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그녀시리즈2) 추석은 어머니였습니다

맨발나그네 2011. 9. 13. 08:11

 

 

추석은 민족의 대명절입니다.

밀리는 귀성 전쟁을 마다 않고 모두들 고향을 향합니다.

조상님을 모시기 보다는 그곳에 향수가 있고, 부모 형제와 만날 수 있기에 죽기 기를 쓰고 고향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평생을 경기도 밖에서 살아 본 적이 없으니 추석이 돌아오면 남들처럼 귀성 전쟁을 치러 본 적은 없지만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고향을 찾아었습니다.

그곳에는 어릴적 향수가 있고,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2009년 어머니의 88세 생신날)

 

그런데 올해는 처음으로 부모님이 안계신 추석을 맞았습니다.

군대 3년을 제외한다면 처음있는 일입니다.

두분이 4개월의 시차를 두고 얼마전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명절=어머니 였던것 같습니다.

추석전날이 되면 빨리 조심해서 오라는 전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가양주나 약식은 그 어느 요리사도 흉내낼 수 없는 우리 어머니 구길서여사님표 였습니다.

며느리들의 눈총을 받아 가면서도 송편 만들 쌀 가루를 엄청 많이 만들어 놓습니다.

그래봐야 모두 자식들에게 싸주기 위해 마련하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이것 저것 지천으로 먹을 것을 준비하시는 어머니의 손길은 바쁘기만 합니다.

추석을 쇠고 떠날 때는 어머니의 손길이 닿은 짐꾸러미가 바리바리 한 짐입니다.

가끔은 집에 돌아와서 다 먹지 못해 그예나 음식물 쓰레기가 되는 경우도 생기곤 합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싸 주시는 것은 군말없이 들고 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그런 어머니가 안계신 추석을 보냅니다.

그저 어머니의 목소리가 그립고, 어머니의 음식 맛이 그립습니다.

어머니의 한결같은 마음이 그립습니다.

어머니의 부재는 찾아가야 할 고향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고향도 마음 속에 묻어야 할까 봅니다.

즐거워야 할 추석에 외로움, 그리움, 보고픔이란 단어를 떠 올립니다.

그리고 십여년째 엄마없는 추석을 보내고 있는 우리 애들을 그동안 생각해 보지 못했음에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추석날 아침 조조할인 영화보기를 제안해 봅니다.

딸아이가 자신은 이미 본 ‘최종병기 활’을 권합니다.

그리고 기꺼이 다시 한번 보기위해 따라 나섭니다.

그런 딸아이가 고맙기만 합니다.

올해는 그런 추석이었습니다.

                                                                    (2011년 추석날에)

 

 

 

(2008년 그녀시리즈로 써놓았던 <그녀>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대신할까 합니다)

 

                          녀 (우리 어머니 구길서 여사) 

 

   그녀는 내가 이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다. 누가 억만금을 준다해도 그녀와의 사랑을 마다할 수는 없다. 그녀가 내게 주는 사랑은 한없이 큰 하늘이다. 그녀가 내게 주는 사랑은 잔잔한 강물같이 자상하고 큰 파도와 같이 강하다. 그녀가 내게 주는 사랑은 내 삶의 뜨거운 힘이다. 그녀가 내게 주는 사랑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가없다. 그런 그녀에 비하면 나의 그녀에 대한 사랑은 삶이 힘들때만 사랑을 빙자해 찾게 된다. 힘든 인생의 길에서 제일 먼저 보고 싶은 것이 그녀이다. 좌절의 숲에서 방황할때도 그녀가 보고싶어진다. 이제 마음을 다해 진실로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 마음을 다해 내몸같이 여기며 소중한 시간을 아껴가며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 그녀는 나와 50여년 이상을 동거동락하며 사랑을 나누었다. 그녀는 바로 나의 어머니이다.

 

 

  ‘엄마’. 아마도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아닐까? 또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렵고 힘들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어머니’ 아닐까? 이세상 모든이의 안식처이며,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존재. 항상 나를 응원해 주고 항상 내편이 되어주는 나의 어머니, 아니 이땅의 모든 어머니들일것이다. 부르기만 하여도 듣기만 하여도 눈물이 나는 이름 어머니! 그 가슴 뭉클한 이름에서 마저 향기를 잊어버리고, 우리는 잊고 산다. 그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그저 아쉽고 힘들때에는 그 어머니를 찾지만 행복할때는 잘 찾지 않게 된다.

