진보기!
동남각루(東南角樓)

동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동남쪽 남수문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설치한 높은 마루식 목조건물이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동남각루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이곳은 주위를 감시하기 좋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 화성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화성행궁



 큰사진보기!
화성행궁(華城行宮)

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행차할 때 임시 거처로 사용되던 곳이다.
정조18년~20년에 화성을 축성하고 팔달산 동쪽에 행궁을 건립했는데 평상시에는 유수부(지금의 시청) 관청으로 사용되었다. 정조는 선왕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사도세자의 원침에 자주 참배하고 이 행궁에서 숙박하였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화성행궁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당시에는 봉수당, 경룡관, 복내당, 유여택, 노래당, 신풍루, 남·북군영, 강무당, 무고, 수성고, 집사청, 서사청, 비장청, 우화관, 득중정과 행각 등 33개 동의 건물이 있어 궁전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큰사진보기!


그러나 일제 침략기에 행궁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던 봉수당이나 신풍루등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자리에 도립병원, 경찰서, 신풍초등학교 등이 들어서면서 지금은 행궁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현재 도립병원이 헐리고 봉수당, 장락당 등이 복원되고 있다.





 큰사진보기!

봉수당

우리나라 행궁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던 화성행궁의 주건물(정당)로서 정조임금께서 모친 혜경 궁홍씨의 회갑연을 열었던 건물이다. 원래 이름은 장남헌이었다. 정조 19년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이곳에서 베풀고, 그를 기념하기 위해 봉수당으로 불렀다.





 큰사진보기!

낙남헌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여 부왕 장조의 능침인 화산능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서 쉬어갔다. 정조는 노인들을 위한 양로연을 낙남헌에서 베풀고 각각 비단 1필씩을 하사하였으며, 뭇 노인들은 잔을 올려 장수를 빌었다. 낙남헌은 노래당과 함께 곱은 ㄱ자형으로 배치된 초익공양식의 팔각집이다.

 



화령전


 큰사진보기!
화령전(華寧殿)

화령전은 순조 원년(1801년)에 지은 건축물로 부왕인 정조의 어진을 봉안한 곳으로 조선 말기까지 제조 위장 이하의 관리를 두고 화성유수와 판관이 관리토록 하여 해마다 제향을 드렸다.




 다른사진 둘러보기! 화령전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순조는 화산릉을 참배하고 돌아가다 이곳에 들러 부왕인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해서 정전인 운한각 북쪽 풍화당에 노인들을 모아 시회와 주연을 베풀었다고 전한다.





 큰사진보기!


정조의 어진은 한일합방 직전에 창덕궁으로 옮겨 봉안 하던 중 일제강점기에 분실되었으며 지금의 것은 1992년 새로 복원하여 봉안한 것이다.


 

동일치



 큰사진보기!
동일치( )

치는 성곽 요소 요소에 성벽을 돌출시켜 전방과 좌우방향에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병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큰사진보기!





 다른사진 둘러보기! 동일치 둘러보기...




 큰사진보기!









 큰사진보기!






 



 

 

첨부파일 꼭알아야할수원화성이야기.z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