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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6)>
봉림사를 품은 무봉산과 함께
● 산 행 지 : 화성시 남양 무봉산(202m)
● 산행일시 : 2010년 5월 21일 (金)<부처님 오신날>
● 산행코스 : 북양삼거리-봉림사-북양삼거리. 화성시청-무봉산 중턱-신빈김씨묘-화성시청
(흰선 - 그동안 사랑을 나누었던 화성시의 산하)
(흰선 - 무봉산 산행코스)
그동안 맨발나그네되어 화성의 산하와 사랑나누기를 하다 보니 벌써 화성시의 산들중 200m가 넘는 산들 중에는 남양의 무봉산만을 남겨놓게 되었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건달산(336m), 태행산(295m), 삼봉산(270m), 동탄 무봉산(258m), 서봉산(250m), 칠보산(238m), 태봉산(226m), 남양 무봉산(202m)이다.
물론 삼봉산과 태행산을 이어 걸으며 지나친 몇개의 봉우리도 200m이상은 되리라 여겨지지만, 봉우리 이름도 모르고, 높이도 모르니 어쩔수 없이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다.
오늘은 200m이상의 높이를 가진 남어지 하나 남은 남양의 무봉산을 맨발나그네가 되어 걷기 위해 길을 나선다.
어제 저녁 오래간만에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반야탕의 세계에 빠졌기에 좀 늦은 기상을 하였다.
그래서 느지막히 무봉산이 있는 남양으로 향하는데 부처님오신날이라고 절을 찾아서인지, 아님 3일간의 연휴를 맞아 나들이를 나서서 인지 길이 꽤 막힌다.
그 길을 뚫고 남양의 북양3거리에 도착한 시간이 11시다.
그곳 적당한 곳에 차를 파킹하고 봉림사를 향해 출발한다.
맨발이되어 올라가는 길은 양옆으로 공장지대인데다가 시멘트포장이 되어 있어서 맨발나그네를 힘들게 한다.
2km정도 걸어 올라 도착한 봉림사 일주문 근처에는 초파일을 맞아 많은 차량들로 붐빈다.
경내에도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마침 도착했을때는 봉축행사는 끝나고 관욕(灌浴) 의식이 한창 거행되고 있었다.
관욕의식은 부처님 오신 날 청정한 감로수로 아기 부처님의 몸을 씻는 의식을 일컫는다.
의식의 형식은 석가모니불 정근(釋迦牟尼佛 精勤)을 하면서 차례로 희사하고 향수와 감로수로써 아기부처님을 목욕시키면서 성불을 발원한다.
관불의식은 우리 스스로가 모든 탐욕의 때를 씻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더러운 생각에서 벗어나 깨끗한 지혜를 성취하며 부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간절한 원을 세우며 봉행하는 엄숙한 의식이란다.
그렇게 관욕의식을 지켜본후 경내를 돌아 본다.
두산백과사전에 의하면 봉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덕여왕 때(재위 647∼654) 고구려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기 위해 창건한 호국사찰이다. 당시 궁궐에서 기르던 새가 절 주위 숲에 날아와 춤을 추었으므로 봉림사라 하고, 산 이름도 무봉산으로 바꿨다고 한다.
1621년(광해군 13)에 법당과 종각·요사를 중수하였으며, 1708년(숙종 34)에도 중수한 바 있다.
1978년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복장(腹藏)에서 사리가 발굴되었고, 1979년 이 사리를 봉안한 탑을 세우면서 봉향각과 종각도 다시 지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봉향각·망양루·범종각·요사채 등이 있고, 유물로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탱화 여러 점이 전한다.
1978년 대웅전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 금색을 입힐 때 복장에서 불상의 유래를 전하는 기록과 각종 불경이 발견되었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불상은 1362년(고려 공민왕 11)에 만들어졌다고 하며, 배 부분에서 의상을 U자형으로 처리하고 옷의 주름을 3줄로 표현한 점 등에서 고려 후기의 불상 양식과 일치한다. 눈을 수정으로 만든 점이 특이하다.
1984년 4월 10일 보물 제980호로 지정되었다.
복장에서 나온 《감지은자화엄경(紺紙銀字華嚴經)》 등 10여 종의 유물은 ‘좌상복장전적’이라는 명칭으로 1991년 9월 30일 보물 제1095호로 지정되었다.