 

 

  내나이 쉰다섯. 나도 장성한 딸아들을 두고있다. 그러나 구순이 낼모래인 어머니에게 나는 그저 그 어머니의 자식일 뿐이다. 젊었을때나 늙어서나 자식사랑의 샘물이 마르지 않는 어머니! 나보다 더 자주 전화를 해서 “밥은 제때에 잘 먹고 다니니?”, “술좀 줄여 먹어라”, “일찍 일찍 들어가라”등등 걱정이 태산이시다. 어디 나뿐이겠나. 그 많은 자식들 일일이 걱정하시다보면 하루해가 다 갈것이다. 그런걸 잘 알면서도 난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가끔하게 된다. 그래도 그녀는 언제나 전화 말미에는 “사랑한다. 내아들아” 하시며 사랑을 표현하신다.

 

 

  1922년 11월 초여드렛날(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7남4녀중 장녀로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에서 세상에 태어나신 나의 그녀 울어머니 구(종성具씨) 길(姞)자 서(書)자 여사님. 올해(2008년) 연세 87이시다. 어려서의 애칭이 ‘이쁜이’였다나 ‘착한이’였다나 하시는데 문제는 그걸 증명해줄 사람은 없고, 오로지 어머니의 진술뿐이니 그냥 우리는 믿는 수 밖에 없다. 걸어서 10리인 남사초등학교 4학년을 졸업하고 걸어서 20리인 송정초등학교 5-6학년을 힘들게 다니시고, 상급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가장 가까운 도시인 수원에 있는 상급학교 수원공립가정여학교(3년제, 수원여중고의 전신)가 1936년 4월 개교를 하였는데 둘째이모가 1회, 셋째이모가 3회이니 아마도 첫째인 어머니가 상급학교에 진학하기는 어려우셨을게다. 그시절 서울에는 몇몇 여학교가 있었지만, 외할아버지가 승낙하셨을리도 없으셨을게다.

 

(왼쪽은 나의 그녀인 우리 어머니이고, 가운데는 그녀의 남편인 우리 아버지이고, 오른쪽은 우리아버지의 일본유학시절 애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임.아버지의 앨범에 70여년간 자리를 잡고 있는 분이니까....)

 

 

  울엄니 22살 되던해 일본유학(5년제 중학교)을 마치고 와서 시골 면사무소에 다니고 있는 울아버지와의 중매가 들어왔을때 외할아버지 왈 “집안 사정이야 우리만 못하지만 밥은 안 굶길거 같으니 그리 가라”라는 엄명에 그저 운명이려니 체념하셧다는 울 어머니. 하긴 그 옛날 그저 얼굴도 못보고 중매로 짝을 맺던 그 시절, 그래도 외가집을 찾은 아버지를 먼 발치에서나마 훔쳐본 어머니는 그나마 나았다고 해야 하나. 하긴 아버지 입장에서는 일본에서 신식 여자들만 보아 오다가 어머니를 보았으니 어떠셨을런지 모르지만, 결혼생활 60여년이 넘도록 그에 대해서는 노코멘트이시다. 그러나 어머니는 가끔 “만약 그여자가 니들 엄마가 되었으면 니들 모두는 쪽박찼을거다”라는 멘트로 질투심을 불태우시도 한다.

 

 

그녀의 결혼식 사진

 

 

  어찌되었든 1944년 결혼을 하여 65년간 해로를 하고 있으니 아마도 하늘이 점지한 짝이 아닐런지. 이렇게해서 둘째 며누리이면서도 첫째며누리가 서울에서 양복점을 하시던 큰아버지와 서울에 사는 관계로 눈먼 시할머니와 시부모님을 모신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그 시절 외가집에는 찬모에다 집안일을 거드는 사람까지 두고 사시다가 집안일에 각종 농사일까지 해야하는 스물너덧살의 신부는 무척 힘들었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일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두분은 금슬이 좋으셨던지 1945년 첫째 봉희형을 해방동이로 나았고 연년생으로 1946년 둘째 만희형을 나았으며, 셋째 옥희누님을 1948년 낳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6.25때 발안의 최의원이 피난을 떠나 폐렴인 딸을 손도 못써보고 잃었다. 정말 안타깝다. 아마 그때 그런일이 없었다면 내게는 누이가 있는거고, 어머니에게는 늘그막에 친구처럼 지낼 딸이었을텐데.... 그래서 우리집에서는 어머니 앞에선 이 누님 얘기를 꺼내는 것이 금기시 되어왔다.

 

 

                    ( 왼쪽 아래가 어머니, 왼쪽 위가 아버지이시다. 1949년 경)

 

  그 이후로도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은 계속되어 1951년 전쟁의 와중에도 셋째 병희형이 태어났고, 1954년엔 내가, 1956년엔 동생 종희가, 1958년에는 동생 청희가 태어났다. 막내 황희가 1963년 이세상에 태어난후 우리 어머니의 아들낳기 릴레이는 끝을 맺었다. 요즘은 하나 둘도 키우기 어렵다고 난리인데 어머니 나이 24살부터 시작하여 42살까지 18년간을 오로지 우리 자식들을 낳고 키우고, 집안살림하는데 청춘을 다 받쳤던 것이다.

 

 

  내 어렸을적 나의 그녀 어머니 모습은 면사무소의 공무원이었던 남편이 아침에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면 저녁때나 되야 퇴근하였으므로, 봄부터 가을까지의 논농사 밭농사를 모두 건사해야 했다. 물론 매년 머슴을 두기는 했지만, 농사일정에 맞춰 품앗이 계획을 세우고, 품앗이 가지고 모자라는 인원은 품삯을 주고 동원해야 하며, 이들이 일하는데 아침참, 점심, 오후참, 참과 참 사이에 술참등 하루 너댓번에 이르는 식사시중을 들어야 했으며, 그렇지 않은 시간에는 텃밭이라든지 다른 밭일로 하루도 쉴틈이 없었다.

 

 

  겨울이면 겨울대로 많은 식구들의 빨래며, 튿어진 옷들을 꿰매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옷매를 갖추게 하느라고 영일이 없었다. 그 시절 빨래는 거의 모두 면 재질이어서 700m쯤 떨어진 빨래터에서 애벌 빨래를 한후 다시 집으로 가져와 양잿물을 넣고 삶은후 다시 빨래터로 내다 빨아야 했는데 멀기도 했으려니와 엄동설한에 샘물에 그 모든일을 해야 했으니 아직 꽤 젊었을 나이의 우리 어머니의 손등은 항상 거북이 등이었던거 같다.

 

 

  저녁이면 올망졸망한 자식들이 뛰어다니며 노느라 헤진 옷이며 양말을 꿰매 대느라 항상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했으며, 아침이면 아침대로 일찍 일어나 식사준비하랴, 도시락 6-7개 싸랴, 농사일 준비하랴, 그야말로 철인이 아니면 해낼수 없는 일을 여자의 힘이 아닌 오로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해내셨다. 어머니이기 때문에 강했으리라.... 그뿐이 아니다. 아들 일곱을 낳은 죄로 온동네 산파는 도맡아 하신것 같다. 요즘처럼 병원이 멀고 귀하던 그 시절 시도 때도 없이 동네의 누군가가 산전 진통이 오면 우리집으로 달려와 산파를 부탁했고 아침밥을 푸다말고라도 어머니는 기꺼이 달려가 산파노릇을 하셨던것이다. 그럴라치면 아들들만인 우리들중의 누군가가 그일을 대신 해야했다.

 

 

  어디 그것 뿐이랴. 자식교육에 남달랐던 나의 그녀 어머니는 그 시절 우리가 학교에 입학하기전에 한글을 깨쳐서 갈 수 있도록 했으며,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그시절 깡촌에서의 애들답지않게 입성(옷입음새)도 챙기셨고 먹성(도시락)에도 신경을 써주셨다. 그시절 도시락 반찬으로 김치, 단무지, 새우젓등이 거의 전부이던 시절, 우린 가끔은 밥위에 달걀 부친것을 얹은 도시락을 먹어보는 호사도 누렸으니 말이다. 또 봄 가을 소풍때는 닭을 삶아서 여러가지 고명을 뿌린 닭찜에다 그 시절 세무서원의 잦은 단속에 애를 먹었던 동동주를 겯드려서 선생님들을 대접하도록 싸 보내셨으니 아마 치마바람의 효시가 아니었을까. 하긴 그런 억척이 우리들 대부분을 대학물을 먹도록 하셨을거다. 누구는 초등학교 5학년때 서울로 전학을 시키고, 누구는 발안중학교를 마친후 수원이나 안양의 고등학교로 진학을 시키고, 누구는 어쩔수 없이 발안농고에 진학을 하였드라도 대부분을 대학물을 먹게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그녀였다. 우리들의 학자금 마련을 위해 발을 동동 구르셨겠지만, 한번도 내색을 안하던 그런 철의 여인이었다. 물론 그옆에는 언제나 꼼꼼하게 그녀를 지켜보는 그녀의 남편인 우리 아버지가 있었겠지만......