이 중 《묘법연화경》 5종 13권을 제외한 나머지는 용주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한편 후불탱화와 지장탱화 및 신중탱화는 1884년(고종 21)에 만든 것이고, 칠성탱화는 1888년(고종 25)에 만든 것이다.> 라고 한다.
한참을 경내를 돌아본후 점심공양을 받기위해 서있는 줄에 합류한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두 벙거지를 둘러쓰고, 베낭을 멘채 맨발로 줄을 서있는 맨발나그네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줄에 서있기가 꽤가 나던 서너살 꼬마가 쭈구려 앉더니 내발을 유심히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내발을 찔러본다.
그의 어머니가 어쩔줄 몰라하기에 내가 맨발을 그 꼬맹이의 손에 갖다대고 얼러준다.
무료한 줄서기에 나와 그 꼬맹이는 한참을 그렇게 논다.
다른 사람들은 말을 걸어 오지 않으니 뭐라 할 말은 없으나, 부처님도 생전에 수행내내 맨발이었으며, 깨달은후 45년간을 맨발로 인도 각지를 돌며 불법을 전파한 사실을 사람들은 아마 모르는 듯하다.
그뿐아니라 1959년 중공의 학정에 시달리던 달라이라마가 히말라야 설산을 넘어 인도로 망명할 때 그 일행 모두는 맨발이었다는 사실이다.
1953년 힐러리경이 에베레스트를 정복했을때 그가 고용한 네팔의 셀파들은 모두 맨발이었지만 눈속에서도 그들은 맨발로 탈없이 견뎌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맨발로 걷는 것에 대해 많이 알고는 있으나 실천에 옮기는데는 주저하고 있다.
많은 나의 친구들은 발이 다칠 것을 염려하고, 맨발로 걸으면 아플 것이라 여겨 걱정스러워한다.
그러나 2년여에 걸쳐 600km 정도를 맨발로 걸은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신발을 신고 걷는냐, 타고난 맨발로 걷느냐는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사회적인 편견과 눈총을 벗어날 의지와 결심만 있다면 언제든지 가능한 일이다.
작년 이맘때 경남 합천의 가야산을 맨발로 걷고 해인사에 들러, 그곳에 있는 팔만대장경에 입장하려다 제지를 당한적이 있다.
이유는 신성한 곳을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여야 하는데 맨발이라서 안된다고 그곳을 경비하는 분이
말씀하신다.
그래서 몇십년만에 팔만대장경을 볼려 했던 일이 수포로 돌아간 적이 있다.
난 그때 그분한테 "부처님도 생전에 맨발이었던건 아슈?"라고 작은 항변을 했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사람들의 편견과 눈총이 좀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맨발이 되면 기분이 좋아지고 편안함을 느끼니 난 형편이 닿은대로 맨발이 되어 걸을 것이다.
맨발이 되는 순간 내 찌든 영혼에 위안이 되고 기쁨이 몰려온다고 하면 믿으려 하지 않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마음의 평화가 옴은 물론이다.
누군가는 맨발로 걷는 일이란,
'그건 우리가 평생 잊고 있던 감각기관인 발바닥으로부터 전해오는 무한한 즐거움과 갇힌 발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꼬마와의 희롱과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5월의 햇살을 즐기다 보니 어느덧 내 배식 순서이다.
여러가지 산나물을 넣은 비빔밥과 수박 한조각, 그리고 미역냉국이다.
소박하고 담백한 절밥을 맛있게 먹는다.
그렇게 꿀맛처럼 맛있는 절밥으로 공양을 마치고 등산로를 찾으니 있을리 만무하다.
스님을 비롯한 여러사람을 붙잡고 물어봐도 무봉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없단다.
왜냐하면 무봉산의 정상은 군부대가 찾이하고 있어 접근이 불가능하단다.
하는 수 없이 어느분의 차를 얻어타고 내차를 둔 곳까지 내려와 다시 화성시청 쪽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도 등산로의 들머리를 찾을 수 없어 화성시청 안으로 향한다.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나와서 근무하고 계신 여러분들이 있길래 무봉산 들머리를 물으니 잘 모르고 계셨다.
다행히 어느 분의 도움으로 시청 청사 맨위로 가면 등산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을 통해 무봉산을 향한다.