 

 

            (마을로 농활 봉사활동을 온 이대생들과 함께  70~71년 정도가 아니었을까)

 

(우리집 유일의 ROTC 장교인 여섯째 청희가 부모님을 강원도로 초청하여 착칵, 1983년경)

 

(84년 정도로 추정되는 가족사진, 가운데줄 오른쪽이 어머니이다)

 

(아버지의 수원노인대학 졸업식에서 두분이)

 

(88년 1월 어머니와 이모님2분, 외숙모님. 오른쪽 끝이 어머니이다)

 

(79년 대학축제에서 부모님모시기에 초청하다)

 

(대학졸업식에서 그녀와 함께, 1981년)

 

  지금도 나의 그녀인 어머니는 일손을 놓지 않는다. 물론 예전같지 않아 많이는 못하시지만 하루 온종일 일에 매달리신다. 그렇게 거둔 채소며 곡식들을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시려고 애를 쓰신다. 그게 낙이라신다. 그러나 누가 모르랴. 그일이 그연세의 그녀에게 힘에 부친다는것을.... 그 연세또래의 남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고스톱으로 노년을 보내시는데 나의 그녀인 어머니는 아직 고스톱도 할줄 모르신단다. 또 작은 쌈지돈이라도 생기면 아들들의 새끼인 손자들에게 나누어 주지 못해 안달을 하신다. 어디 그뿐이랴 아들들의 여자(며느리)들에게 같은 여자로써의 질투(고부간의 갈등)보다는 그들을 감싸 안으려 노력하신다. 그 노력의 결과는 며느리 생일이면 꼭 미역국에 넣을 소고기 값이라고 금일봉을 하사하시고, 매년 정월 초하루 며느리들의 세배를 받은후에는 꼭 세배돈을 챙겨 주시는 신식 시어머니가 되기위한 노력도 하신다. 어디 그뿐이랴 얼마전 시골집에 들렸더니 어머니께서 그러신다. 발안에 노인복지회관이 생겨 다녀 볼려고 들리셨단다. 그런데 버스정류장에서 좀 멀리 떨어져있어 다리가 불편하신 어머니가 다니기에는 무리여서 포기하셨단다. 하긴 그 연세에 젊은이들이나 한다는 에어로빅을 하신다고 마을회관으로 가시니 나와 같은 젊은이와의 데이트를 오래 오래 즐기시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계신게 엿보인다.

 

 

       (2004년 그녀의 생신에서)

 

 

  오는 12월 5일(음11월8일) 나의 그녀인 어머니의 87번째 생신이다. 그래서 오늘 자식들이 그녀를 위해 조촐한 생신상을 차렸다. 그녀와 내가 함께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것이다. 매년 그녀의 생일날 죄스러움을 덜 느낄려면, 매년 어버이날 그녀 생각에 덜 울을라면, 난 그녀와 많은 시간을 갖어야만한다. 그녀는 매일 매일을 우리 자식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걸 잘 알면서도 이러저런 핑계로 그녀와의 데이트에 무심했었다. 늘 괜찮다고 하시지만 괜찮치 않음을 잘 알면서도 무심했었다. 죄송하고 송구스러워 한마디 하면 그러지 말라시는 그녀다. 자식들 걱정할까봐 속내를 숨기신다.

 

 

  그녀의 몸과 얼굴은 하루하루 메말라간다. 그동안 우리가 커가는 동안 우린 그녀의 피와 살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메마른 얼굴과 주름이 지금의 우리 자식들의 웃는 얼굴이다. 그녀는 일생을 바쳐 우리 자식들을 바라보며 잘 되기를 빌고 있는것이다. 지금도 정한수를 떠놓고 빌기도하고, 집에서 가까운 덕지사를 수시로 드나들면서 오로지 자식들과 그 자식들의 자식인 손자손녀를 위해 불공드리기를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는 아들들 모두가 착하게 자라주어 고맙노라고 하시지만, 그 아들들이 더 번듯하기를 바라는 그녀의 심정을 누가 모르랴.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오로지 그녀가 나를 일방적으로 사랑해왔지만, 이제는 내가 마음을 다해 진실한 사랑을 그녀에게 전해야할 때다. 그녀와의 데이트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도록 노력할것이다. 그녀가 전화통화 말미에 외치는 “사랑한다!윤희야”처럼 나도 “어머니 사랑합니다”를 자주 외칠께요. 그리고 자주 찾아 뵐께요. 사랑합니다! 어머니.

 

 

댓글 읽기

 콩반쪽(강윤자) 11.09.14. 10:48

그 동안 좋은글을 써주셨는데 오늘 아침 저를 울리고 말았습니다.
구순어머니와 함께 사는데 감사함을 잊고 있는 제가 어리석어서 ~
 
하양나비 11.09.15. 00:03
한편의드라마를 보듯 잘 정리하셧네요

 

MILD.JH 11.09.13. 10:49
잠시 상념을 떠올리며 형님에 사진과 글속에 저를 접목해 봅니다
 
따스한마음(회장) 11.09.13. 17:26
명절.고향 하면 역쉬 어머님이 먼저 떠오릅니다
어머님에 잔잔한 그리움이 묻어납니다
잠시 숙연함속에 선배님에 마음을 생각하면서 어머님을 그려봅니다

 

esmero 11.09.14. 00:36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부모님께 잘 해드려야겠다는 다짐이 생깁니다.
 
  jedidiah 11.09.14. 05:06
명절 때마다... 보모님을 뵐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고스란히 살아나네요.. 부모님의 넘치는 사랑에 비하면 너무 보잘 것 없는 사랑이지만 그래도 노력해야 겠다는 다짐해 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리운 11.09.14. 08:45
부모님께 빚진것을 자식한테 갚는다고 합니다
어머니 참으로 제일 아름다운 말인듯 합니다
 
단팥빵 11.09.14. 13:23
눈물이 나네요~
저도 돌아가신 부모님이 넘 그리워요^^
 
겨울비1 11.09.14. 15:07
눈물이 핑 돕니다....아직 살아 계시지만 늘 받기만 하는 엄마의 사랑에 오늘도 가슴이 먹먹해져 옵니다... 부르기만 해도 가슴 져미어 오는 이름...그 이름은 엄마 입니다...
 
쌈장 11.09.15. 06:01
가슴찡한 글 넘감사드립니다. 어머님에대한 그리움과 진실된 사랑의 마음이 오롯이느껴지네요... 매일 그립습니다.
 
평생감사 11.09.15. 09:56
정말 가슴이 찡합니다*^^*

 

겨울사리 11.09.13. 23:40
감동을 주는 글입니다. 잘 읽었읍니다.
 
채린 11.09.14. 11:35
위대한 사모곡입니다. 세상의 어머니들이 모두 그리하셨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 위대하고 아름답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방랑자 11.09.17. 20:55
아버지! 어머니! 이 세상에서 제일이지요, 감히 그 무엇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천리장성 11.09.21. 14:37 new
마음에 와닿는 한편에 드라마 같습니다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곱들레 11.09.24. 00:14
.울 친정엄마랑 같으시네,,울 엄마 스토리인가 하고 착각을 읽는 동안 하였습니다,,
난 울 엄마 87세 인데 병석에 누워 간병하는데,,,,,아기 같애요,,지금은 울엄니가
 

  

곰발바닥 11.09.14. 18:02
맨발나그네님 추석은 잘 쇠셨는지요?^^ 부모님이 아주 다복하신 분들 같습니다^^
65년이나 해로하셨다니 참 보기 드문 경우고요^^
감동깊게 봤습니다~^^
 
독도는우리땅!! 11.09.14. 18:31
한편으로는 그립고 허전하고 애달픈날이기도했을꺼같습니다 하지만자녀와 영화데이뚜도하고 또하나의 추억을 얹었네요^^
 
청공 11.09.17. 15:30
어머님을 많이 닮으셨네요.
글 속에서 진정한 행복이 보이는것이 참 좋으네요.
변치않는 행복을 기대 합니다.빵긋

 

남산
11.09.13. 10:40
콧날이찡해오네요 맨발에나그네님 글 감사합니다
 
산소님 11.09.18. 07:43
마음이 차분해지며 코끗이 찡해오네요 ~~~~그리움에 가득찬 마음의글 잘보고갑니다

 
  경인-송수복 11.09.18. 13:43

돌아가신 저희 어머님이 생각나네요.