얼마 오르지 않아 훌라후프 몇개를 걸어 놓고,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가 몇개 놓인 서너평 넓이의 안부와 만난다.
길은 두갈래이나 오른쪽 길은 신빈김씨묘역 쪽으로 난 길 같아 왼쪽 마루금을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
얼마나 갔을까, 콘테이너집 하나와 양봉통 몇개가 놓여 있고, 조금 더 나아가니 일차선 포장도로와 만난다.
아마도 공군부대와 무봉산 정상을 찾이하고 있는 부대를 연결해 주는 도로인 모양이다.
정상까지 가봐야 나에게 정상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므로 오던 길로 되돌아 신빈 김씨묘역 쪽으로 하산한다.
내려오는 길도 큰 어려움없이 내려 올 수 있다.
무봉산에는 밤나무도 거의 없어 다른 곳에서 나를 공포에 떨게 하였던 밤까시도 거의 없어 편하게 주변의 자연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내려온다.
숲속의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말을 건네온다.
숲속의 정령들도 살포시 내 어깨에 내려 앉아 이야기를 걸어온다.
숲속의 황홀한 환희가 나의 가슴 가득 적셔온다.
점점더 풍성해지는 그녀(山)들의 옷차림에서 여름이 닥아옴을 느낀다.
인간의 발이 땅을 밟지 않을 때 심신(心身)에 질병이 생긴다고 한다.
걷는 것이야 말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라 한다.
우리는 자연의 아들이요, 대지의 딸이기에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을 타고 났다.
내가 태어나고 내가 돌아가야 할 자연, 그녀의 품에 안겨 오늘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의 정기를 마음껏 마신다.
봉림사의 보물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앞에서도 벗어낼 수 없었던 번뇌가 맨발나그네되어 자연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잠시 머리를 떠난다.
높은 하늘, 시원한 공기, 푸른 자연 속에 있으니, 신선이 된 듯하다.
그렇게 그렇게 내려오다 보니 어느덧 신빈김씨묘역이다.
두산백과사전에 의하면 신빈김씨묘역은
<1994년 12월 24일 경기도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의 묘이다. 1404년(태종 4)에 태어나 1464년(세조 10)에 별세하였으며 소생으로는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다. 묘 주위에는 1465년(세조 11)에 세운 묘갈(墓碣)과 묘비, 사각 장명등(長明燈), 문인석 1쌍, 상석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빈김씨묘역을 둘러보며 세종대왕이란 분을 생각해 본다. 54년동안 세상을 사셨고, 그중 32년간을 임금으로 지냈단다.
정비인 소현왕후를 비롯해 10명의 후궁을 두었으며, 소현왕후 소생으로는 8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가 있으며, 그외 후궁들에게서는 총 12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중 신빈김씨와의 사이에서 여섯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하니 우선 신비김씨를 무척 총애하였구나 하는 생각과 또다른 생각으론 한글을 창제하랴, 그많은 발명품 만드는 것을 독려할랴 바쁜 와중에도 사랑을 많이한 군주로구나 하는 속물적인 생각을 하니 웃음이 튀어 나온다.
그렇게 보물 2점을 보유한 봉림사에게 한쪽 품을 내주고, 사랑많은 신빈김씨에게도 사후를 위해 한쪽 품을 내주었으며, 지금은 내고향 화성시의 시청사의 진산으로 그 한쪽 품을 내준 무봉산을 정상까지 오를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무봉산의 군부대는 여러가지 시설관계상 옮기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꼭 정상이 아니라면 어떠랴.
봉림사에서 출발하여 산 중턱으로 적당히 길을 내 신빈김씨묘역으로 이어지도록 해봄이 어떨가 한다.
그래야 내고향의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이 찾아 걸으며 역사를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청 직원들조차 시청사의 뒷산이 무봉산이라는 것을 모르는 현실이 안타까워 중언부언해본다.
이렇게 오늘도 내고향 화성시의 한 귀퉁이를 돌아보며 하루를 보낸다.
(댓글 보기)
채린 10.05.25. 08:22
감사합니다...
가끔 산행중에 얻어 먹는 절밥은 언제 먹어도 맛있습디다....담백하고...
뵌적이 있는데 맨발로 등산을 하면 한여름이라도 땀이 안난다고
들었는데 그런지 모르겠읍니다...
선배님 몸조심하시고 좋은산행 많이 많이 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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