 

김병학 11.09.13. 10:51
그래 맞아 우리 모두의 어머니들은 그렇게 살아 왔지 ---윤희야 건강하게 산행하는 모습 보기 좋아 좋은 친구을 꼭 만나서 남은 삶을 행복하게 지내렴 !!!화이팅 하자!
 
이분재 11.09.15. 17:26
윤희친구 어머니와의 만남은 초등학교 다닐때부너 시작됐지.
박식한 어머니상의 모범이라고할까?
그런 어머니도 세월따라 가셨으니, 세월앞에 이길사람이 그어디 있겠는가?
친구야! 어멈님은 떠나셨어도 힘내고 살아가게.........

 

이희숙 11.09.15. 20:23
친구의 문자를 받고 먼저떠오르는것이
어머님이 안계신 친구의 허전한 명절이었지....
어찌하겠어 세월의 흐름을 막을길이 없으니.....
힘내! 아자 아자 파이팅!!!!!!!!!!!!!

 

대청봉 11.09.13. 10:24
그래~ 명절이면 더 뵙고싶겠구나~~
난 아직 곁에 모시구 있으니... 이 세상에 살아계신다는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하나님나라로 가시기 전까지, 없는 가운데도 편히 모시고싶다-- 이세상 떠나시는날 울지않기위하여...
우리모두의 어머니는 어머니다! 어머니는 한없는~ 사랑 사랑 바로그것이니깐,
윤희야~ 애들과함께한 영화구경 행복해보인다! 그사람도 좋아했을것이다.
 
최강일47 11.09.14. 09:49
소설하나 써라 엄마를 부탁해 2. 옛어른 들치고 고생안하신분 계시겠냐만, 큰형님이 더하실걸,,,  

 

이정례 11.09.13. 09:37
바다보다 넗고 하늘보다 높은것이 부모님의 애틋한 사랑 마음 아닌가 어머니의 빈자리 상상할수 없는 큰자리 무엇으로 메우리.....
 
유존희 11.09.13. 15:07
부모 계실때의 소중함을 그대로 적어 놓은글... 부모가 계실때에는 모르고 있다가 안계실때에 허전함 누구나 느낄수 있는 소중한 이야기 ...추석 한가위 명절에 새삼 부모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는 글이네요.

 

김인숙23,24 11.09.13. 11:24
선배님이 올려주신 글에 마음 짠 합니다. 저도 어릴적 고향에서 할머니가 키워주셨는데 그 할머니 기일이 추석 전날 11일이었거든요
그날 잠시 할머니한테 다녀오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아 못 다녀왔어요 속으로 나 시집괜히갔어 ㅋㅋ 그러면서 노가다했지요
제가 하기 힘든일은 다 노가다라합니다 ㅎㅎ 요건 선배님 한 번 웃으시라고 올린 글 저도 할머니가 많이 보고싶습니다.
 
안대환 (중21회) 11.09.13. 18:36
명절= 어머니 란 말씀에 동감 합니다. 제겐 아직 어머니 한분이 남아 계시지만 병환으로 몸이 불편하시어
벌써 10여년째 명절 음식을 해 주시지는 못하지만 그런 어머니 조차 없으면 더욱 허전한 고향길일거란 생각이 듭니다.
다복하신 가정에 형제들과의 우애를 나누는 명절이 계속 이어지시길 바랍니다.
 
홍순근18.19 11.09.14. 11:43
어머니에 대한글 언제보고 들어도 마음이 찡해옵니다...
선배님의 의좋은 7형제 그리고 지금은 마음속에 계신 부모님까지 사회의 표상 입니다...
올해 추석은 많이 쓸쓸하셨겠지만 엄마없는 자녀들을 생각해서라도 힘내시고 자녀들에게
새엄마의 정이라도 붙일수 있도록 기회를 주심이 어떠실런지요...좀더 안정된 가정을 위해서요...
 
선배님 힘내세요!
선배님 가슴속의 그녀와의 뜨거운 사랑이 오래도록 자주 아프겠죠!
가슴이 그녀를 잊어가기전에 그녀와의 이런 사랑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서
한꼬투리 일곱콩알처럼 의좋은 형제들이 나누어 가지면 좋을듯 합니다.
그녀가 영원히 사는길이 무엇인지 한번 고민해 보세요!

 

도령 12.07.14. 13:01
새삼 부모님이 보고싶습니다. 오늘당장 부모님찾아뵙고 저녁식사라도 해야겠네요.살아생전에 효도해야겠다고 다시한번 마음속다짐을 해봅니다.좋은글 감사합니다.
 
하얀소금 12.07.15. 11:07
遊子吟(유자음) - 孟郊(맹교)

慈母手中線(자모수중선) : 자애로운 어머니 손 안의 針線은

遊子身上衣(유자신상의) : 여행길에 오르는 아들의 몸에 입힐 옷 이라네

臨行密密縫(임행밀밀봉) : 떠날 때에 임박해서도 촘촘히 누비는 것은

意恐遲遲歸(의공지지귀) : 늦게 돌아올까 두려워하는 뜻 일거야

誰言寸草心(수언촌초심) : 누가 말할 수 있으리요! 한 치 자란 풀의 마음이

報得三春暉(보득삼춘휘) : 봄철 석 달 햇살의 報恩을 할 수 있다고.

寸草春暉 : 부모(父母)의 은혜는 일만분의 일도 갚기 어려움을 이르는 말. 이 고사성어의 유래가 된 시
하얀소금 12.07.14. 14:33
고맙다고 해도 부족한 것이 은혜 갚음이고, 마음이 애닯아도 그리움도 끝이 없어라.
좋은 글 귀하게 잘 읽었습니다.
맨발나그네 12.07.15. 05:40
'촌초춘휘'라...........
과문하여 처음 들어보는 말이기는 한데.......
다음번 어느 글에서건 꼭 한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꽃구름 12.07.17. 16:07
가슴이 괜히 짠해 오는 글입니다~~살아 생전에 잘 해드려야 하는데 늘 마음뿐~먹고 살기가 더 바쁘다는 핑계를....
 
걷기로45키로! 12.07.18. 10:24 new
아침부터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저도 아빠 보고 싶어요~~ㅠㅠ

 

유은주 13.12.30. 11:11

어머니에 대한글 보고 마음이 뭉클하네요. 훌륭 하신  어머니 존경받을만한  어머님  하늘 나라에서도  사랑 하는 아들의 마음이  느껴지실거 같네요 감동~~

 

  • 갑을이

    지금은 뵈올수 없는 그녀?가 사무치게 그리웁습니다. 살아생전 좋은 꼴 못보이고..속만 썩이던 자신이 너무너무 미워집니다. 저도 나그네님처럼 아직 볼수있고 만질수도 있다면..오늘은 설입니다. 설..그리움의 설.. 2014.01.31 20:41

  • 산아줌마

    어머니...가만히 불러만 보아도 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따스한 정감..아니 우리의 삶은 그냥 어머니입니다. 2014.02.01 05:59

  • 연아

    어머님이 끓여주신 따뜻한 떡국 한그릇이면 설은 풍요로웠습니다. 2014.02.01 14:56

  • 은순이

    그녀 없이는 단하루도 살수 없을것 같은 시절이 있었지요. 2014.02.01 20:36

  • 설매

    치매로 점점 모든것에서 멀어져 가시는 나의 그녀 울 엄마...........
    사랑합니다~~
    2014.02.01 22:46

  • 갑을이

    나이를 먹으면서 더욱 그녀가 그리워집니다. 2014.02.02 05:41

  • 감치미

    언제까지나 그녀는 우리곁에 머무를줄 알았습니다. 2014.02.02 09:11

  • 닥터진

    무었을 먹든지 음식을 앞에 두면은 당신 생각이 나집니다. 2014.02.03 14:03

  • 모나리자

    어머니 우리는 거미의 속을 파먹는 거미인가 봅니다 박이순여사 사랑합니다 ^^ 2014.02.03 22:36

  • 순희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씩 알아가는 부모님의 그헤아릴수없는 사랑...ㅠㅠㅠ 2014.02.04 10:29

  • 아리수

    살아계실때는 왜 내가 그랬을까... 2014.02.05 16:53

  • 주전자

    가고 안계시면 철이 듭니다. 2014.02.06 11:22

  • 쥬라기

    눈물이 납니다. ㅠㅠㅠ 2014.02.07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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